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로시간단축 시행 앞두고 근로 형태 등 협의 사항 많은데 선출 방법 등 명확한 기준 없어 사측이 추천ㆍ결정, 근로자에 통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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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 A사에서 일하는 박정환(34ㆍ가명)씨는 최근 사내 노사협의체인 ‘열린협의회’에서 그의 부서를 포함한 일부 직군에 재량근로제 도입을 논의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이미 하루 평균 10시간을 일하는데다 프로젝트가 시작되면 주말에도 쉬지 못하는 박씨와 팀원들로선 반갑지 않은 소식이었다. 박씨와 팀원들은 협의회의 근로자위원을 만나 얘기를 나눴지만 그는 ‘회사가 하자는데 바꾸긴 어렵다’는 태도를 보였다. 박씨는 “회사가 추천한 근로자위원 후보를 찬반여부만 묻고 선임하다 보니 위원회도 협상 주체로서 임하지 않고 회사 측 결정을 통보받기만 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7월 근로시간단축 시행을 앞두고 근로자대표의 역할이 중요해지고 있지만 현행법 상 근로자대표의 선출 방법이나 법적 지위 등이 정해져 있지 않아 혼란을 빚고 있다. 노사협의회를 운영하는 기업도 근로자위원을 사측이 선임하는 경우가 잦아 근로자들을 대표해 제대로 사측과 협의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17일 노동계에 따르면 개정 근로기준법 적용으로 인한 혼란을 줄이기 위해 유연근무제 도입을 고려하고 있는 기업들은 반드시 근로자대표와의 서면합의를 거쳐야 한다. 재량근로제ㆍ선택적 근로시간제 등 유연근무제를 도입할 경우 특정 근로시간에 대한 연장근로수당이 발생하지 않아 취업규칙이 근로자에게 불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변경될 소지가 있기 때문이다. 이때 노사 협의를 통해 근로자의 이익을 보호하는 것이 근로자대표의 역할이다. 근로시간 단축으로 퇴직금이 줄어드는 경우에도 사업주는 이를 보전하기 위해 근로자대표와 대책을 수립해야 한다.

노사협의회 근로자위원 선출방식. 신동준 기자

그러나 현행법상 근로자대표의 선출 방법이나 역할이 정해져 있지 않아 현장에선 혼란이 불가피하다. 노동조합이 있는 회사라면 이를 통해 대표를 선임하면 되지만 지난해 기준 국내 노조 조직률은 10.3%에 불과하다. 특히 밤샘ㆍ집중근로 관행이 심해 근로시간 단축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게 될 IT대기업의 경우 네이버를 제외하곤 노조가 전무하다시피 하다. 물론 무노조 사업장에서도 근로자대표 선임은 가능하다. 하지만 현행법엔 선임에 참여할 근로자의 범위는 어디까지인지, ‘서면합의’의 법적 효력은 어디까지인지 등 기본적인 사항도 없어 모호한 해석에 의지하는 실정이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유연근무제 현황. 신동준 기자
노조 없는 전국 90%의 조직들 근로자 보장된 권리 축소 우려

그나마 기업 10곳 중 6곳은 ‘근로자참여 및 협력증진에 관한 법률(근로자참여법)’에 따라 노조를 대신하는 기구인 ‘노사협의회’를 운영하고 있지만 상황은 다르지 않다. 협의회가 의무적으로 운영되는데다 근로자위원 선발 기준도 분명하지 않아 민주적 절차 없이 선임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한국노동연구원이 2016년 기업 586곳을 조사한 결과 노사협의회를 운영하는 335곳 중 25.6%(96곳)는 회사의 지명ㆍ추천을 통해 근로자위원을 뽑았다. 게임회사에 근무하는 디자이너 이지연(40ㆍ가명)씨는 “지금 회사에서 5년간 근무했지만 근로자위원 선거를 하거나 누굴 뽑았다고 안내를 받은 적이 없다”며 “협의회는 회사 소식지에서나 볼 수 있는 기구”라고 덧붙였다.

김기선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은 “근로자대표제는 2004년 주 40시간제 시행 시 근로유연성 논의를 활성화하기 위해 같이 도입됐지만 행정해석상 무제한 근로가 가능했던 탓에 잘 활용되지 않았고 정부도 문제 개선을 미뤄 왔다”며 “노사 모두에 유연근로 협의가 필요해진 상황에서 근로자대표의 권한과 정당성 등 법적 기반을 정비해 근로자들의 자기결정권을 강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신혜정 기자 aret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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