영화 ‘리틀 포레스트’에서 요리 기획을 맡은 푸드 스타일리스트 진희원 실장은 “주인공 혜원은 요리를 하면서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며 “요리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최고의 방법”이라고 말했다. 서재훈 기자

영화 ‘리틀 포레스트’를 보고 나면 배가 고파진다. 맛과 향이 자꾸만 아른거려 침이 고인다.

도시 생활에 지친 주인공 혜원(김태리)이 고향 집에 내려와 사계절을 보내는 동안, 텃밭에선 토마토와 옥수수가 자라고, 식탁에는 20여가지 제철 음식이 맛깔스럽게 차려진다. 배추 된장국, 수제비와 배추전, 양배추 샌드위치, 오이 콩국수, 쌈밥 도시락 등 한끼 식사가 소박하고 정겹다. 프랑스 디저트 크렘브륄레를 만들며 혜원은 엄마와의 추억을 떠올리고, 관객은 봄꽃 파스타와 아카시아 꽃 튀김의 맛을 상상하며 봄을 기다린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는 혜원의 레시피를 따라서 음식을 만들었다는 후기도 자주 올라온다.

이 음식들은 TV CF와 화보 등에서 활동해 온 푸드 스타일리스트 진희원(41) 실장의 작품이다. 동명 원작 일본 만화와 영화를 인상 깊게 본 진 실장이 한국에서 영화가 만들어진다는 소식을 듣고 임순례 감독을 먼저 찾아갔다. 임 감독은 “마치 송강호가 넝쿨째 굴러온 것 같다”며 반겼다.

최근 서울 연희동 작업실을 찾았을 때 진 실장은 “식사하셨어요?”라는 인사로 맞이했다. “못 먹었다”고 하면 당장이라도 따뜻한 한 그릇을 내올 듯 진심이 듬뿍 느껴졌다. 영화에 담긴 진 실장의 요리도 그렇다. 마음의 허기를 달래고, 사람 사이 온기를 불어넣는다.

‘리틀 포레스트’에서 주인공 혜원이 봄꽃 파스타를 먹는 장면. 영화 속 제철 음식들은 마음의 허기를 달래 주고, 고단한 청춘의 오늘을 격려한다. 메가박스플러스엠 제공
먹지 않고 바라보기만 해도 행복해지는 봄꽃 파스타. 서재훈 기자
“요리는 자신을 사랑하는 최고의 방법”

진 실장은 “이야기가 있는 요리”를 기획했다. 극 흐름을 따라가며 캐릭터의 감정과 상황을 보여줄 수 있는 음식들을 준비했다. “눈밭의 배추 뿌리가 얼지 않았는지” “오랜만에 찾은 고향 집에 묵은 쌀이 얼마나 남아 있는지”까지 상상하면서 임 감독과 의견을 나눴고, 함께 만들어서 먹어 본 뒤에 결정했다. 동물보호시민단체 카라의 대표인 임 감독의 성향을 반영해 고기와 생선은 제외됐다. 어린 혜원에게 엄마(문소리)가 양배추전(오코노미야끼)을 만들어 주는 장면에서 가쓰오부시 덩어리를 가는 도구로 쓰인 대패처럼 진 실장의 기발한 아이디어가 곳곳에 담겼다. 콩국물을 담은 옛날 사각 주스병도 재치 만점이다. “밤조림과 오코노미야끼를 제외하고는 일본 원작의 요리를 전부 바꿨어요. 계약 조건에 음식을 일정 비율 이상 바꾸지 않는다는 조항이 있었던 걸로 알아요. 하지만 요리에 이야기가 있으니 원작자도 시나리오를 보고 흔쾌히 허락했죠.”

김태리는 매 계절 촬영에 앞서 진 실장에게 요리를 배웠다. 워낙 손끝이 야무져서 영화에는 김태리의 손길이 그대로 담겼다. 진 실장과 푸드 팀은 촬영지인 시골 집 뒷마당에 간이 작업실을 꾸렸다. 만반의 준비를 마쳤지만 첫 촬영이었던 삼색 설기떡부터 난관에 부닥쳤다. 영하 16도까지 떨어진 추위에 떡이 익지 않았던 거다. “며느리 잘못 들이면 떡이 선다는 옛말까지 생각나면서 눈앞이 아찔하더라고요. 충격과 공포였죠(웃음). 부랴부랴 마을회관으로 달려가 얼마 남지 않은 쌀가루로 간신히 만들었어요.”

혜원의 엄마는 가쓰오부시를 대패로 갈았다.
정겨운 친구들과 막걸리잔을 기울이는 포근한 겨울 밤.

막걸리도 푸드 팀을 애먹였다. 온도에 매우 민감한 술이라서, 봄에는 큰 일교차가, 여름엔 무더위가 문제였다. 쌀쌀한 가을에 술을 빚어 촬영했다. 푸드 팀 숙소에선 술이 익어 가는 ‘시큼하고 큼큼한 냄새’가 떠나지 않았다. 진 실장에게는 곶감도 고민거리였다. 얼었다가 녹았다가 반복하며 말린 곶감은 거무튀튀한 색이다. 화면에 담기니 예쁘지가 않았다. 그래도 제품을 사오지 않고, 아버지의 도움을 받아 곶감을 마르는 단계별로 준비해 찍었다. 아무리 촬영용이라지만 요리는 정직이 생명이다.

촬영을 끝낸 음식은 다같이 나눠 먹었다. 모든 음식이 인기였지만 특히 농촌 마을에 퍼져나가는 구수한 감자빵 냄새가 여러 스태프를 홀렸다. 문소리는 촬영이 끝났는데도 김태리의 촬영을 기다려서 콩국수 한 그릇을 먹고 퇴근했다고 한다.

진 실장은 “요리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최고의 방법”이라고 말한다. “타인을 위해서는 요리를 하지만, 혼자서는 대충 때우거나 사먹곤 하잖아요. 왜 자기 자신을 위한 요리는 만들지 않는 걸까요. 저는 ‘리틀 포레스트’에서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을 배웠어요. 음식에도 그 마음을 담았습니다.”

‘실버스푼’이라는 이름의 푸드 스타일링 팀으로 함께 일하는 진희원 실장(왼쪽부터), 강지인 팀장, 엄한샘씨가 서울 연희동 작업실에서 영화 ‘리틀 포레스트’에 나온 봄꽃 파스타를 만들어 줬다. 서재훈 기자
맛을 그려내는 푸드 스타일링의 세계

진 실장은 푸드 스타일리스트가 되기 이전에 영화인이었다. 상명대 영화과를 졸업하고 영화사 기획실에서 일했다. 대학 4학년 때 궁중병과연구원에서 한식을 배운 적이 있지만 그땐 요리가 직업이 될 거라 생각하지 못했다. 3년간 일한 영화사를 나와 잠시 쉬던 중 “고추장 만드는 법이나 배워볼까” 싶어서 배화여대 전통조리과에 진학했는데, 거기서 인생이 바뀌었다. 요리의 재미와, 맛의 정직함에 반했다. 담당 교수의 소개로 박종숙 경기음식연구원장의 조교로 일하며 3년간 혹독한 수련도 받았다.

푸드 스타일링은 요리 연구와는 또 다른 영역이다. ‘입이 먼저냐, 눈이 먼저냐’ 접근법에 차이가 있고, 재료를 보는 시각도 다르다. 조리 전공자보다 미대 출신이 많은 이유이기도 하다. 진 실장의 첫 작업은 CF였다. 그는 촬영장에 ‘빛의 속도’로 적응했다. 스태프가 착용한 장비만 봐도 담당 분야를 알 수 있었고, 어떤 조명과 카메라 각도에서 음식이 맛있게 보이는지 단번에 파악했다. “더 빨리 요리를 배울 걸, 괜히 영화를 하느라 시간을 버렸다고 생각했는데, 영화 경험이 이렇게 쓰일 줄은 몰랐어요(웃음).”

토라진 친구와 화해하고 싶을 때는 달콤한 크렘브륄레를 만들자. 서재훈 기자

‘리틀 포레스트’에서도 그 경험은 귀하게 쓰였다. 미국 영화 ‘후라이드 그린 토마토’에 나온 ‘스터프드 토마토’라는 음식에서 착안해, 속을 파낸 양파에 으깬 고구마를 넣어 구운 ‘양파 구이’를 개발했다. 스크린에 맛있게 그려지는 소리를 찾아서 음향기사에게 ‘꿀팁’도 전했다.

2008년 푸드 스타일링을 시작한 이후 10년간 100편이 넘는 CF가 진 실장의 손을 거쳤다. 잡지 연재도 하고 요리책 2권도 출간했다. “재미를 못 느끼면 버티기 힘들어요. 밤샘 촬영도 많고 체력 소모가 크거든요. 김치냉장고 CF를 찍을 땐 김치 200포기를 담가요. 튼실한 배추를 구하는 것도 쉽지 않죠. 하지만 모니터가 주는 마법이 고단함을 싹 잊게 해요.”

푸드 스타일링에서도 가장 중요한 건 요리다. “칼질, 불 조절, 요리 순서 같은 기본을 모르고는 스타일링을 할 수 없다”고 단언한다. 그렇다면 진 실장이 생각하는 좋은 음식이란 뭘까. “단 1g이라도 기분을 좋게 만드는 음식이요. 건강식도 요리하면서 스트레스 받는다면 건강을 해칠 거예요. 건빵 속 별사탕 같은 작은 즐거움을 준다면 좋은 음식 아닐까요.”

김표향 기자 suza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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