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러시아월드컵에 출전하는 축구대표팀 선수들이 9일 오전(현지시간) 오스트리아 레오강 슈타인베르크 스타디온에서 훈련하고 있다. 레오강=연합뉴스

최근 홍명보 대한축구협회 전무와 함께 얘기를 나누던 자리였다. 일행 중 누군가 홍 전무에게 인생 최고의 골을 물었다. 내심 2002년 한일월드컵 스페인전의 승부차기 마지막에 넣은 골이라 짐작했다. 좀처럼 웃지 않는 그가 4강행을 결정짓는 골을 넣고는 환하게 미소 지으며 팔을 휘젓던 모습이 생생하다.

홍 전무의 대답은 의외였다. 굳이 인생골을 꼽자면 1994년 미국월드컵에서 독일전 중거리 슛일 것이라고 했다. 2002월드컵 8강전의 승부차기는 지금도 떠올리고 싶지 않은 순간이라고. 엄청난 중압감에 견디기 힘들었다는 그는 만일 직전의 스페인 선수가 골을 놓치지 않았다면, 분명 자신의 슛이 벗어나고 말았을 것이라고 했다. 못 넣어도 된다 싶으니 겨우 숨통이 트여 슛을 할 수 있었다고.

2018 러시아월드컵 개막이 코앞이다. 곧 러시아로 입성할 우리 선수들의 심리적 압박 또한 만만치 않을 것이다. 지난 예선전과 평가전의 결과가 좋지 않았기에 분위기는 더욱 어둡다. 선수들의 일거수일투족에 대한 지적으로 함부로 웃거나 화를 내지도 못한다. 도대체 월드컵이 뭐고, 축구가 뭐길래.

월드컵은 지상 최대의 스포츠 쇼다. 관중 동원이나 TV중계 규모 등에서 볼 때 올림픽과 메이저리그의 월드시리즈를 합쳐놓은 것과 같다는 평가도 나온다. 적병의 잘린 머리를 발로 차던 게 그 시작이라고 하는 야만의 공놀이가 전세계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스포츠가 된 것이다.

남아공에 아파르트헤이트가 자행되던 시절, 케이프타운 앞바다 로벤 섬의 정치범 수용소에선 재소자들이 축구 할 권리를 위해 투쟁했다고 한다. 감방 안에서 옷을 말아 미니 축구를 하던 그들은 교도소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기 위해 힘을 모은다. 결국 3년간의 줄기찬 투쟁 끝에 매주 토요일 30분 동안 축구 할 권리를 쟁취했다. 야만적 폭력 앞에서도 다시 싸울 수 있는 용기를 얻는 데 축구가 그 중심에 있었다.

축구에 긍정적인 역할만 있었던 건 아니다. 집단적인 감정을 극한까지 끌어올리는 스포츠이다 보니 갈등을 폭발시키거나 극우적 활동에 동원되기도 했다.

월드컵은 출발부터 위험했다. 초대 월드컵인 1930년 우르과이와 아르헨티나는 결승을 치르며 커진 갈등으로 결국 국교를 단절하기에 이르렀다. 1970년 엘살바도르와 온두라스의 경기는 진짜 전쟁으로 이어져 양측의 전투기가 불을 뿜었고, 2,000명의 사망자를 냈다. 1994년 미국월드컵에선 자책골을 넣은 콜롬비아 수비수는 귀국 후 며칠 만에 나이트클럽에서 괴한에게 열두 발의 총탄 세례를 받고 숨져 세계를 놀라게 했다.

1990년 유고내전 당시 베오그라드 명문 구단의 서포터스는 슬로보단 밀로셰비치의 돌격부대가 되어 세르비아 정규군보다 심하게 인종청소의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2002년 우리는 축구를 통해 국민적 신명을 경험한 적이 있다. 하지만 그 2002년의 기억이 지금의 한국 축구를 위축시키고 있다. 재현 가능성이 별로 없는 그 경험치 때문에 한국 축구는 계속 주눅들어야 했다. 대표팀이 경기를 망치는 날이면 쏟아지는 불만과 야유가 저주에 가깝다. 불같이 타오른 분노로 벌써 몇 명의 감독 목이 날아갔는가.

혹시 우린 월드컵에서 희망을 기대하는 게 아니라 사소한 분노를 털어낼 희생양을 찾고 있는 것은 아닐는지. 중압감에만 시달리는 선수들이 어떻게 그라운드를 지배하고 창조적 플레이를 펼치겠는가. 축구는 축구일 뿐이다. 한국 축구에 지워진 짐을 덜어줘야 한국 축구가 살아날 것이다.

승부차기가 시작되면 키커를 제외한 선수들은 하프라인에서, 코칭스태프는 벤치에서 함께 어깨를 겯는다. 관중도 팬들도 스크럼으로 하나가 된다. 칼날 같은 승부의 순간에 선 고독한 키커에게 당신은 혼자가 아니라고, 함께 싸우겠다고 응원하는 스크럼이다. 함께 긴장하고, 함께 환호하고, 실패하더라도 함께 아쉬움을 달랠 것이라며.

한국 축구를 위해 희망의 스크럼을 짜야 할 시간이다.

이성원 스포츠부장 sungwo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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