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난 노인들의 사회] <1> 공원ㆍ복지관의 7080 만나보니

# “난 탑골공원 노인과 달라” 경계 “정부, 노인들 일하게 만들어 줘야” #“자식들 공감 안 해줘” 갑갑 “복지관 친구 있으니 지금이 낫다” # “노인 말에 귀 막은 사회” 섭섭 “사회의 정보 얻기 위해 집회 나가” # “외롭지만 남 탓 아니다” 한숨 “청년들, 눈높이 안 낮추고 남 탓만”
[저작권 한국일보] 5일 서울 종로구 탑골공원에서 노인들이 휴식를 취하고 있다. 배우한 기자

집회 현장에서 자신과 다른 의견을 지닌 이들에 대해 터트린 ‘태극기 노인’들의 분노는 오직 그들만의 감정일까. 지난달 24일에서 25일 서울 종로 탑골공원과 종로구 노인복지회관에서 70대, 80대 노인들을 만났다. 이들과 인간관계, 소통에 대한 생각, 여가와 삶의 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태극기 집회 속 노인들이 보여주는 극단적인 분노는 아니더라도 소통의 부재에서 오는 갑갑함과 외로움은 공통으로 감지됐다. 노인세대의 분노 가운데에는 자신들의 값어치를 더 이상 높이 평가하지 않는 사회와 젊은이들에 대한 응어리도 뭉쳐있었다.

“나는 일하다 잠깐 쉬느라 나와… 저들과 달라”

지난달 25일 오전 탑골공원에서 만난 김일광(75) 할아버지는 여름 정장을 갖춰 입고 있었다. 그는 ‘북파공작원 관련 단체에서 일하고 있지만 지금은 한 달 동안 일을 쉬게 돼서 공원에 나오게 됐다’고 자신의 상황을 길게 설명했다. 그는 시종일관 공원의 노인들을 가리키며 ‘나는 이들과 다르다’고 강조했다. 김 할아버지는 “(공원의 노인들은) 여기 다 죽는 날만 기다리고 있다”라며 “나는 할 수 있는 일이 늘 있다. 80세가 돼서도 일 할 거다. 내가 KTX로 간다면 저 사람들은 완행열차를 타고 가는 것”이라고 말했다.

김 할아버지는 자신이 일을 하지 않아 사회적 발언권을 잃은 무기력한 노인으로 비칠까 극도로 경계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커피차라도 서울시에서 만들어줘서 공원에 모인 노인들이 일하게 만들어줘야 한다. 돈 많이 벌려는 게 아니라 하루 5만원씩이라도 있으면 손자들 용돈 줄 수 있다. 요새 노인들 돈 없다고 자식들이 무시하는 것 아니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여가생활도 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저작권 한국일보]지난 5일 서울 종로구 탑골공원에서 노인들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배우한 기자
“때로는 외롭고 때로는 괜찮고…그래도 지금이 낫다”

12년 전 남편과 사별하고 홀로 사는 성이제(80) 할머니는 서울 종로노인복지관에서 일주일에 세 번 컴퓨터를 배우고 노래교실을 다니고 봉사활동을 한다. 연금에 기존 자산으로 자녀들에게 경제적 도움을 받지 않고 지낸다. 성 할머니는 “가족으로부터 무시당하거나 소외당한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며 “자식에게 생활비를 받아야 했다면 비관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혼자 지내는 게 외롭지 않냐는 질문에 성 할머니는 “젊을 땐 애들과 남편에게 봉사했지만 지금은 여유가 있고 친구를 사귈 수 있어 오히려 더 낫다”며 “혼자 사니 아파서 누워있을 땐 조금 서글프고 외롭지만 이렇게 복지관에 나오면 괜찮다”고 말했다.

노년이 돼서야 비로소 얻은 여유로운 삶에서 성 할머니는 “자식은 울타리지만 제일 중요한 것은 친구”라고도 했다. 성씨는 “친구들은 같은 세대니까 말이 통한다. 자식은 나이가 젊으니 공감을 안 해준다”며 “수술을 해야 하는 등 건강문제는 자식과 상담하지만 말 못 할 사연이 있다면 공감할 수 있는 친구에게만 털어놓는다”고 말했다.

“태극기집회? 삶의 질 개선할 정보 얻으러 나간다”

서울 종로노인종합복지관에서 지난달 24일 만난 신대철(83) 할아버지는 복지관 노인 힐링센터에서 일주일 세 번 요가 수업을 받는다. 식품생산회사에 다니다 은퇴하고 이후 사업도 했다 접었다는 그는 20년 전 아내와 사별하고 혼자 산다. 자녀들은 지방에서 각자 살면서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신 할아버지는 “젊은 시절 맺은 관계는 다 끝났고, 서울에 올라와 만든 새로운 친구들과 어울린다”고 말했다. 친구들과 운동을 하거나 일주일에 두어 번은 종로 허리우드 극장에 가서 요금 2,000원을 내고 영화를 본다. 그는 노인 세대가 도전해 볼 수 있는 일이나 여가활동이 부족하지 않다고 말했다.

하지만 신 할아버지는 종종 가족에게 무시당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고 말했다. 그는 “자녀들과 1년에 두차례 정도 통화를 하는데 내 생일에 아무도 연락이 없을 때 소외감을 느낀다”고 말했다. 사회가 노인들의 이야기를 충분히 귀담아듣지 않는다고도 느낀다. 신 할아버지는 “노인 생활의 질을 두고 정부가 듣는 건 전체의 30~40% 정도 밖에 안 된다”고 말했다.

신 할아버지는 정기적으로 복지관에 다니고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 외에 태극기 집회에도 참여한다. 그는 “수시로 요청이 오면 나간다”고 말했다. 태극기 집회에 참여하는 이유로 그는 “지역에서 정책적인 문제에 대한 토론이 있으면 나가본다”며 “물론 저걸 한다고 정부에게 큰 변화가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사회의 여러 정보를 알기 위해서 가는 거다. 그 정보를 듣다 보면 내 삶의 질을 개선할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초라하고 외롭지만 남 탓 아니다”

지난달 25일 오전 탑골공원에서 만난 김진양(75) 할아버지는 젊은 시절을 회상하며 “무책임하게 살았다”고 말했다. 월남전에 참전했던 김 할아버지는 고엽제 후유증으로 고생했다. 1980년에 한 결혼생활은 15일 만에 끝났다. 자식은 없다. 그는 “쓸쓸하다. 노력해서 해 놓은 것은 없다. 아들딸 기르고 늘그막에 편하게 사는 사람을 보면 부럽다”고 말했다.

가족뿐만 아니라 친구도 없다고 답한 김 할아버지는 사회로부터 무시나 소외당한다고 느낀 적이 있느냐는 질문에 “나 자신이 초라하니까”라고 답했다. 세상으로부터의 소외는 이미 김 할아버지에게 익숙한 듯 보였다. 그는 “하는 것도 없고 애도 없고, 잘 살지도 못하고. 남 탓할 것은 아니다”고 부연했다.

기초생활수급과 고엽제후유의증 환자에게 나오는 매달 30만원 등으로 생활하는 김씨는 넉넉하지 않은 살림에 대해서도 “사람은 뭐든 내 탓으로 돌려야 한다”고 밝혔다. “삶의 질은 마음먹기에 달린 것”이라는 말도 했다. 사회가 노인들의 말에 귀 기울여주는 것 같냐는 질문에는 “나이든 사람은 빨리 가야돼. 나이가 인격은 아니다. 나이 먹으면 고집과 고정관념만 생긴다”고 답했다.

문제의 원인을 사회나 구조가 아닌 ‘나’에게서 찾는 김 할아버지는 청년세대가 요즘 먹고 살기 힘들다는 이야기도, 태극기 집회에 참여하는 노인들도 박하게 평가했다. 그는 청년세대에 대해서는 “자기가 뛰면 다 되는데 고급으로 먹고 살려고 하니 안된다 하는 것”이라고, 태극기 집회에 대해서도 “질서 위반하는 놈들에 대해 뭘 말을 해”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한소범기자 beom@hankookilbo.com

박소영기자 sosyou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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