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단체 후원 영수증 내면
재판서 형량 감경 사유로 인정돼
단기간만 거액 기부 사례 늘어
감형 참작되면 바로 후원 끊고
형량 안 줄면 “돌려달라” 항의도
전국성폭력상담소협의회가 지난해 9월 서울중앙지법 앞에서 집회를 열고 "성폭력 가해자의 후원을 감경 요인에서 배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전국성폭력상담소협의회 제공

“100만원 기부금 낸 후원자가 성범죄 피의자더군요.”

이미경 한국성폭력상담소 소장은 최근 고액 기부금을 낸 남성을 떠올리며 한숨을 쉬었다. 일시 후원으로 100만원을 낸 직후 기부금 영수증을 달라는 요구에 의심을 품고 확인해보니 성범죄로 재판 중인 피의자였다. 조금이라도 낮은 형량을 받기 위해 여성단체에 ‘꼼수’ 기부를 한 것이다. 이 돈은 즉시 반환됐다. 이 소장은 “고액 기부금 후원자가 어떤 사람인지 확인하는 일이 업무가 돼 버렸다”며 “선의로 기부하는 사람마저 의심하게 된다”고 씁쓸해했다.

형량을 낮추기 위해 여성단체에 꼼수 기부하는 성범죄 피의자가 늘고 있다. 여성단체는 이러한 기부가 모금 목적에 배척되는 것이기에 완강히 거부하고 있지만, 후원자의 정체를 파악하는 데 한계가 있어 어려움을 겪고 있다.

꼼수 기부는 여성단체 입장에선 고질로 꼽힌다. 단기간에 후원금 수백 만원을 낸 성범죄 피의자가 재판 과정에서 후원내역을 양형 자료로 제출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성범죄 가해자 인터넷카페에는 ‘양형 자료로 여성단체 기부 내역을 제출했다’고 밝힌 글이 여러 건 올라와 있다. 일부 성범죄 전담 변호사는 여성단체에 연락해 “피의자 10명을 후원자로 만들어 줄 테니 기부금 영수증을 발급해달라”고 회유하기도 한다. 심지어 “아들이 성범죄 재판을 받던 중 변호사 조언으로 입금했는데 형량이 안 줄어들었다”고 한국여성민우회에 냈던 후원금 900만원을 돌려달라 항의한 남성도 있다.

꼼수 기부를 가려내는 건 어렵다. 의심되는 액수의 기부금이 들어오더라도 누가 보냈는지 추적하는 데 한계가 있어서다. 기부금을 담당하는 선민 한국성폭력상담소 활동가는 “최근에는 여성단체 후원계좌로 수백 만원을 입금한 뒤 통장 내역을 법원에 제출한다”라며 “이 경우 후원자 연락처조차 알 수 없어 기부금을 돌려줄 수 없다”고 말했다. 기부금 영수증 제공이 의무인 점을 악용해, 기부금 돌려받기를 거부하며 영수증을 발급해주지 않으면 고발하겠다고 으름장 놓는 성범죄 피의자도 있다.

이런 꼼수 기부는 실제 재판에서 도움이 되기도 한다. 서울동부지법은 지하철 승강장에 서 있는 여성을 휴대폰 카메라로 몰래 촬영해 재판에 넘겨진 A씨에게 2015년 6월 2심에서 선고유예를 내린 바 있다. “한국성폭력상담소에 정기후원금을 납부하면서 다시는 잘못을 반복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는 점 등이 참작된 것이다. 실제로도 A씨는 재판 중이던 2014년 10월부터 매달 10만원씩 정기후원을 했다. 그런데 2심 판결을 몇 달 앞두고부터 후원을 끊었다.

여성단체는 법원이 꼼수 기부를 양형 자료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전국성폭력상담소협의회는 “일시적 후원을 성범죄 재판의 양형 감경 사유로 반영해서는 안 된다”라며 “재판부에서 면밀하고 엄격하게 검토해야 한다”고 말했다. 대법원 소속 양형위원회는 지난해 10월 “여성단체 기부 사실을 피의자에게 유리한 양형 요소로 삼을지에 대해 앞으로 신중한 검토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강진구 기자 realnin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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