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은의 ‘삶도’ 인터뷰] <9>마음의 다리를 놓는 의사 오은영

“10년전 암 수술이 삶의 고비
환자들에 처음 원망 생기기도”
“자녀가 10개 중 9개 틀려도
‘1개는 알았구나’ 할 수 있어야”
행복의 열쇠? “비장하지 마세요”
TV 프로그램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로 이른바 ‘국민 육아 멘토’가 된 소아청소년정신과 전문의 오은영 박사. 전남 목포에서 특강을 마치고 달려온 그를 5월 23일 저녁 서울 삼성동 ‘오은영 아카데미’에서 만났다. 오대근 기자

“하나님, 우리 아버지 건강만 되찾아주시면 열심히 공부해서 의사가 될게요. 의사가 돼서 힘들고 아프고…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살게요.”

왜 ‘마음이 가난한’이란 말이 튀어나왔는지, 알 길이 없다. 막 중학교에 들어간 소녀는 아버지가 위암 수술을 받아야 한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에 밤새 울며 신께 매달렸다. 기도를 들어주신 걸까. 올해 여든여덟인 부친은 건강하게 그의 곁에 있고, 그는 ‘국민 육아 멘토’로 불리는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가 됐다.

물론 지나고 보니, 그렇다는 것이다. 그가 의과대학에 간 건 신과의 약속을 지키려는 노력이었지만, 정신과는 인턴 시절 여러 과를 돌아본 뒤 적성을 고려한 선택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신의 계획대로 살아가고 있던 것일까. 그 기도를 다시 떠올린 건 30년 뒤 자신 역시 수술대에 올랐기 때문이었다. 담낭과 대장에서 이상 징후가 발견됐다. 최악의 경우 ‘3개월 시한부’일 수도 있는 상황. 마취 직전까지 마음은 아들 생각으로 가득 찼다. “보름달처럼 아이 얼굴이 동동 떠 다니더라고요. ‘좀 더 놀아줄 걸’ 하는 후회와 함께.” 다시 신을 찾았다. “그렇게 살지 못해 죄송해요. 염치 없이 또 부탁을 드립니다.”

정말 다행스럽게, 담낭은 악성종양이 아니었고 대장암도 초기였다. 그 뒤로도 쭉 TV와 신문에서 우리가 오은영(52) 박사를 볼 수 있는 이유다.

10년 전 인생의 고비를 넘긴 뒤, 마냥 행복했을 것만 같은데 마음에 ‘원망’이 찾아 든 건 또 다른 반전이었다. “정신과 의사가 된 이래 처음이었어요. 수술 받고 제대로 쉴 새도 없이 진료를 시작했는데, 환자들한테 그렇게 화가 나는 거예요. ‘선생님, 이거 해주세요’, ‘저건 왜 안되나요’, ‘우리 애는 왜 안 낫나요’... 하는 말들에.” 이런 생각까지 번개처럼 스쳤다. ‘내가 이래서 암에 걸렸나.’

그 마음을 허물어뜨린 건 병원에 다니던 아이의 엄마가 내민 반찬 통이었다. 깻잎무침, 장조림 같은 밑반찬에 전까지 6개 통이 가득 찼다. “원장님, 너무 바빠서 식사를 잘 못 챙기더라고요. 그러니까 아프죠. 밥 꼭 챙겨 드세요.”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자정을 넘겨서까지 진료를 하고, 자신을 부르면 전국 어디든 가서 무료 특강을 하고도 얼굴에 미소가 가득한 에너지는 신이 준 것일까, 그를 원하는 이들이 준 것일까.

“10년 전 수술 뒤로 밤 10시 이후에 환자를 보는 기운은 따로 주시는 것 같아요. 하하. 오늘도 전남 목포, 그 멀리까지 다녀왔지만, 강연장을 꽉 채운 엄마들에게 얼마나 힘을 받고 왔는지 몰라요. 마지막에 ‘엄마는 놀랍고, 위대한 사람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놀랍고 위대합니다’라고 했답니다!”

특강에다 3시간을 넘긴 인터뷰까지, 목이 쉰 줄도 모르고 말하는 그 목소리가 쇳소리가 아닌 새소리처럼 들렸다.

오은영 박사는 진료라는 본업 외에도 일간지 고정 기고에 전국을 도는 특강, 틈틈이 방송 출연까지 늘 일정이 빼곡하다. 두 번에 걸친 신과의 약속, 자신을 찾아오는 엄마들에게서 받는 기운이 에너지의 원천이라고 한다. 오대근 기자

-어렸을 때부터 사람에 관심이 많았나요?

“지금 생각해보면 초등학교 때 제 주위에 늘 애들이 모여들었어요. 여자애들이 ‘은영아, 쟤가 내 머리 잡아 당기고 도망 갔어’하고 이르면, 그 남자애한테 가서 ‘니가 덩치도 이렇게 큰데 그러면 안되지’ 중재도 하고요. (웃음) 잘 들어주고 이해심도 많았나 봐요. 사람마다 특성이 있는데 그런 걸 생각하면, (직업을) 잘 찾았죠.”

-의과대학에 진학한 것도 그럼 정신과 의사가 꿈이었기 때문인가요?

“그런 건 아니에요. 의대에 간 건 이유가 있어요. 재수 없게 들릴 수도 있지만 (웃음), 공부를 잘 했어요. 가정 형편도 아주 부유한 건 아니었지만, 평탄했고요. 그런데 중1 때 어느 날 밤, 아버지가 갑자기 6살 위 오빠와 저를 방으로 부르시더라고요. 갔더니 위암 판정을 받아서 내일 수술을 하러 병원에 가신다는 거예요. 지금이야 생존율이 높지만, 그 때만해도 암은 죽는 병이었죠. 아버지는 통장 여러 개를 내미셨어요. 매달 월급을 쪼개 넣은 적금 통장들이었죠. ‘이거면 너희 대학 등록금까지는 무리 없을 거다. 아버지 신상에 문제가 생긴다 해도 어머니와 함께 잘 살아야 한다’는 마치 유언 같은 말씀도 하셨고요.”

-정말 놀라셨겠군요.

“방으로 돌아갔는데 눈물이 쉴 새 없이 나왔어요. 그렇게 절절하게 울어본 적이 지금까지도 거의 없죠. 어린 시절 아버지가 제게 미친 영향은 엄청났거든요. 굉장히 존경했고요. 독실한 신자도 아니고 이른바 ‘나일론 신자’였지만, 기도가 절로 나왔어요. 지금 생각하면 중1 짜리가 맹랑한 기도를 했죠. ‘현세구복을 하면 안 되는데, 이거 하나만 할게요. 우리 아버지 건강만 되찾아주시면 열심히 공부해서 의사가 될게요. 그래서 힘들고 아프고 마음이 가난한 사람을 위해 최선을 다할게요’라고요.”

-아버지 수술은 잘 되었나요?

“지금 여든여덟이세요. 비교적 초기여서 항암이나 방사선 치료를 하지 않고 수술하신 걸로 건강을 되찾으셨지요. 그 일로 저도 신과 약속을 지키려고 노력했죠. 어떻게 보면 신이 주신 사명이라는 생각도 들고요.”

-어린 시절 부친에게 받은 게 많았나 봐요.

“제가 33주 만에 태어났어요. 그러니까 팔삭둥이였던 거죠. 지금이야 1,900g짜리 조산아를 살리는 건 아무 일도 아니지만, 당시는 고위험군 아기였죠. 막 태어난 저를 보니까 제 허벅지가 아버지 둘째 손가락만 하더래요. 클 때까지 한동안 편식도 굉장히 심했죠. 지금 짐작해보면, 식습관 문제가 아니라 미숙하게 태어나서 감각이 과민하고 혀에도 미뢰가 많아서 그랬던 것 같아요. 체구는 또래에 비해 작고 말랐고 잔병치레도 잦았고요. 그런데 부모님은 그걸 약점 삼아 공격한 적이 없어요. 주위에서 ‘쟤는 애가 왜 저렇게 빌빌거려 보여요. 어디 아파요?’하면 아버지는 ‘쟤가 팔삭둥이로 태어났잖아요. 그런데도 달리기를 엄청 잘해요’라고 맞받아치거나, ‘쟤가 세 살에 한글을 뗐어요. 왜 한명회도 칠삭둥이였잖아요’라고 하셨죠.”

부모의 칭찬과 인정이 자녀에게 얼마나 큰 가능성을 열어주는 지는 소아청소년정신과 전문의가 되고 나서 알았다.

-많은 전공 중에 정신과 의사가 된 이유는 무엇인가요?

“저 나름대로는 신과의 약속을 지켜야겠다는 생각으로 공부했고, 의대에 갔죠. 그런데 처음부터 ‘정신과 의사가 돼야겠다’는 생각은 없었어요. 인턴 때 여러 과를 돌아보니 정신과가 가장 적성에 맞더라고요. 다른 신체기관과 달리 뇌는 인간 고유의 존엄성, 인간다움에 큰 영향을 미치는 기관이라는 점도 끌렸고요. 정신의학은 인간에 대한 총체적인 이해를 바탕으로 하니까요.”

-공교롭게도 중1 때 했던 기도 중에 ‘마음이 힘든 사람을 위해’라는 구절이 있었는데 말이죠.

“그러게요. 그때는 진짜 그렇게 ‘마음이 힘든 사람을 위해서’라고 기도했어요(웃음). 그런데 나중에 의대에 진학하고 보니, 몸이 아픈 사람보다는 마음이 힘든 사람을 돕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게다가 우리 사회는 아직도 정신과 질환이나 정신병원을 둘러싼 편견이 강해요. 영화나 드라마 같은 매체가 그런 걸 부추기기도 하고요. 환자들은 증상에서 오는 고통뿐 아니라 이런 사회적 편견과도 싸워야 하죠. 정신과 의사로서 이건 일종의 사회적인 (인식 전환) 운동이 필요하다는 생각도 했어요.”

-TV 프로그램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로 널리 얼굴이 알려졌죠.

“2005년 시작해서 2015년까지 했죠. 500회를 눈 앞에 둔 485회로 종방 했지만, 상업 방송사에서 10년이나 육아 교양 프로그램을 편성한 건 대단한 일이에요. 힘든 만큼 보람도 있었고 그래서 굉장히 애정을 갖고 했어요. 방송으로 나가는 건 1시간 남짓이지만, 하루 종일 부모, 아이와 함께 했죠. 어떤 때는 밤까지요.”

-그 방송 덕분에 ‘훈육’의 의미를 많은 부모들이 알게 됐어요.

“제가 줄기차게 주장한 게 아이를 때리지 말라는 거였죠. 훈육은 아이를 혼내고 때려서 되는 게 아니라 옳고 그름을 가르쳐주는 마음으로 해야 하거든요. 자식은 싸워서 이길 대상이 아니라는 거죠. 그런 큰 메시지를 전달했다는 데 보람을 느껴요. 그리고 저 자신도 많이 컸지요.”

7년 전인 2011년 10월 SBS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의 방송 300회를 맞아 했던 인터뷰 때 모습. 당시 신현원(오른쪽) PD가 "오 선생님은 방송에서 보이는 것보다 훨씬 더 열정적이다"라고 공을 돌리자, 오 박사는 "스무 명 가까운 스태프가 한 가정을 변화시키려 착한 에너지를 모으기 때문에 좋은 성과를 얻은 것"이라고 화답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박사님은 부모님께 어떤 자식이었나요?

“소아청소년정신과 의사가 되고 나서 새삼 깨달은 게 있어요. 제가 손이 안가는 딸이었거든요. 그런데 다시 말하면 부모의 개입을 허용하지 않았던 딸이라는 의미이기도 해요. 자식 키우는 즐거움을 빼앗은 거랄까요. 잔소리 한마디 안 듣고도 알아서 잘 한 것, 이게 자랑거리일 거 같지만 부모 입장에서 보면, 뭔가 자식에게 개입을 하려고 하면 ‘그거 제가 다 했어요’ 하고 자식이 선을 긋는 일이기도 하죠. 중학교에 들어가서는 부모님께 ‘중학생이 됐으니 이제 제 인생은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제 것이니까요. 저는 사막에 떨어져도 살아나올 수 있어요’라고 선언까지 했어요. 어이없으면서도 한편으론 뿌듯해 하시던 아버지 표정이 지금도 기억 나요. 결혼할 때는 ‘아버지가 나를 마치 남편에게 넘겨주는 듯 하는 건 거부한다’면서 남편 손 잡고 동시에 입장했죠. 하하.”

-전문가이시니, 자녀 훈육도 남달랐을 듯 해요. 가장 염두에 둔 게 뭔가요?

“우리 아들은 참 잘 커줬어요. 심신이 정말 건강한 아이거든요. 그래도 아이를 보면 언제나 후회가 돼요. 아들이 고등학교 다닐 때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어요. ‘엄마, 사실 나는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를 안 봤어요.’ 이유를 물었더니, ‘내 옆에 있어야 되는 내 엄마가 왜 저 집에 가있지, 하는 생각이 들어서요’ 라더라고요. 제 어머니가 올해 여든여섯, 아버지가 여든여덟이신데, 제가 새벽에 나가려고 하면 인기척을 느끼고 뒤따라 나오세요. 신발 신으려고 고개를 숙이면 제 등을 쓰윽, 쓸어주시죠. 그게 부모인가 봐요. 저라고 아이 키울 때 왜 고민이 없었겠어요? 하지만 단 한가지, 이것만은 지키려고 노력했어요. 소리 지르지 않고, 화 내지 않고, 때리지 않고 키웠어요. 제가 이렇게 말하면 ‘그게 가능해요?’ 라고들 해요. 저도 정말 힘들고 때론 고통스러웠죠. 하지만, 소리 지르고 화 내고 때리는 게 아이한테 얼마나 해로운지 아니까, 또 밖에서는 늘 그러면 안 된다고 강조하면서 정작 내가 집에서 그러면 안되니까 굉장히 노력한 거죠. 아이가 마음이 편안한 사람으로 크는 게 목표였거든요.”

그러면서 그가 들려준 일화 하나가 마음에 남았다. 아들이 재수를 하겠다고 했을 때, 그리고 이듬해 재수를 하고도 만족할만한 결과가 나오지 않았을 때 그가 해줬다는 말이다.

“저는 아이에게 선행학습을 시키지 않았어요. 저는 적기(適期) 교육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거든요. ‘이 나이에는 이걸 배워야 한다’는, 기라성 같은 학자, 전문가들이 협의 끝에 만들어낸 게 적기 교육이거든요. 그런데 우리는 이걸 거스르죠. 선행을 해서 이를 앞서야만 자녀를 잘 키우는 거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제 가치관 때문에 강남에서 학교 다니는 아이한테 선행학습도 안 시켜서 점수가 잘 안 나온 건 아닌가 속으로 혼자 후회하기도 했죠. 그래도 아이한테 늘 ‘우리가 공부를 하는 이유는 실력을 늘리기 위함이다. 점수를 잘 받기 위해서가 아니다’라고 했어요. 아들이 재수하겠다고 할 때도 ‘그래, 네가 하고 싶으니 하거라. 또 1년 더 공부하면 네 실력이 1년만큼 늘 거 아니겠니. 그리고 인생에는 후회가 없어야 한다. 그러니 하거라’라고 해줬죠.”

-재수한 뒤 결과는 어땠나요?

“생각만큼 잘 나오지 않았죠. (성적을 받고 나서) 어느 날 아들이 옆에 와서 그러더라고요. ‘엄마, 제가 정말 열심히 했는데 결과가 그만큼 좋지 않아요.’ 그래서 제가 그랬죠. ‘열심히 한 것 엄마가 다 알지. 하지만, 실력과 결과가 꼭 비례하는 건 아니야.’ 그랬더니 아들이 또 그래요. ‘그래도 점수가 안 좋으니 내가 최선을 다 한 것도 소용이 없잖아요.’ 이번엔 이렇게 말해줬죠. ‘최선을 다한다는 건 결과에 따른 감정까지도 겪어 내는 것까지야. 경우에 따라선 좌절도 하고 마음도 아프겠지. 그것까지도 끝까지 겪어보렴. 얻는 게 있을 거야.’ 그 뒤로는 아이가 실망이나 실패 같은 얘기를 않더라고요.”

-굉장히 중요한 얘기네요. 그런데 보통 자녀에게 그렇게 하기가 쉽지 않죠.

“맞아요. 우리 부모들은 보통 그런 ‘자비’가 없어요. 그런데 부모가 자녀 마음을 제일 잘 알아주고 그 마음을 공격하지 않으면서 키우는 건 굉장히 중요한 일이거든요.”

-요즘은 교육의 본질보다 학습을 상위에 두는 경우가 많은 듯해요.

“이 대목에서 할 말이 참 많아요. 교육, 가르침의 궁극적인 목표가 뭘까요? 인간다움이에요. 옳은 일은 해야 하고 그른 일은 하지 말아야 하고, 다른 사람을 이해할 줄도 알아야 하고, 공감도 해야 하고, 또 질서를 지켜야 하고, 배려하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어야 하고, 불의에는 공분을 하고… 이런 게 인간다움이죠. 시험 공부는 그 중 일부일 뿐이에요. 그런데 우리는 문제풀이와 성적에 너무 많은 비중을 두죠. 교육에서 더 중요한 게 있는데! 예를 들어 자녀가 문제 열 개 중에 아홉 개를 틀리고 하나만 맞혀도 ‘이거 하나는 알았네’라고 할 수 있어야 해요. 그래야 자기 신뢰와 확신이 생겨요. 그런데 우리는 ‘아홉 개나 왜 틀렸어!’, ‘이거 어제도 알려준 거잖아!’ 하면서 아이를 잡아 먹을 듯한 눈으로 바라보죠. 생각해보세요. 모든 걸 한번에 제대로 배우는 경우도 물론 있긴 하지만 대개 실수 하고 틀리면서 배워요. 그런데 부모들은 그런 시행착오에 자비가 없죠. 아이들에게는 매 순간이 새날이에요. 매 상황마다 새날이 열리는 거죠. 그걸 알아야 해요.”

-매 순간이 새날… 그걸 어떻게 열어주느냐는 부모의 몫이겠네요.

“그런데 부모들은 자신의 마음, 감정과 자식이 혼연일체가 돼야 한다고 믿어요. ‘목숨 바쳐 널 사랑해!’라면서 자식한테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모르는 거죠. ‘이렇게 해야 해, 알았지?’ 하면 ‘네, 엄마. 알았어요’ 하지 않으면 못 견뎌요. 화도 냈다가 심지어 협박도 하죠. ‘내일부터 학원도 가지마. 학원비가 아까워!’라면서.”

-부모의 그런 인내심, 자비가 왜 그토록 중요한 건가요?

“우리는 성적으로 살지 않아요. 꼴등을 하더라도 최선을 다해보는 것, 또 틀려도 한번 더 풀어볼 용기로 평생 살아갈 태도를 배우는 거예요. 학교 다닐 때 공부 좀 했던 사람이라도 중학교 1학년 첫 학기 중간고사 수학 점수 기억할까요? 못해요. 그 때 밤늦게까지 열심히 공부했던 그 기억으로 살아가는 거예요. 학습에만 몰두된 자녀와 부모 관계는 사상누각이죠. 그걸로 모든 게 다 흔들려요. 부모가 ‘네가 어디서도 꿀리지 않게 하려고 허리띠 졸라 매고 야근하며 과외비 댔고, 평생 너를 위해 희생하며 사랑했다’고 말하지만, 정작 자녀는 뭘 원했을까요? 아이들은, 그리고 우리는 ‘내가 정말 힘들었던 그때 우리 엄마가 나를 꽉 안아줬어’ 하는 부모가 준 좋은 기억으로 삶을 버텨내요.”

오은영 박사는 부모의 공감과 인정이 자녀의 자존감과 직결된다는 걸 어린 시절 자신의 부모를 통해 이미 깨달았다. 오대근 기자

-그것이 결국 사회 생활이나 대인관계에도 영향을 미치겠군요.

“공부는 결국 배신해요. (웃음) 매일 새벽까지 수학, 과학 문제만 풀어서 과학고에 가도 행복의 열쇠는 거기 있지 않거든요. 그럼 소위 명문대 나온 사람은 다 행복해야죠. 사람은 결국 가까운 사람들과 좋은 시간을 보낼 때 행복해해요. 가까운 사람이 나를 위로해줬을 때, 그와 함께 재미있었을 때, 그런 기억으로 힘든 시간을 버텨가요. 자녀한테는 그 가장 가까운 사람이 부모예요. 부모와의 관계는 결국 개인의 행복, 사회의 행복과 연결돼있는 거죠. 자기 마음이 편안한 아이가 커서도 남과 좋은 관계를 맺으려 노력하고, 남이 힘들 때 등도 두드려줄 줄 알고, 남의 아픔에 공감할 줄 아는 법이거든요. 인간관계를 풀어가는 상식은 교과서가 아니라 부모와의 관계에 있어요.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를 볼 줄 아는 눈이 떠져야 해요.”

그는 이 대목에서 쉬지 않고 말했다. 강렬한 눈빛을 뿜어내며.

“우리는 모두 마음이 달라요. 그래도 ‘마음의 다리’를 통해서 마음을 쓱 전달할 수 있어야 해요. ‘내가 당신이 그렇게 마음을 표현한 걸 알아들었어요’ 하는 신호죠. 상대가 누구든, 어리든, 나이가 들었든, 소통을 하려면 마음의 다리가 필요해요. 그런데 자식한테도 그게 안 된다면 남한테 되겠어요?”

전남 목포에서 강연을 하고 고속도로를 달려 올라온 사람이 피로한 기색을 보이지 않는다. 그는 요즘도 진료에, 3개 일간지 고정 기고에, 간간이 방송 출연에, 특강까지 스케줄이 빼곡하다. 이런 에너지는 대체 어디서 나오는 걸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원래도 에너제틱 했지만, 10년 전에 계기가 있었어요. 2008년 추석 직전에 우연히 건강검진을 받았는데 초음파 검사 결과, 의사가 담낭에 악성 종양이 있는 것 같다는 거예요. 확진율을 물으니, 90% 이상이라면서 어서 외래 진료를 받아 보라고요. 남편이 듣더니 주저 앉으면서 벌벌 떨더라고요. 나중에는 우느라고 말도 제대로 못하고. 그런데 저는 그렇게 마음이 차분해질 수가 없더라고요. 진료를 보기 전 1박 2일 동안 삶을 아주 빠르게 정리했어요. 진료를 본 선배도 수술은 무조건 해야 하고, 악성 종양일 경우엔 6개월 밖에 살지 못 한다고 하더군요. 설상가상으로 수술 앞두고 입원해 있는 동안 대장에서도 암 세포가 발견됐다는 말을 들었어요. 최악의 경우, 살 수 있는 기간은 3개월. 다음날 수술방에 들어가려는데 그렇게 눈물이 나더라고요. 초등학교 5학년이던 아들 얼굴이 머릿속에 가득 차서 동동 떠다녔어요.”

그때 그는 다시 신을 찾았다. 30년 전 간절하게 바랐던 그 마음으로. 배를 열어 보니 신이 도왔다. 담낭은 암이 아니었고 대장암은 초기 상태였다. 그런데 진짜 위기는 그 다음에 왔다. 불과 4일을 쉬고 다시 병원에 출근했는데 이전엔 없던 감정이 불쑥 올라왔다.

“환자들한테 화가 나더라고요. 나한테 해달라는 게 왜 이렇게 많은지…. 순간 스치는 생각이 ‘이래서 내가 암에 걸렸나’ 였어요. 그런 마음으로 2, 3일을 보냈는데 당시 제 병원에 다니던 아이 엄마가 저한테 반찬 통 6개를 내밀더라고요. ‘원장님, 제가 보니까 식사를 잘 못 챙기대요. 그러니까 아프지….’ 그 말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어요. 그런가 하면 배즙을 갖다 주는 엄마, 복분자 원액, 심지어 멸치 국물 좋아한다고 들었다면서 기장 멸치까지 주는 엄마도 있었어요. 건강해야 한다면서 저를 꽉 안아주는 엄마도요. 그 며칠 새 정말 많은 사람이 저한테 용기와 힘을 준 거예요. 제 마음의 화도 눈 녹듯 사라졌고요. 그래서 또 나의 신과 약속했죠. 건강 주셨으니 다시 열심히 하겠다고.”

-많은 이들이 성인이 되어 사회생활을 할 때도 인간관계 때문에 힘들어해요. 상처 받지 않으며 살기란 쉽지 않고, 상처 받았을 때 치유하는 건 더 어렵죠. 치유의 비결이 있을까요?

“저는 이겨내라고도 하지 않아요. 그냥 겪을 수 밖에 없다고 말해요. 겪다 보면, 과연 끝이 날까 싶어도 끝나는 날이 와요. 다만 겪을 때는 힘이 좀 필요하죠. 그 힘의 원천은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아차리는 데서 와요. 한 발 물러서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차려야 해요. 만약 스스로 자신을 알아차리기가 어렵다면, 전문가를 찾는 것도 방법이고요. ‘그런 일이 없었더라면’, ‘그 사람이 나를 모함하지 않았더라면’ 하는 억울한 마음도 생기지만, 냉정하게 말해 성인이라면 결국은 자기가 해결할 수 밖에 없거든요. 원망하는 마음도 아픔도 치유도, 다 내 것, 내 몫이에요. 상처 받는 일, 그래서 힘든 것은 누가 더 겪고 덜 겪는 게 아니에요. 먼저 겪느냐, 나중에 겪느냐의 문제일 뿐이죠.”

그의 진료실에는 병원이 낯선 아이들에게 그가 '마음의 다리'를 잇기 위해 쓰는 다양한 인형들이 곳곳에 있다. 크고 맑은 눈과 쾌활한 입매에서 나오는 역동적인 표정 역시 상대를 무장해제 시키기에 부족함이 없다. 오대근 기자

-행복이란 뭘까요?

“절대적으로 주관적인 감정이죠. (미소) 저에게 행복한 삶은 마음이 편안한 삶이죠. 내 주변에 의미 있는 사람들과 ‘잘’ 까지도 필요 없이, ‘그럭저럭’ 지내는 것, 그게 행복이라고 생각해요. 사는 데 너무 비장할 필요 없어요. 가깝고 의미 있는 주위의 사람과 인생을 얘기하며 살면 돼요. 아픔, 좌절, 비참함, 분노, 애처로움, 위로, 행복, 기쁨을 함께 얘기할 수 있어야 해요. 그게 행복의 열쇠지요. 그런데! 중요하지 않은 사람은 불러 세우지 마세요. 설사 걸어가다가 누가 내 어깨를 팍 치고 가더라도 탈구된 게 아니라면 그냥 보내세요. 그렇지 않고 ‘저기요!’ 하면 악연이 생겨요. 나를 모르는 사람이라면 의도가 없어요. 그냥 ‘바쁜가 보지’ 하고 보내면 돼요. 내 인생을 흔들만한 사람이 아니에요. 그럼 강물처럼 흘려 보내세요.”

-마음 전문가인 오은영의 삶의 도는 무엇일까요?

“저는 상식적으로 살아갈 거예요. 무슨 어마어마한 기준이 아니라 상식에 근거해서요. 제 좌우명이 ‘치사하지 말자’거든요. 그렇게 살아가겠다는 거죠. 아마 5~10년 안에 (인공지능ㆍAI 기술의 발달과 그에 따른 4차 산업혁명으로) 엄청난 세상의 변혁이 일어날 텐데, 그때도 인간이 무력하지 않고 인간만의 고귀함과 무한한 능력을 갖고 사고하고 판단하고 이를 통해서 어려움에 대처하고 서로 존중하며 살아가는 데 일조하려고 해요. 그렇게 열심히 살아갈 겁니다! (웃음)”

그를 만나고 싶다는 생각을 한 건, 한국일보의 연재 ‘오은영의 화해’ 때문이다. 벼랑 끝에 선 사람들의 사연은 내 것이기도, 네 것이기도 하기에 열독층이 두텁다. 거기에 이런 대목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연고도 없는 타지에서 ○○씨가 느끼는 속상한 마음을 이해할 수 있어요. ○○씨는 깊은 바다 같은 사람이에요. 글만 읽어봐도 얼마나 생각이 깊은 사람인지 알 수 있어요. 거기에서 오는 감정도 다양하게 느낍니다. 동시에 굉장히 정돈 돼 있는 사람 같아요. ○○씨는 자신의 앞가림을 잘하고 똑똑한 사람일 거예요.’

깊은 공감이었다. 상담을 청해온 이 사람은 이걸 읽고 다시 살겠구나 싶었다.

이것은, 그러니까 다리에 관한 얘기다. 많은 이들이 잊고 사는 ‘마음의 다리’. 그가 부모에게 어떻게 받았으며, 그는 또 자신의 자녀에게, 그리고 세상 사람들에게 어떻게 다리를 놓으며 ‘그럭저럭’ 살아가고 있는가 하는, 그런 이야기다. 그래서 나도 한번 내 마음의 다리를 돌아보게 하는.

김지은 기자 luna@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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