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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정의 독사만필(讀史漫筆)] 한우 예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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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정의 독사만필(讀史漫筆)] 한우 예찬

입력
2018.06.06 10:24
2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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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시기 많은 일본인이 한국에 관한 기록을 남겼다. 그 대부분은 황폐한 산야, 곤궁한 생활, 나태한 습성을 조롱하는 내용이었다. 그럼에도 한국소의 강인한 체질과 이를 다루는 한국인의 탁월한 솜씨만큼은 대단히 높게 평가했다. 내가 청소년 시절 농촌에서 소에 꼴을 먹이며 체득한 인상과 다를 바 없었다.

1910년대 초 한국과 일본의 축우총수는 각각 130만 두였다. 인구총수에서 한국이 1,600만 명, 일본이 5,000만 명 정도였으니, 인구비례로 보면 한국소가 일본소보다 3배 이상 많았다. 당시 농업과 목축에서 한국이 일본보다 우월한 것은 축우뿐이었다. 지역별로 농가수와 축우수를 대비하면 함경도의 축우수가 특히 많았다.

누런 한국소는 체격이 크고 강건할 뿐만 아니라 번식능력도 뛰어났다. 거친 사료를 먹고도 잘 자랐으며, 추운 기후에도 잘 견뎠다. 모든 면에서 일본소보다 우월했다. 한국소는 성질이 아주 온순하고 영리해서 부리는 사람의 말을 잘 들었다. 한국인은 예로부터 소를 가족처럼 대하며, 사육과 개량에 정성을 쏟았다. 외양간도 보통 집안에 만들었다. 한국소가 우수한 특성을 지닌 것은 그 성과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인은 소를 3∼8세까지 경작과 운반에 활용하다가, 나이가 더 들면 시장에 내다 팔았다. 한국에서는 말을 경작에 이용하지 않았다. 말은 체격이 아주 작은데다가 체력도 빈약했다. 한국인은 좁은 경지라도 인력뿐만 아니라 우력을 빌어 농사를 지었다. 한국의 전통사회에서 경지면적을 ‘우경 몇 일분’으로 표시한 것은 농업에서 소의 활용이 얼마나 보편성과 중요성을 띄고 있었는가를 보여주는 증거다. 보통 우경에서 북한은 두 마리가, 남한은 한 마리가 끄는 쟁기를 사용했다. 한국인은 소 부리는데 어렸을 적부터 익숙했다. 몽골인이 말을 잘 다루는 것처럼.

한국에서 축우와 우경이 경이롭게 발달한 데는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다. 토지면적에 비해 인구가 희박하다. 소를 방목할 수 있는 산야가 많다. 풍토와 기후가 축우에 적합하다. 일본의 사정은 한국과 달랐다. 도쿠가와 막부 성립(1600년) 이후 일본에서는 우경과 마경이 쇠퇴한 대신 인력에 의존한 경작이 발전했다. 인력을 극단으로 활용한 생산체계를 일본경제사에서는 ‘근면혁명’이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한국경제사는 ‘축우혁명’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한국인은 소를 경작이나 식용으로만 사용한 게 아니다. 한국에서는 소를 운반수단으로도 부렸다. 운송업은 중요한 농가부업이었다. 특히 겨울에 농사를 지을 수 없는 북한에서는 소를 더 많이 이용했다. 소의 배설물은 거름으로, 가죽은 방한용품을 만드는데 사용했다. 개항(1876년) 이후 생우(生牛), 우피, 우골은 쌀이나 콩과 더불어 한국의 주요 수출품이었다. 일본과 러시아는 이를 식용뿐만 아니라 군수품 제조에도 활용했다. 1941년 한국소는 국내에 170만 두, 일본에 70만 두 존재했다. 불과 30년 안에 일본에 아주 많은 한국소가 이출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한국소는 관혼상제와 교육진작의 밑천이기도 하였다. 오죽하면 대학을 ‘상아탑’에 빗대 ‘우골탑’이라고 불렀겠는가. 그리하여 일부 지역에서는 ‘늙은 아버지가 죽어도 집안은 망하지 않지만, 농우가 죽으면 집안이 망한다’는 속담이 유행했다. 한국인에게 소의 존재는 그만큼 귀중했다.

지난 5월 중순 고향을 방문했다. 모내기가 한창이었지만, 넓은 무논에 듬직한 아버지가 소를 몰아 써레질하던 모습은 간 데 없고, 겉늙은 아저씨가 운전하는 이앙기만 툴툴거리며 돌아다녔다. 한국의 ‘축우혁명’이 50년도 안 되는 사이에 역사의 뒤안길로 조용히 사라진 것을 실감했다. 나는 논두렁을 하염없이 걸으며 가족과 함께 살았던 소의 면면을 떠올리고 노고에 감사했다.

상경 길 지하철역에서 큰 선전간판을 보았다. ‘언제나 한우를 준비하는 엄마의 마음처럼’ ‘일상의 행복 한우’라는 글귀와 함께 흰 접시 위에 커다란 아롱사태 두 덩어리가 담겨있었다. 지금 한국소는 350만 두 가량이다. 한국인이 이제 그 많은 소를 오로지 먹잇감으로만 여긴다는 것을 확인하니 기분이 씁쓸해졌다. 그리고 ‘한우 예찬’이라도 써서 한국인의 삶을 지탱해준 우공(牛公)의 넋을 기리는 게 마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재정 서울시립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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