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프로야구 경기가 끝난 후 한 선수가 실시간 검색어 1위에 올랐다. 그는 고교 졸업하던 해 초대형 신인으로 프로구단에 지명을 받았지만, ‘학폭’ 그러니까 같은 학교 후배 선수 폭행 건이 알려져 구단 차원의 출장정지 징계를 받았던 선수였다.

지난 23일에는 문체부의 대한빙상경기연맹 감사 결과가 발표됐다. 지난 동계올림픽 당시 여자 팀 추월 경기에서 발생한 동료 선수 ‘왕따’ 의혹이 발단이 되어 시작된 감사에서, 뜻밖에도 유명 선수 중 한 명은 코치에 의해 행해진 수 차례의 폭행 피해자로, 다른 한 명은 ‘훈계’라는 명목으로 후배 선수에게 손찌검을 한 가해자로 밝혀졌다.

스포츠는 육신만이 힘을 발휘하는 활동이 아니라 정신의 힘도 함께 발휘되는 인문적 활동이다. 힘을 발휘한다고 하여 폭력과 가까울 이유가 전혀 없다는 뜻이다. 그런데 가만히 들여다보면 ‘감싸진’ 폭력이 당연하게 작동되고 있음이 목도될 때가 적지 않다. 프로야구에서 일상적으로 행해지는 ‘축하폭력’이 대표적 예다. 홈런을 친다거나 끝내기 타점을 올리면, 같은 팀 선수들이 환호하며 당사자의 헬멧 쓴 머리를 신나게 두들겨 대는, 그런 축하라는 명목으로 감싸진 폭력 얘기다.

홈런 타자를 더그아웃에서 축하해줄 때는 그나마 나은 편이다. 끝내기 승리를 거둘 때면 득달같이 뛰쳐나와 물을 쏟아 붇고 머리를 쳐대며 수훈선수를 격하게 ‘축하’해준다. 더러는 더그아웃서 축하받는(실은 맞고 있는) 선수가 발끈하는 표정이 잡힐 때도 있고, 받은 축하를 곧바로 되돌려주는(곧 반격을 가하는) 장면이 방송을 탈 때도 있다. 그런데 축하한다면서 왜 머리를 치거나 등판을 두들기고 심지어 붕 날라서 걷어차기까지 하는 것일까.

축하를 굳이 폭력을 써서 해야 하는 이유가 궁금해서 하는 말이다. 축하를 위해서라면 폭력은 용납될 수 있다고 믿었기에 그러함은 결코 아닐 터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개입되어 작동됐기에 축하폭력이 일상적으로 반복됐던 것일까. 혹 ‘그 정도’는 스킨십이지 폭력이 아니라고 여겼던 것일까. 스포츠는 소위 ‘남성성’이 강하게 드러나고 첨예하게 부딪히는 장인 만큼, 남성성을 북돋우기 위해선 ‘그런 식’의 폭력은 양해될 수 있다고 치부한 결과일까.

스포츠가 남성성이 부딪히는 장인지에 대해서도 동의되지 않거니와 남성성을 돋우기 위해 폭력 행사가 용인될 수 있다는 논리도 도무지 성립되지 못한다. 게다가 스포츠는 시합을 치르는 선수들만의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관중이 있을 필요가 없다. 관중이 많을수록, 응원이 클수록 힘이 난다는 선수들의 숱한 고백에서 명명백백하게 알 수 있듯이 스포츠의 주체는 선수와 관중 모두이다. 만약 어떤 관중이 나도 스포츠의 주체이니 수훈 선수 축하에 동참하겠다며 선수의 머리를 쳤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혹자는 이렇게도 말한다. 미국 메이저리그에서는 벤치 클리어링이 일어나면 어느 정도는 폭력이 용인된다고. 그럴 때 소극적으로 움직이면 동료 선수들과 소원해지곤 하기에 적극적으로 몸싸움도 벌이고 주먹을 휘두르기도 한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동료애 실천을 위한 폭력은 용납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때로는 상대팀이 몸에 맞는 볼을 던지면 팀 사기를 올리기 위해 보복용 위협구를 던지는 것도 필요하다고도 한다. 진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설사 그들이 그런다고 해서 우리도 그래야 하는 피치 못할 이유가 있는지는 의문이다. 남이 도둑질한다고 하여 나도 따라 해야만 하는 건 아니다. 세계에서 우리 밖에 없다는 응원 문화같이, 한국표 프로야구 문화를 만들어 보급하는 것이 오히려 멋지고 당당할 수 있다.

축하나 훈계, 지도라는 이름으로 또 동료애 발휘나 사기 진작을 명분으로 감싼다고 할지라도, 폭력은 어느 경우에서든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는 뜻이다. 폭력은 일회적이고 저강도로 행사된다고 하여 용인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그렇다. 거짓말은 더 큰 거짓말을 부르고 바늘 도둑이 소 도둑이 되는 것처럼, 폭력은 그 시작이 아무리 사소하다고 해도 반복될수록 그 정도가 심해진다. 강력사건 보도에서 “갈수록 범행이 대담해져” 같은 표현을 종종 접하게 되는 연유다. 물리적 폭력만 그러한 것도 아니다. 언어나 시선만으로 가해해도 이 또한 엄연한 폭력이기에 할수록 그 정도가 심해진다.

어떤 유형의 폭력이든 간에, 아무리 사소할지라도 또 그로 인해 선한 목적이 달성된다고 해도 절대로 용납될 수 없는 까닭이다. 그럼에도 이런 유의 폭력이 우리의 사회적 일상에 또 우리 내부에 폭넓게 스며들어, 폭력이라고 인지되지 못한 채 일상적으로 행사되고 있다. 그 결과 적잖은 사회적 ‘을’이, 사회적 약자나 소수자들이 일상적으로 피해를 입고 불편을 겪고 있다.

아니, 시민 전체가 그런 폭력에 시달린 지 이미 오래다. 국민에게 갖은 막말과 거짓말로 언어폭력을 퍼부어대도 여전한 권력과 지위를 누리는 정치인이나 언론이 재생산되고 있으니 말이다. 그 무엇으로 감싸든, 그 실질이 폭력이라면 어느 경우든 용납해선 안 되는 이유다.

김월회 서울대 중어중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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