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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취해 그럴 수도 있지...” 일상선 책임 안 묻는 경우 많아

입력
2018.05.31 04:40
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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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식 때 만취한 상사에 맞고

정신적 고통으로 퇴직하기도

“술 마신 탓에 잘못” 주장해도

법정에선 감형 거의 없어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대기업에 다니는 한모(30)씨는 지난해 회식자리에서 직장상사한테 심한 폭행을 당했다. 만취한 직장상사가 대화 중 갑자기 흥분해 한씨 머리채를 쥐고는 식탁에 수 차례 내리친 것. 한씨는 다음날 회사에 공식적으로 문제제기를 하려 했지만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함께 술자리에서 폭행 장면을 목격한 직장동료들이 “술 마시고 실수 한 번 한 걸 갖고 그렇게까지 하냐”고 했고, 상사가 한씨에게 사과한 뒤로는 “사과까지 했는데 없던 일로 하고 넘어가자”는 여론이 형성돼서다. 그렇게 폭행 사건은 한씨 의사와 상관 없이 묻혔고, 정신적 고통을 호소하던 한씨는 얼마 지나지 않아 직장을 그만뒀다.

음주에 관대한 대한민국에서 “술 취했는데 그럴 수도 있지”는 꽤나 효과가 큰 마법의 주문이다. 자칫 범죄로 이어질 수 있는 행동을 하더라도 술을 마셔 이성을 잃은 상태였다는 이유만으로 그 행동에 대한 책임을 상당 부분 면해줘기 때문이다.

주취자로부터의 폭행을 가장 많이 당하는 이들 중 하나가 택시 운전기사다. 서울개인택시운송조합에 따르면 최근 5년간 운전기사 폭행 사건은 해마다 3,000건이 넘어 하루 평균 8건이 발생하는데, 술을 마신 상태에서 범행을 저지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지난달 26일 34세 승객이 71세 개인택시 사업자를 폭행해 숨지게 한 사건 역시 술에 취해 저지른 범죄였다.

하지만 이들은 대부분 ‘폭행→사과→화해’ 과정을 거치면서 용서를 받는다. 서울 노원구 당고개역 인근에서 노점상을 하는 안모(62)씨는 지난해 12월 회사원 박모(46)씨로부터 ‘묻지마 폭행’을 당한 일이 있다. 만취한 박씨가 노점에 와 일면식도 없는 안씨에게 시비를 걸며 멱살을 잡고 어깨를 밀쳐 넘어뜨린 것. 안씨 신고로 경찰이 박씨를 현행범 체포했지만, 막상 경찰서를 찾은 안씨는 “술 마시고 실수한 것 아니겠냐”며 “처벌을 원치 않는다”는 의사를 밝혔다. 경찰 관계자는 “단순폭행의 경우 피해자가 원하지 않으면 처벌을 할 수가 없는데 사실 음주를 이유로 피해자가 처벌을 원치 않는 경우가 흔하다”고 전했다.

그러다 보니 만취 상태에서 범죄를 저지른 뒤, 음주를 이유로 감형을 호소하곤 한다. 지난해 울산 한 술집에서 잠들어 있는 본인을 깨웠다는 이유로 경찰관 A씨를 폭행한 B씨는 “만취로 A씨가 경찰이라는 사실과 폭행한다는 사실을 전혀 인식하지 못했다”고 심신상실에 의한 감형을 주장했다. 술에 취하지만 않았다면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을 것이고, 당연히 고의가 아니었으니 감안해 달라는 것이다.

하지만 법정에서 음주로 인한 심신미약 상태를 인정해 형을 줄여주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여아를 잔혹하게 성폭행하고 상해를 입힌 범인이 술을 마셔 심신미약 상태에 있었다는 이유로 2009년 징역 12년을 선고 받은 ‘조두순 사건’이 계기가 돼, 2011년 음주 또는 약물로 인한 심신장애 상태에서 성범죄를 저지른 경우 감형 규정을 적용하지 않도록 양형 기준이 개정됐기 때문이다.

성범죄가 아닌 경우 형법 10조2항 ‘심신 장애로 사물을 변별하거나 의사를 결정할 능력이 미약한 경우’에 음주 상태를 포함시켜 감형을 해 줄 수도 있지만, 실제 주취 감경은 아주 제한적인 경우에만 적용된다. 실제 법원도서관 판례판결정보 시스템에 공개된 전국법원 주요 판결 중 주취 감경을 인정한 사례는 최근 3개월간 찾아볼 수 없었다. 게다가 지난해 11월 청와대 국민청원에서 ‘술을 먹고 범행을 한다고 똑같은 범죄를 저질렀는데도 봐준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된다’는 글이 올라왔고, 한 달 만에 20만명 이상으로부터 동의를 얻을 정도로 음주로 인한 형벌 감경을 폐지하자는 목소리가 점차 커지고 있는 상황이기도 하다.

정한중 한국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현실적으로 법원에서 주취 감경 요구는 거의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며 “일상생활에선 음주를 빌미로 책임을 덜어내는 경우가 있을지 몰라도, 고의범행을 저질러 놓고 음주로 형을 줄일 순 없다”고 지적했다.

손영하 기자 froze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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