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한 당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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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과 소통한 곰 보호활동가
사냥가이드·환경운동가 아버지에
“문제는 곰 아닌 인간” 지론 대물림
캐나다 첫 ‘곰 에코투어’ 회사 차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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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차카 반도 곰과 10여년 공생
총 없이 전기철책 두른 오두막 살며
안면 익힌 어미 곰의 새끼 돌보고
굶주린 곰의 연어 사냥 돕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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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렵꾼들 위협에 굴하지 않아
美 곰 애호활동가 곰에 피살된 후
목소리 커진 사냥 옹호론자들 비판
“곰 악마화하며 사냥 정당화 안 돼”
찰리 러셀은 곰에 대한 인간의 통념에 맞서 곰과의 공생 가능성을 역설하며 스스로 북미와 캄차카 그리즐리들과 더불어 산 박물학자 겸 곰 보호활동가였다. 그는 대개의 곰은 선천적으로 난폭하지 않으며, 그들이 인간을 적대시하는 것은 인간이 먼저 그들을 악마화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인간이 갖춰야 할 타자에 대한 예의, 기품을 잃지 않는 교감의 방식을 실천해 보여주었다. charlierussellbears.com

찰리 러셀(Charlie Russell)은 캐나다 앨버타 주 남단 워터튼(Waterton) 호숫가 마을에서 나고 자랐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이름난 사냥꾼이었다. 엄밀히 말하면 사냥 가이드. 직접 사냥하는 것보다 도시의 부자 사냥꾼들을 인솔해 사냥감들과 대면하게 해주는 일이 더 쏠쏠해서였다. 그러자면 먼저 능란한 사냥꾼이어야 했다. 사냥터의 지형과 일기를 훤히 알고, 사냥감의 거처와 행로를 알고, 종의 습성과 개체의 상태를 알고, 먼저 상대의 급소와 타이밍을 노릴 줄 알아야 했다. 큰 돈을 내는 고객들이 가장 원하는 건 로키산맥의 최상위 포식자인 불곰(brown bear), 그리즐리(Grizzly)였다.

아버지가 어린 아들들을 데리고 다닌 건 그런 기술과 감을 전수하기 위해서였다. 한번 나가면 3~4주씩 말을 타고 숲을 누벼야 했고, 사냥터는 산맥 너머 브리티시콜롬비아 주와 유콘, 알래스카, 디날리(맥킨리)까지 확장되곤 했다. 4남 1녀 중 맏이와 셋째는 어른이 돼 각각 곰과 순록을 연구하는 생물학자가 됐다. 둘째는 기량과 기질이 돋보였던지, 공부 대신 아버지의 일과 목장을 물려받았다. 그가 찰리였다.

하지만 찰리는 10대 견습 사냥가이드 시절부터 곰보다 사람이 더 밉더라고 했다. 끔찍한 경험을 덜한 탓도 있겠지만, 사냥꾼의 비열하고 오만한 행태도 더러 경험했을 것이다. 성년의 그는 사냥 대신 곰 투어 가이드가 됐고, 곰 생태전문가로 명성을 얻었다. 학위가 없어 박물학자(naturalist)라 불렸지만, 그는 학자라기보다는 곰 보호활동가였다. 그에게 곰은 연구의 대상이 아니라 배움의 스승이었다.

그리고 일종의 ‘곰 커뮤니케이터(communicator)’였다. 그는 10여 년의 봄 여름을 러시아 캄차카반도 오지에 기거하며 극동의 그리즐리들과 어울려 지냈고, 다른 땐 할아버지가 대물림한, 워터튼레이크스국립공원이 내려다 보이는 앨버타 트윈뷰트(twin butte)의 산막에서 북미의 그리즐리들과 더불어 살았다. 그는 곰과 자신의 이야기로 책 4권을 썼고, PBC와 BBC 다큐멘터리 2편을 찍었다. 그의 지론은, 곰은 예측불허의 맹수이므로 인간을 두려워하도록 통제해야 한다는 통념은 틀렸으며, “문제는 곰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거였다. 곰과 야생에 대한 예의를 촉구하며, 인간과 곰의 공생 가능성을 실천해 보인 찰리 러셀이 5월 7일 별세했다. 향년 76세.(charlierussellbears.com)

찰리의 저런 생각은 아버지 앤디(Andy Russell, 1915~2005)의 생각이기도 했다. 1940년대 중반, 전후(戰後) 개발 붐을 타고 로키의 산록도 파헤쳐지기 시작했다. 연방ㆍ주정부는 산맥을 질러 앨버타와 브리티시콜롬비아 남부를 잇는 포장도로를 건설했고, 석유ㆍ산림 등 자원 개발에 열을 올렸다. 길이 좋아지면서 관광객도 늘어났다. 앤디는 자신과 동물들의 삶터가 훼손되고, 동물들이 더 멀리 쫓겨 드는 양상을 몸으로 겪었다. 글 솜씨가 좋아 지역 신문과 잡지 등에 로키의 자연과 아웃도어 라이프 칼럼을 쓰곤 하던 그는 본격적으로 “총 대신 카메라와 펜을” 들고 생태 가치의 중요성을 부각하기 시작했다. 오랜 고객 가운데 그의 뜻에 동조하는 이들이 있어, 그들의 후원으로 곰이나 산양 등에 대한 야생 다큐멘터리 영상을 찍어 발표하기도 했다. 곰을 주제로 한 다큐멘터리 ‘그리즐리의 나라 Grizzly country’와, 같은 제목의 논픽션은 미국 크노프 사에서 출간돼 큰 인기를 누렸다. 그는 벌목과 댐(Oldman River Dam) 건설 반대 등 캠페인을 조직화했고, 72년에는 피에르 트뤼도 정부의 자유당 후보로 환경 의제를 들고 총선에 출마하기도 했다. 그는 캐나다의 1세대 환경운동가였다.

아버지 앤디가 삶의 무게중심을 그렇게 옮겨가던 1941년 8월 19일 찰리가 태어났다. ‘그리즐리의 나라’ 다큐 촬영을 진행한 61~63년 세 번의 여름 동안 앤디는 장남 딕과 찰리를 ‘조수’로 부렸다. 첫해 성과는 시원치 않았다고 한다. 영상 아마추어이기도 했지만, 곰들이 그들의 존재를 감지하자마자 내빼는 바람에 꽁무니밖에 찍지 못했던 거였다. 이듬해 여름 세 부자는 총 없이 일을 나섰다. 앤디는 “총을 지니면 무의식적으로 그걸 의식해서 오만해지게 되고, 냄새로든 뭐로든 곰에게도 거부감을 주는 듯했다”고 책에 썼다. 훗날 찰리는 “곰들은 우리가 위협적인 존재인지 아닌지 감각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는 결론을 얻었다”고 말했다.(nytimes.com) 작업이 끝나고 얼마 뒤 찰리는 농장을 친구에게 넘기고, 캐나다 최초의 곰 에코투어 전문회사를 차렸다.(ctvnews.ca)

곰의 사생활과 관광객의 안전을 동시에 지키며 최대한 가까이 곰에게 다가설 수 있는 거리의 공식 같은 건 없다. 국립자연공원 측이 정한 룰은 있었다. 반드시 총을 휴대할 것, 최소 150야드(약 137m) 거리를 유지할 것 등등. 80년대 ‘곰 스프레이’가 개발되자 그는 당국과 싸우다시피 해서 총 대신 스프레이 휴대를 허가 받았다. 그것도 북미 최초였다.(moonmagazine.org) 하지만 거리 룰은 상대적인 거여서, 어른 수컷 곰에게 쫓겨 어린 곰이 사람에게 먼저 다가올 때도 있다고 한다. 그는 곰과 인간의 거리는 “곰에게 맡겨둬야 한다”고 믿었다. 하지만 그건, 혼자라면 모를까 가이드로선 무모한 태도였다. 곰의 상태와 개성에 따라 인간이 지켜야 할 예법, 그 섬세하고 아슬아슬한 프로토콜을 관광객에게 요구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찰리 러셀은 러시아 캄차카 반도에서 10년 동안 그리즐리들과 어울려 지냈고, 밀렵으로 고아가 된 어린 곰들을 입양해 키운 뒤 야생으로 되돌려 보냈다. 어린 그리즐리의 연어 먹이사냥을 돕는 찰리. charlierussellbears.com

찰리가 캄차카 반도를 알게 된 건 몬태나 주의 ‘그레이트 베어 재단(Great Bear Foundation)’에서 일하던 90년대 초였다. 캄차카는 냉전기 블라디보스토크와 함께 소련 극동 전략 군사기지. 극소수 원주민 외에는 민간인의 출입이 통제되던 타이가 원시림지대로, 소비에트 해체 직후에야 개방됐다. 북미와 유럽의 사냥꾼들이 앞다퉈 몰려들기 시작했다. 캄차카는 알래스카의 1/6 면적에 알래스카의 1/3(약 1만 마리)에 달하는 곰이 서식(2000년 기준)하는 곰의 영토였다. 91년 이래 약 10년간 1,000여 명의 미국인 사냥꾼을 안내했다는 한 가이드는 “1인당 곰 사냥 성공 확률이 알래스카가 4년에 1마리 꼴이라면 캄차카에서는 1년에 2마리를 보장한다”고 장담할 정도였다.(outsideonline.com) 재단의 곰 밀렵 조사단원으로 현장에 간 찰리는 그 곳에서 아직 인간을 모르는 곰들, 즉 사냥꾼이나 개들에게 쫓기거나 민가 근처에 갔다가 고무총탄에 맞는 경험을 하지 않은 곰들이 적지 않다는 걸 알게 됐다. 그는 과연 인간과 곰이 공포가 아닌 신뢰로 관계를 맺을 수 없는지, 정말 곰은 태생적으로 포악해서 이유 없이 인간을 해치는 존재인지 하는 오랜 의문을 풀어보기로 했다. 그의 생각은 곰에 대한 문명의 상식과 달랐다.

학위도 없는 그가 캄차카 당국을 설득해서 체류연구 허가를 얻고, 캐나다와 미국의 환경단체 및 개인의 후원금으로 경비를 마련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캄차카 주 정부의 관광 홍보 의욕과 아버지 앤디의 명성이 얼마간 도움이 됐을 것이다. 그는 96년 캄차카의 관문이자 유일한 도시 페트로파블로프스크 캄차스키(Petropavlovsk-Kamchatsky)에서 남쪽으로 220km 남짓 떨어진 그리즐리의 땅 캄발노예(Kambalnoye) 호숫가에 오두막을 짓고, 친구인 캐나다 화가 겸 사진작가 모린 앤즈(Maureen Enns, 1949~)와 단 둘이서 매년 봄~가을 4, 5개월씩 기거했다. 보호막이라면 오두막 주변에 설치한 낮은 전류의 전기 철책과 곰 스프레이가 다였다. 곰들과 숲이나 물가에서 조우하는 건 흔한 일이었고, 낯을 익힌 곰들이 일없이 그들의 오두막을 찾아와 멀찍이서 함께 산책을 하는 경우도 잦았다고 한다. 그런 캄차카의 일상을 그들은 ‘그리즐리의 마음 Grizzly Heart’(2002), ‘그리즐리의 계절 Grizzly Seasons’(2003) ‘야생에서 사는 법: 고아 그리즐리의 양육’(2003)이란 책으로 썼고, 1999년 PBS 다큐멘터리 ‘거인과 함께 걷기: 시베리아의 그리즐리들’과 2006년 BBC 다큐 ‘캄차카의 베어맨’을 찍었다.

그와 모린 앤즈의 2002년 책 'Grizzly Heart'의 표지

찰리가 인터뷰에서 전한 곰과의 사연들(The Moon) 중에는, 너무 극적이어서 소개하기 조심스러운 일화들도 많다. 앨버타에서 목장을 운영하는 시절, 겨울에 자연사한 소 사체를 동면에서 깨어난 곰들의 먹잇감으로 멀찍이 부려 놓았더니 오히려 곰들의 목장 약탈이 줄더라는 이야기도 그 중 하나다. 이웃들은 물론이고 야생보호단체들도 우려했지만, 적어도 곰들이 그의 소를 해친 적은 없었다고 했다. 새끼를 양육하는 어미 곰은 사냥 나선 수컷 못지않게 공격적인데, 안면을 익힌 어미 곰이 새끼를 자기에게 베이비시터인 양 맡긴 적도 있었다고 했다. 다섯 살 난 암컷 그리즐리와 연어 사냥을 공조했다는 이야기는,, 역시 자식 자랑하는 부모의 창의적 과장이 엿보이지만, ‘스미소니언 매거진’이 인용했다. “연어가 충분히 올라오지 않는 해에는 곰들이 죽은 연어도 먹는데, 그 놈들은 대부분 가라앉거나 깊은 물에 띄엄띄엄 떠 있다. 내가 망원경으로 물에 뜬 연어를 발견해 돌멩이를 던져주면 그리즐리가 그쪽으로 헤엄쳐 가서 잡아먹는 식이었다. 곰은 헤엄치는 동안 가끔 뒤를 돌아보며 내가 가리키는 방향을 확인하기도 했다. 그렇게 하고 또 하고…, 신뢰에 기반한, 놀라운 협력의 경험이었다.”

2003년 여름 찰리와 모린은 오두막 문지방에 곰의 내장이 못에 박혀 걸려 있는 걸 발견한다. 그리고 낯을 익힌 곰들이 모두 사라진 사실도 알게 된다. 그가 밀렵을 맹렬히 성토하며 사냥을 규제해야 한다고 주장해온 데 대한 보복이자 위협이었다. 모린 엔즈는 그 길로 귀국했고, 찰리는 혼자 남았다. 그는 자기 때문에 곰들이 ‘인간’을 몰라 밀렵에 더 취약했으리라 여겼다. 그의 밀렵 반대운동은 더 맹렬해졌고, 캄차카 독신 생활은 이후로도 몇 년 간 이어졌다.

곰이 사냥ㆍ밀렵에 가장 취약한 계절은, 동면에서 갓 깨어나 기력이 쇠한 봄이다. 곰 가죽과 발톱, 이빨 등은 인기 있는 장식품이자 장신구 재료이고 쓸개는 약재로 비싼 값에 팔린다. 캄차카 주정부는 대통령 푸틴의 캄차카 방문 직후인 2005년, 봄 사냥을 금지하고 가을 사냥도 연 500 마리로 제한했다.(outsideonline) 그 규제로 곰 밀렵 지하경제가 근절될 리는 없지만, 돈을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르는 서방의 흥분호르몬 중독자들에게는 얼마간 효과가 있었을 것이다.

곰에 대한 그의 초월적 애정과 파격적인 스킨십은, 다수에겐 서커스 같은 거였을지 모른다. 그는 나이지리아 곰베의 제인 구달이나 르완다의 다이앤 포시처럼 저명한 학자도 아니었다. 찰스는 밀렵으로 고아가 된 동물원 새끼 곰들을 여러 해에 걸쳐 10마리를 입양해 양육한 뒤 야생으로 돌려 보냈다. 앞서 그의 계획을 두고 한 러시아 생물학자(Vladimir Mosolov)는 “우리 캐나다인은 아프리카 사자와의 인연으로 유명해진 영국인들처럼 되고 싶은 것 같다”며 조롱했다. 어린 사자 ‘엘자 Elsa’를 키워 초원으로 돌려보냈다가 훗날 감격적으로 재회한 ‘Born Free’(1960)의 조지(George)와 조이 애덤슨(Joy Aemason)에 빗댄 말이었다.

2003년 10월에는, 독일 감독 베르너 헤어초크의 다큐 ‘그리즐리 맨’의 주인공으로 찰리보다 더 급진적인 곰 애호활동가 티머시 트레드웰(Timothy Treadwell, 1957~2003)이 여자친구(당시 37세)와 알래스카 카트마이(Katmai) 국립공원에서 그리즐리의 습격으로 숨졌다. 그 해 12월에는 러시아 생태활동가 겸 사진작가 비탈리 니콜렌코(Vitaly Nikolaenko, 당시 60세)의 시신이 곰에게 훼손된 상태로 크로노츠키 자연보호구역에서 발견됐다. 찰스는 궁지에 몰렸고, 곰에 대한 그의 신념은 대중적으로 치명타를 입었다. 하지만 그는 위축되지 않았다. 앞선 책 ‘그리즐리의 마음’에서 그는 자기와 달리 전기 철책도 스프레이도 마다하던 트레드웰의 방식을 넌지시 걱정한 바 있었다. 2006년 2월 발표한 글(cloudline.org)에서 그는 먼저 트레드웰의 비극을 ‘악용’하는 사냥옹호론자와 곰 배척론자들을 비판했다. “대다수 알래스카인들은 티머시가 죽기 전까진 그의 존재조차 몰랐으면서 그가 숨진 소식은 신문 1면에 대문짝만하게 썼다.(…) 티머시는 지난 20년 동안 성공적으로 활동하며 곰과 평화롭게 어울리는 사진과 영상으로 사냥꾼들을 불편하게 했다. 그 사진들은 그리즐리를 죽이는 게 용기가 아닌 무의미한 살상행위처럼 보이게 했다.(…) 만일 티머시가 사냥 도중 희생 당했다면 그들은 그를 영웅시 했을지 모른다.”

티머시의 방식도 비판했다. “당연히 어떤 곰들은 위험하다. 사냥 중인 수컷, 새끼를 보살피는 암컷, 인간에게 원한을 품은 곰들, 인간도 그렇듯이 천성적으로 포악한 곰들도 드물지만 있다.” 그는 자신이 사냥 반대론자가 아니라 ‘트로피 헌팅(trophy hunting) 반대론자이며, “아무 과학적 근거 없이” 곰을 악마화함으로써 사냥을 정당화하는 논리에 반대하는 것이라고도 썼다.(rcinet.ca) 그리고 티머시가 13년에 걸쳐 약 3만5,000시간 동안 알래스카의 그리즐리들과 탈없이 잘 지낸 사실에 먼저 주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캄차카의 어린 곰들이 노는 모습을 바라보는 찰리와 모린 앤즈(오른쪽). 다큐멘터리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대상은 곰이 아니라 그들의 몸짓과 가만가만한 말투일지 모른다. PBC다큐 'Walking with Giants'의 한 장면.

찰리는 한 차례 결혼했다가 70년대 자녀 없이 이혼한 뒤 내도록 혼자 살았다. 말년의 그는 ‘매 둥지(Hawk’s Nest)’라 이름 붙인 트윈뷰트 산막에서 동생 고든(Gorden)과 함께 지냈다. 고든은 이런 일화를 소개했다. “어느 날 산막 현관에 앉아 쉬는데 곰들이 찾아왔다. 한 녀석은 현관까지 다가와서는 우리를 건드리지 않고 가만히 머물렀다. 형은 그들을 별 말 없이(not particularly talkative) 침착하게 반겼고(welcoming and calm), 곰들은 그렇게 몇 분 머문 뒤 먹이를 찾아 떠났다.(…) 환상적인 경험이었다.” 캐나다 반프국립공원 감독관을 지낸 논픽션 작가 케빈 V. 티검(Kevin Van Tighem)은 “찰리가 곰을 배우고 그들과 교감한 방식이야말로 삶과 자연을 대하는 우리가 배워야 할 교훈일 것”이라고 말했다. 그건 자신을 지키면서 ‘타자’에 대한 예의를 잃지 않는 기품이었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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