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 시몬 드 보부아르가 쓴 책 중에 ‘피뤼스와 시네아스’라는 에세이집이 있다. 피뤼스는 고대 그리스의 왕이고, 시네아스는 그의 신하다. 이 책 프롤로그에는 플루타르코스가 소개한 대화가 나온다. 피뤼스가 정벌 계획을 말하며 어디를 정복하자고 하면 시네아스는 “그 다음은?”이라 묻고, 다시 어디를 침략하자고 하면 또 “그 다음은?”이라 묻는다. 그러기를 여러 번 반복한 후 “그 다음은?”이라고 묻자, 피뤼스는 한숨을 내쉬며 “그리고는 휴식할 것”이라 말한다. 결국 휴식할 거면서 왜 당장 휴식하지 않느냐고 시네아스는 묻는다. 야심찬 정벌 계획과 목표를 가진 피뤼스 왕, 그래봐야 결국 휴식 할 텐데라며 정벌을 말린 신하 시네아스, 둘 중 누가 현명한가. 이 에피소드는 우리에게 궁극적으로 인간이 사는 목적이 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등의 문제를 던지고 있다.

우리는 살면서 많은 일을 한다. 한 가지 일을 끝내면 다른 일을 계획하고 그 일이 끝나면 또 다른 일을 찾는다. 모든 일에는 시작과 끝이 있다. 삶의 종착역이 결국 죽음인 건 누구나 알지만 아등바등 힘을 다해 살아간다. 지금은 의미 없고 그 다음과 결국이 중요하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 인생의 끝은 죽음, 등산의 끝은 하산, 여행의 끝은 귀가, 직장생활의 끝은 퇴직이다. 끝을 알면서도 오늘을 살고 산을 오르고 여행을 떠나고 직장에 다닌다. 결론만 중요한 게 아니다. 영화 결말을 보기 위해 한 편 전체를 보는 건 아니다. 기승전을 거쳐야 결로 이어진다. 우리 모두는 끝이나 결과만큼 과정과 노력이 소중하다고 의미를 부여한다. 즉문즉설로 유명한 법륜 스님은 왜 사는가에 대해 이렇게 답한다. “삶은 ‘왜’라는 생각보다 먼저 존재한다. 살고 있으니 생각도 하는 건데 왜 사는지 물으면 답이 나올 수 없다.” 그러면서 “메뚜기도 살고 다람쥐도 살고 나도 살고 저 사람도 살고 모두 살고 있는데, 그럼 ‘어떻게 사는 게 좋을까’라고 생각을 바꿔보라”고 충고한다. 왜 사는지 보다 어떻게 살지 고민하는 게 더 현실적이고 유용하다. 무릇 자연에 해당하는 것은 글자 그대로 스스로 그러한 것들이다. 우주, 지구, 숲, 강, 생명 등이 그러하다. 자연은 원래부터 존재하는 것이기에 왜 존재하는가에 대한 답을 찾을 수는 없다. 인간도 자연의 일부라 할 수 있다. 반면 자연이 아닌 인공, 인간이 만든 것은 나름대로의 존재이유를 갖는다. 집은 그 안에서 살기 위한 것이고, 일자리는 돈을 벌어 인간다운 삶을 살기 위한 것이다. 헌법은 국가 골간을 정하기 위한 것이고, 규범은 사회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다. 답이 있는 것도 있고, 아무리 고민해도 답을 찾을 수 없는 것도 있다.

인생에 있어서 근본적인 질문은 ‘왜’와 ‘어떻게’다. ‘어떻게’에 대한 답은 찾을 수 있어도 ‘왜’에 대한 답을 찾는 것은 어렵다. 그런데도 인간은 부단히 ‘왜’라는 질문을 던지고 고민하고 번민한다. 답 없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인간은 철학, 인문학, 종교를 만들었다. 바로 이런 것이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인간적인 모습이다. 첨단 과학기술의 시대, 인간은 인간 두뇌를 모방한 인공지능을 발명하기에 이르렀다. 인간보다 연산 및 학습능력이 뛰어나고 알고리즘만 잘 짜면 인간보다 더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도 있다. 그런 인공지능에게 인간은 왜 사는지를 물어보면 뭐라고 답할까. 사실 그 답은 전혀 궁금하지 않다. 인공지능은 자신이 왜 존재하는가에 대해서도 고민하지 않는 존재이고, 결코 인간의 실존적 고민을 대신 할 수 없다. 인공지능이 아니기에 인간은 평생 동안 답 없는 질문, 돈 안 되는 번민을 하며 살아간다. 왜 사는지 답을 찾기 위해 사는 건 아니지만 인간은 질문하고 또 고민한다. 우리는 왜 사는 걸까.

최연구 한국과학창의재단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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