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상스토리(17)] 천적 관계를 의식, 실적 대국 그르치는 경우도…심적인 강인함 키우는 게 관건

김채영(왼쪽) 4단과 최정 9단이 지난 달 5일 서울 홍익동 한국기원 바둑TV 스튜디오에서 ‘2018 엠디엠 한국여자바둑리그’ 대국을 벌이고 있다. 이날 패한 김 4단은 지난해부터 이 대회에서 이어온 ‘25연승’ 기록도 마감했다. 바둑TV 캡처

정글에선 강자가 군림하는 ‘약육강식’이 법칙이다. 가로와 세로, 각각 19줄로 그려진 반상(盤上)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그런데 묘하게 얽힌 천적 관계는 바둑의 또 다른 볼거리를 제공한다.

여자 프로 바둑계에선 김채영(22) 4단이 이런 먹이사슬의 중심에 서 있다. 그는 우선 친동생인 김다영(20) 3단과 지금까지 벌인 7번의 대국을 모두 승리했다. 반면 라이벌인 최정 9단에겐 10전 전패로, 단 1번의 승리도 거두지 못했다. 지난해부터 올해까지 ‘2017~18 엠디엠 한국여자바둑리그’에서 이어왔던 김채영 3단의 25연승 기록에 제동을 건 선수도 최 9단이다. 김채영 3단은 “가능한 한 상대 전적을 의식하지 않으려고 하는데, 막상 대국에 들어가면 신경이 쓰이는 게 사실”이라며 “상대방에 따라 괜찮은 국면에서도 무리수를 두거나 불리한 상황이지만 쉽게 처리하는 면이 분명히 있다”고 말했다.

남자 프로기사 중에선 요즘 상승세인 신진서(18) 9단이 대표적이다. 한ㆍ중ㆍ일 3국의 2000년 이후 출생 프로바둑 기사 가운데 최초로 지난 달 9단 반열에 오른 신 9단은 이동훈(20) 9단에게 6전 전승으로 무패 행진 중이다. 신 9단은 현재 국내 프로기사 최연소 9단 기록도 이 9단에게서 가져왔다. 신 9단은 지난 달 18일 국내 최대 기전인 ‘제23기 GS칼텍스배’(우승상금 7,000만원)에서 이세돌(35) 9단을 꺾고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한국 바둑을 이끌어 갈 차세대 대표로 주목 받고 있는 신 9단이지만 중국 선수인 천야오예(29) 9단에겐 4전 전패로, 아직까지 승리의 기쁨을 누리진 못했다. 천야오예 9단은 신 9단 이외의 한국 선수들에게도 현재까지 128승 69패로, 강한 면모를 보이고 있다.

사실상 현재 세계 랭킹 1위인 박정환(25) 9단은 국내 프로바둑기사들에겐 ‘공공의 적’이다. 지난 달 24일 ‘JTBC 챌린지매치 3차 바둑TV컵’에서 파죽의 8연승으로 첫 종합기전 우승컵을 차지한 변상일(21) 9단은 박 9단에게만큼은 현재까지 5전 전패다.

전승이나 전패는 아니지만 열세인 상대전적으로, 사실상 천적 관계에 놓인 프로기사들도 적지 않다. 김지석(29) 9단은 박정환 9단에게 7승22패로, 자신의 기량을 좀처럼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변상일 9단도 신진서 9단에게 1승7패로 일방적인 수세에 몰려 있는 상태다. 이세돌 9단의 경우엔 중국 커제(21) 9단에게 5승11패로 고전 중이다.

중요한 길목에서 번번이 상대방에게 발목을 잡힌 사례도 있다. 조혜연(33) 9단은 중국 ‘철녀’ 기사로 잘 알려진 루이나이웨이(55) 9단에게 18승37패의 상대전적을 기록 중이다. 이 전적엔 지난 2005~11년 벌어졌던 ‘여류명인전’ 결승에서 만나 7년 연속 패한 성적도 포함됐다.

전문가들은 결국 심리적인 요인 극복이 천적 관계 청산에 중요한 열쇠가 될 것이라 조언하고 있다. 바둑TV 해설위원인 윤현석(44) 9단은 “바둑이 상대적인 경기이다 보니, 상대방의 대국 스타일이나 실전에 들어갔을 때의 심리적인 요인에 따라 좌우되는 경우가 많다”며 “자신만의 대국을 둘 수 있는 심적인 강인함을 키워나가는 게 중요한 것 같다”고 말했다. 허재경 기자 ricky@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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