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선언’ 책 낸 김시덕 교수 서울 변두리ㆍ광명ㆍ부천 등 답사 “사대문만 서울 대표하지 않아” 한국 사회가 정체기 접어들자 일제 강점기 등 역사 부정하고 조선시대 미화하는 한국학 비판
멕시코 수도 멕시코시티에는 '삼문화광장'이 있다. 아스텍 시대, 에스파냐 식민지 시대, 현대 건축을 한곳에서 볼 수 있는 곳이다. 김시덕 교수는 만리재 올라가는 서울역 고가 광장에 멈춰서 이곳이 바로 삼문화광장이라 했다. 서울역 주변 오랜 주택들, 새롭게 들어선 고층 아파트, 그리고 현대식 고가공원. 일제시대 잔재라고, 미군의 흔적이라고 지워버리고 조선 왕조의 흔적만 찾아 헤매는 서울에 대한 김 교수의 반론이다. 류효진 기자

김시덕(43)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교수의 책이라면 조금 더 ‘직접적’ 분노가 있을 줄 알았다. 의외로 서울 답사 얘기가 가득한 ‘서울 선언’이었다. 어릴 적 추억이 담긴 잠실 지구에서 시작해 구로, 영등포 같은 서울 변두리 지역은 물론, 서울 인접 광명, 부천 등을 돌아다니며 “이 또한 서울이다!”라 외치는 책이다.

모두 서울인데 왜 ‘이부망천(이혼하면 부천 가고 망하면 인천 간다)’ 따위의 말이 나올까. 이는 우리의 ‘서울 담론’ 때문이다. 가령 유홍준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9ㆍ10권’(창비) 서울 편을 내면서 서울을 ‘궁궐의 도시’라 규정지었다. ‘서울 선언’은 이를 반박한다. “서울 사대문 안 인구는 30만명이 채 못됩니다. 서울은 인구 1,000만 도시, 수도권까지 합치면 더 많은 인구가 사는 곳이지 않나요? 그 중 30만명 정도 사는 지역이 왜 서울을 대표해야 하나요.” 21세기 대한민국 서울에서 15세기 조선시대 한양 타령 좀 그만 하란 얘기다.

김 교수 주장을 한마디로 압축하자면 이렇다. “퇴영적인 조선시대 사랑, 이제는 끝내자.” 지금 우리가 이만큼 살게 된 건 조선시대 ‘덕분’이 아니라 ‘불구하고’다.

이 주장은 한 사건과 연결되어 있다. 지난해 김 교수는 연구원에서 ‘잘릴’ 뻔했다. 일본 문학을 전공한 일본 유학파인 그가 콧대 높은 한국학 연구기관에 갔을 때부터 위태롭다는 시각이 있었다. 자칫 ‘친일파’ 뒤집어쓰기 십상이다. 그 위태로움이 지난해 현실화됐고, 논문실적 등 여러 면에서 꼬투리 잡을 수 없었던 연구원이 결국 물러서면서 사건은 흐지부지됐다. ‘한국학계의 폐쇄성’을 드러낸 사건으로 꼽힌다.

‘서울 선언’ 서문엔 당시의 심정이 일부 들어 있다. “자신들과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저를 몰아내려 한 직장 내 일부 세력과의 싸움이 시작된 것은 2017년 3월이었습니다. (중략)서울이라는 공간을 언제든 쉽게 떠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자, 지난 몇 십 년 간 서울을 걸으며 생각하고 느껴 온 점을 더 늦기 전에 정리하자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분노를 가라앉히기 위해 무작정 서울을 걸어야겠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지난주, 김 교수와 서울역 고가를 건너 만리재로 걸었다.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에 도전하는, 김시덕의 ‘일본인 이야기’(가제ㆍ메디치)를 준비한다 들었다. 그런데 ‘서울 선언’이 먼저 나왔다.

“에도 시대 즈음부터 현재까지, 10여권 분량으로 ‘일본인 이야기’를 쓸 계획이었다. 지금쯤이면 그 책 1권이라도 나왔어야 하는데, 이 책이 먼저 나와버렸다. ‘일본인 이야기’는 올 하반기부터 낼 수 있을 것 같다.”

-책엔 의외로 분노가 크지 않다.

“지난해 연구원에서 그런 일이 벌어졌고, 일본 쪽에선 건너 오라는 제안이 있었다. 그래서 정말 한국을 다 정리하고 떠날 생각이었다. 그러니 분노보다는 그간 서울에 대해 기록한 것들을 묶어 마지막 책으로 남겨보고자 했다. 정말 다시 오지 않을 생각이었으니까.”

-연구원이 ‘김시덕’이란 사람을 데려갈 땐 애초 다른 시각, 접근법을 기대한 것 아닌가.

“맞다. 그런데 스스로 한국학의 버팀목이라 생각하는 몇몇 분들이 그걸 이해 못 했다. 여러모로 짐작되는 바는 있다. 난 기본적으로 문헌학자다. 국사나 국문학 하는 분들과 좀 다르다. 국문학자는 천재적 작가의 작품이 중요하고 국사학자에겐 자신의 이론이 중요하다면, 난 문헌 그 자체가 가장 중요하다.”

-조선시대 자료를 모아둔 규장각인데 갈등 요소가 있나.

“규장각을 정조가 세운 왕립도서관 정도로 생각하는 데, 그렇지 않다. 정조 시대 문헌은 10% 정도다. 40%는 고종시대까지 문헌이다. 지방관청 통폐합하면서 거기 남은 자료를 싹 걷어놨다. 나머지 50%는 일제시대와 현대 한국 시기에 만들어졌거나 수집된 자료다. 왕립도서관이라기보다 국가기록원이다. 난 행정학, 서지학, 아카이브하는 사람들이 들여다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국사, 국문학하는 사람들이 정조나 조선 시대 이야기만 한다. 그 간격 때문에 자료 발굴, 해석, 관리, 전시 등 기본적인 여러 설정에서 오류들이 내 눈에 보인다. 그런 걸 지적하니 불편했을 것이다.”

문학, 역사학과 ‘문헌학’의 차이를 설명할 때 김 교수가 예로 드는 건 김진명의 소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이다. 역사학자나 국문학자에게 김진명 소설은 ‘다룰 가치 없는 국뽕 소설’이다. 김 교수는 다르다. 현대 한국인의 주요 심성이 ‘국뽕’이요, 그 국뽕에 김진명 소설이 영향을 끼쳤다면, 김진명 작품은 진지한 분석 대상이어야만 한다.

김 교수의 박사논문 자체가 그랬다. 유학 시절 임진왜란을 파고들자, 교수들은 모두 의아해했다. 연구가 끝난 분야라 생각해서다. 김 교수는 문학가와 역사가들이 문학성, 사료적 가치가 없다고 무시한 대중적 소설, 그림 등을 분석해 논문을 썼다. 반신반의하던 일본 교수들도 나중엔 “자네가 금맥을 찾은 것 같다”고 탄복했다. 외국인 최초로 일본 고전문학 학술상을 받은 데 이어, 귀국해서도 임진왜란에 대한 다양한 책들을 선보이면서 학계나 출판계 모두에게 주목받았다. 규장각한국학연구원이 ‘고려대 출신 일본 유학파’인 김 교수를 데려간 것도 이 때문이었다.

-갈등이 잘 치유되지 않았다.

“연구원의 정체성에 맞지 않는다고 하더니 사회관계망서비스(SNS) 활동 하고 시민강좌 나가는 것도 문제 삼았다. 앞서 말했듯 규장각 자료는 조선 정조시대 것만이 아니다. 다양한 관점을 가진 다양한 연구자들에게 개방돼야 한다. 그런데 왜 일부 사람들이 규정한 규장각의 정체성에 다들 맞춰야 한다 생각하나. 그리고 난 기본적으로 국민 세금으로 월급받는 HK 연구교수인 이상 논문 이외 다른 활동도 열심히 해야 한다 생각한다. 그게 잘못일 수 없다고 생각한다.”

-결국 모든 걸 ‘아름다운 조선시대’로 치환하는 것에 대한 문제의식이다.

“일제시대 지우고, 미군 시기 지우고 부끄럽고 밉고 싫은 건 다 지워버리고서는 그 빈 공간에다 ‘아름다웠던 조선시대’를 채워 넣는다. 굉장히 우려되는 지점이다. 한국 사회가 정체기에 접어들면서 자꾸 그런 환상을 부추기고 기대려 한다. 한국학은 자꾸 그 근거를 공급하려 들고. 조상이 좀 못났으면 뭐 어떤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력해서 이만큼 살게 된 우리가 더 자랑스러운 것 아닌가.”

-훌륭하신 조상 타령은, 돌이켜보면 결국 족보얘기다.

“일본도 그랬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국을 통일했을 때, 평민들은 도요토미가 평민 출신이라 좋아하는 그런 정서가 있었다. 그런데 일본 귀족들은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도요토미 조상 중에 분명히 귀족이 있었을 꺼야’라면서 도요토미의 조상들을 추적한다. 그걸 21세기 한국이 하고 있는 거다.”

-어찌 보면 이제 퇴로가 없다.

“이제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교수’라는 내 직위가 내가 마음대로 어찌할 수 없는 내 것만이 아니게 됐다. 이 인터뷰에 응한 것 자체가 되돌이킬 수 없다는, 되돌아가지도 않겠다는 선언이기도 하다. 괜찮다. 지난해 그 사건을 겪으면서 한편으론 슬펐지만, 다른 한편으론 알게 모르게 이런저런 응원도 많이 받았다. 주장할 것은 주장하고 당당하게 살겠다.”

조태성 기자 amorfat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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