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장 풀리나" 10년 만에 희망가

#1
전쟁으로 강원 고성군 남북 분단
南고성엔 北고성 실향민 많아
북쪽 고성 출신 부모 둔 이주기씨
“금강산 관광 때 안내 맡아 뿌듯
부모님 살던 곳 보고 먹먹했죠”
#2
고향이 지척인 엄택규 할아버지
“지금 가도 눈 감고 찾을 만큼 생생”
슈퍼 30년 운영한 김대선씨
“민통선에서 숨죽여 지낸 시절 잊고
사람들 오가는 활기 느끼고 싶어”
#3
최북단 대진항 어촌계장 진맹구씨
“북에 피랍되는 공포 속에서 살아
이젠 고향 앞바다서 고기 잡고파”
강원 고성 출신 이주기씨는 1998년 금강산 관광 시작때부터 ‘관광조장(투어리더)’ 1기로 금강산 현장에서 관광객을 안내했다. 이씨는 금강산 육로 관광의 출발지였던 고성이 활기를 되찾고 어머니가 꼭 한 번 휴전선 이북 고향을 다녀올 수 있길 기대한다고 했다. 최근 남북 관계가 개선되면서 한껏 밝아진 이씨가 지난달 25일 비무장지대(DMZ) 내 통일 전망대에 올라 구선봉과 해금강 등 금강산 자락을 배경으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고성=홍인기 기자

금강산 관광이 중단된 지 내달이면 만 10년이 된다. 2008년 7월 11일. 고 박왕자씨 피살 사건 다음날 이명박 정부는 곧바로 관광을 더 이상 진행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1998년 6월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소 떼 방북을 계기로 같은 해 11월 시작해 누적 관광객 195만6,000명을 기록하며 남북 교류의 아이콘으로 자리했던 금강산 관광은 그렇게 10년 만에 빗장을 걸었다. 교과서에서나 가늠할 수 있던 금강산 절경을 직접 보거나 금강산에서라도 북에 두고 온 고향을 느껴보기 위해 찾았던 ‘금강산 가는 길’은 막혔다. 이후 천안함 폭침(2010년 3월)과 연평도 포격(2010년 11월)이 이어지며 남북 관계 역시 대치와 대립 구도로 바뀌었다.

금강산 육로 관광의 시작점이었던 강원도 고성군은 관광 중단 이후 사실상 모든 것이 멈춰 섰다. 남북이 철저히 대립하던 90년대 중반 이전까지 고성 주민들은 군사 대치의 한복판에서 늘 전쟁의 불안을 느끼며 개발에서 배제되는 설움을 견뎌야 했다. 그러다 금강산 관광이 시작되면서 남북 교류, 협력의 중심지로 떠오르는 희망을 잠시 꿈꿨지만 갑작스러운 중단에 또다시 낙후된 변방 주민으로 되돌아간 지 어느새 10년이다.

공교롭게 금강산 관광 중단 10년을 앞두고 4ㆍ27에 이어 5ㆍ26까지 두 차례 남북 정상회담이 연거푸 열리고 이달 12일 북미 정상회담이 예정되면서 한반도 평화 정착에 대한 기대가 커지고 있다. 금강산 관광 재개 가능성이 언급되면서 고성의 운명 역시 반환점을 맞으리라 기대된다. 산-땅-바다까지 남북이 데칼코마니처럼 맞닿아 있으면서도 서로 등지고 지내야 했던 변방에서 남과 북이 손을 맞잡는 중심지로 고성이 거듭날지 기대감이 어느 때보다 커지고 있다.

금강산 관광 산증인 이주기씨 “금강산에서 다시 일하고 싶어요”

이주기(44)씨는 금강산 관광의 산증인이다. 1998년 현대그룹이 금강산에서 관광객 인솔 및 안내 역할을 맡기기 위해 처음 뽑은 1기 ‘관광조장(투어 리더)’ 90명 중 한 사람이다. 그해 11월 18일 첫 관광에 나선 금강호에 이어 이틀 뒤인 20일 봉래호를 타고 북측 장전항에 도착했을 때의 흥분은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이후 2000년까지 3년에 걸쳐 금강산에서 활동했고, 2003년 육로 관광이 시작되자 다시 현장 안내를 맡았다. 이산가족 상봉 행사 때도 참가 가족들을 인솔했다. “98년에 동기들하고 금강산 현장 대응 매뉴얼을 만들었어요. 2003년 다시 현장에 나갔더니 여전히 그게 기본으로 반영되고 있어 기분이 묘했죠. 여객선 타고 관광할 때는 배 타고 가는 날과 오는 날은 한숨 돌릴 수 있었지만 육로 관광 때는 관광객들이 정말 많아져 한 팀 안내하고 고성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점심 먹고 새 팀 모시고 금강산으로 갈 정도로 바빴어요. 몸 불편한 어르신들 업고 내려온 적도 여러 번 있고요. 힘들었지만 제가 태어난 고성이 알려지고 남과 북이 연결되는데 작은 역할을 했기에 스스로 뿌듯했습니다.” 특히 자신이 고성 출신이라는 점, 그리고 북한 어투와 비슷한 말투를 쓰는 걸 듣고 북측 관계자들이 호감을 표시해 주고 호형호제하며 지냈다. “남한에도 고성이라는 행정구역이 있다는 걸 신기해하고 표준어를 쓰려고 하면 ‘이상하다 그냥 원래 말 쓰라’ 하면서 놀리기도 했죠.”

실향민 후손인 이씨에게 금강산은 옛 근무지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1950년 당시 고성군 장전읍 성북리에 살던 할아버지 내외가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슬하의 8남매 중 장남을 뺀 자식 일곱을 데리고 남쪽으로 내려왔다. 처음엔 38선 바로 아래인 양양에 자리를 잡았고 한국군과 연합군이 전세를 뒤집어 북쪽으로 진격하자 다시 짐을 꾸려 북쪽으로 이동, 휴전선에서 가장 가까운 지금의 남고성(고성 사람들은 남한 고성을 남(南)고성, 북한의 고성을 북(北)고성이라 부른다)에 터를 잡았다. “남쪽으로 내려올 때나 북쪽으로 다시 올라갈 때나 고향에서 최대한 가까운 곳으로 가셨대요. 특히 고성에서는 금강산 큰 봉우리 하나만 넘으면 바로 장전이니까 남북이 합쳐지면 바로 갈 수 있겠구나 했던 거죠.”

1953년 정전협정이 맺어지고 곧 고향에 가리라 믿었지만 시간은 하염없이 흘러갔고 집안 어른들은 고향에 대한 그리움으로 응어리가 생기지 않을 수 없었다. 이씨를 비롯해 자식들은 남고성에서 태어났지만 북고성을 향해 애끓어 하는 집안 어른들을 지켜보면 함께 아파했다.

금강산 관광의 역사. 그래픽=송정근 기자

그렇게 45년이 지난 1998년. 사상 처음 금강산 관광이 시작되고 이씨가 관광객 안내를 맡아 금강산에서 일하게 됐다는 소식을 듣고 가족들은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부모님이나 고모들이 금강산 관광 중간에 고향 땅 볼 수 있는 곳을 가는지 물었어요. 매바위가 보이거든 바로 아래 동네가 어른들이 살았던 성북리라고 수십 번 알려주셨어요.”

사전 교육을 겸한 현장답사가 금강산에서 열렸던 같은 해 9월. 이씨는 북측 안내원의 설명을 듣던 중 온정각 휴게소에 조금 못 미쳐 매바위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 소름이 돋는 동시에 마음이 먹먹해졌다. 집안 어른들이 말한 바로 매바위였다. 그 말이 들리자마자 자동으로 눈은 능선 아래로 향했다. 마을은 형체는 있지만 사람이 살지 않는 것 같았다. 집에 돌아와 매바위와 옛 성북리를 봤다고 하자 식구들은 동요했다. “달리는 버스에서 본 것이라도 시간이 얼마나 걸려도 상관없으니 빠뜨리지 말고 자세히 설명해 달라고 했어요. 저를 통해 확인해 보고 싶은 게 너무 많았던 거죠. 가족 모두 신기하면서도 가슴이 뜨거워지는 경험이었습니다. 심지어 북고성이 고향인 다른 어른들도 저를 붙잡고 물어보셨죠.”

처음 여객선을 타고 진행된 해로 관광은 1인당 참가비가 100만원을 훨씬 넘었고 비용 부담 때문에 가기가 쉽지 않다 보니 북고성 출신 남고성 사람들은 고향을 간접 체험이라도 해보고 싶어 이씨를 더 찾았다. 그나마 육로 관광은 비용 부담이 줄고 고성에서 출발하면서 가족들도 매바위와 성북리를 다녀올 수 있었다. “어머니는 2006년 (금강산에) 다녀오셨죠. 빨리 남북 관계가 좋아져 관광이 다시 시작된다면 죽기 전에 고향 근처라도 꼭 한 번 가봤으면 좋겠다 하세요. 저 역시 그곳에서 역할을 찾고 미래를 걸어 보고 싶습니다.”

북고성이 고향인 엄택규씨 “어렸을 적 뛰놀던 과수원 보고 싶습니다”
한국전쟁 직전인 1949년 열한 살 나이로 고향인 북고성을 떠나 어머니와 함께 남고성으로 내려온 엄택규씨는 비무장지대(DMZ)에서 고개 하나만 넘으면 있는 고향 땅을 70년 넘게 가보지 못하고 있다. 엄씨가 강원 고성의 실향민사료박물관에서 자신의 피난길을 설명하고 있다. 고성=박상준기자

고향 가고 싶은 마음이야 모든 실향민이 같지만 남고성 사람 중 상당수는 고향이 지척이니 더 애틋할 수밖에 없다. 엄택규(80) 할아버지에게 금강산은 고향이다. 그는 북고성 수동면 사비리에 살다 열 한 살 때 남쪽으로 내려왔는데 사비리는 금강산에서 시작해 통일전망대 인근을 지나 동해로 흘러나가는 남강 바로 너머에 있다. 그는 금강산 방향을 가리키며 “저 통일전망대 근처 비무장지대(DMZ) 초소 바로 뒤가 내가 신나게 뛰어 놀던 그 동네야. 친구들과 서리 다녔던 정씨네 과수원, 금강산에서 사람들 이끌고 나무꾼 일을 하던 아버지가 낫을 벼린 대장간, 부모님 따라 다녔던 신계사 모습도 생생해. 지금 가도 눈 감고 찾을 만큼 머릿속으로 그려 보고 또 그려 본다니까.”

1938년 북고성에서 태어난 엄 할아버지는 1949년 가을 어느 밤 어머니와 남쪽으로 내려왔다. 매일 밤 동네 사람들이 회의하고 안 오는 사람을 감시하며 서로 ‘동무’라 부르는 등 갑자기 분위기가 달라지자 아버지가 어머니와 함께 남고성 큰아버지 댁으로 보냈다. 아버지와 원산에서 학교 다니던 누님은 내려오지 못했다. 이듬해 전쟁이 일어나자 지금의 주문진까지 피란한 뒤 국군과 연합군을 따라 북으로 방향을 바꿔 남고성으로 올라왔다.

전쟁 끝나고 제대하자마자 어머니는 고향을 다시 밟지 못한 채 돌아가셨다. 아버지도 헤어진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나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누님을 보려고 이산가족 상봉 신청을 했지만 잘되지 않았다. 한편으론 남동생이 남쪽에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누님이 불이익을 당할까 봐 더 이상 신청하지 못했다.

금방 올라갈 수 있을 것 같던 고향은 멀어져만 갔다. 고향은 여전히 저기 그대로 있지만 희망이 사라지니 ‘이러다 못 가는 거 아닌가’라는 걱정만 커졌다. 사비리에 고향을 둔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가까운 곳에 머물자며 사비촌(거진6리)이라는 마을까지 만들어 살았지만 고향 가는 길은 역시 열리지 않았다.

그나마 몇몇은 금강산 관광으로 향수를 달랬지만 30년 가까이 원양어선을 타느라 대부분 해외에 머물던 할아버지는 그러지 못했다. “그렇게 갑자기 중단될 줄 알았으면 어떡해서든 가 봤을 텐데 스스로 원망스럽기도 했어.” 수년 전 철책 공사 인부로 DMZ를 갔을 때 부대장이 음식과 술을 챙겨줘 처음으로 아버지 제사상을 차릴 수 있었다. “다행히 요새는 남북 정상회담에 북미 정상회담까지 지금까지와는 뭔가 크게 다르다는 생각이 들어. 뉴스도 열심히 챙겨봐. 뭔가 될 것 같아. 10년 기다린 보람이 있으려나.”

최북단 마을 명파리 주민 “대포 소리 없는 평범함 동네 이길”
남한 최북단 마을 명파리에서 30년 넘게 슈퍼를 운영하는 김대식씨는 금강산 관광이 재개되더라도 큰 돈을 벌 수 있다는 기대는 하지 않는다며 대신 사람들이 많이 오갔을 때처럼 마을이 활기찼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고성=박상준 기자

남북 관계가 좋아지길 바라는 마음은 최북단 마을 현내면 명파리 주민들도 마찬가지였다. 명파리는 일제 강점기 광산천과 명파천이 흘러 마을이 형성돼 논밭이 비옥하다. 일본인에 의해 광산이 개발돼 금, 은을 생산했고, 1970년 고명 광산이 들어와 한때 전국 순도 2위를 자랑하는 은을 생산해 성업을 이뤘다. 하지만 남북 대치 속에서 민통선 위에 있다 보니 일반인 출입이 제약을 받았고 민통선이 북쪽으로 이전한 1995년에서야 자유롭게 오가게 됐다. 평범한 농촌 마을이었던 명파리는 금강산 육로 관광이 한창이던 시절 반짝 특수를 누렸다.

김대선(73)씨는 명파리에서 금강산슈퍼를 30년 넘게 운영하고 있다. “식당이나 건어물 등 특산품 가게들이 장사가 잘 되니까 규모를 키우거나 직원을 새로 뽑는데도 많았어. 감자, 옥수수 캐다 도로에서 내다 파는 사람들도 많았지. 우리도 그때는 장사 잘 됐고. 그러다 갑자기 금강산 관광이 멈추는 바람에 말 그대로 폭삭 망한 데가 많아.” 지난달 24일 낮 일대 식당이나 가게는 거의 문을 닫았고, 문을 연 2곳도 손님은 없었다. 고성군에 따르면, 명파리와 인근 지역을 포함해 금강산 관광 중단 이후 고성 지역에서 휴업하거나 문을 닫은 업소만 414곳에 이른다.

김씨는 남북 관계가 좋아지더라도 장사가 갑자기 잘 될 것이라 기대하지 않는다고 했다. 어차피 벼농사 지어 사는 동네고 땅 주인들도 대부분 외지인이라 개발이 된다 해도 이익이 동네 사람들에게 돌아갈 일은 거의 없다. 게다가 2년 전 바로 옆에 4차로(7번 국도)가 생겨 관광이 재개돼도 명파리는 예전처럼 길목 역할을 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돈 벌면 좋지만 그보다 관광객들을 태운 차들이 오갈 때 느꼈던 기운이 마을에 다시 퍼졌으면 좋겠어. 수십 년 동안 민통선 안에서 숨죽여 지내야 했던 여기도 사람 사는 동네라는 거 말이야.”

수십 년 동안 출입이 통제되는 민통선 마을이었던 남한 최북단 마을 강원 고성 명파리. 이곳 노인정에서 만난 주민들은 하루에도 수십 차례 들리는 대포 소리 들리지 않는 평범한 시골 마을에서 농사 지으며 살고 싶다고 말한다. 고성=박상준기자

마을 노인회관에서 만난 이수옥(82) 할머니는 50년 넘게 명파리를 지켜왔다. 할머니는 다른 동네 사람들처럼 그저 평범한 마을에 살고 싶다고 했다. “바로 우리 마을 옆(마차진)이 군에서 대포 쏘는 곳이야. 보통 때도 시시때때로 포를 쏘고 북한이 뭘 쐈다고 하면 더 많이 쐈지. 예전에는 우리한테 알려주지 않고 대포를 쏴서 깜짝깜짝 놀라며 살았지. 그나마 요즘은 포 쏘기 전에 이장이 방송으로 알려줘. 남북 관계가 좋아지면 저 소리도 줄어들거나 안 들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

최북단 대진항 어민 진맹규씨 “북한 어민들과 함께 조업했으면”
남한 최북단 어항인 강원 고성 대진항에서 만난 진맹규 대진어촌계장이 북위 38도, 30분선에 있는 하얀 등대를 가리키고 있다. 1980년도 중반까지는 하얀 등대 연안까지만 조업이 가능했다고 한다. 진씨는 하루빨리 남북공동어로수역이 만들어져 북한 어부들과 함께 조업하는 날이 오기를 기대하고 있다. 고성=박상준 기자

명파리 동쪽 차로 10분 거리에 있는 최북단 항구 대진항에서 만난 진맹규(61) 대진어촌계장은 남북의 어부들이 바다에서 함께 조업할 꿈같은 날을 기대하고 있다. 이곳 어민들은 과거 명태잡이가 한창이던 시절 북방한계선(NLL) 인근 바다에서 조업하다 북한 경비정에 피랍되는 사건이 이어지면서 불안과 공포 속에 살아야 했다. 피랍됐다 돌아와서는 공안 당국 사람들이 모질게 취조를 했고, 간첩 혐의로 조사받고 동네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당하는 일도 많았다. 다행히 장비가 좋아졌고 해양경찰도 꾸준히 관리하기 때문에 북측 해상으로 넘어갈 가능성은 없지만 여전히 남북의 어민들은 NLL을 사이에 두고 멀찌감치 떨어져 조업하고 있다. “북고성에 고향을 둔 어민들이 많아요. 바다의 이산가족이죠. 다들 고향 앞바다에서 조업하고 싶어 해요. 이왕이면 북측에 있는 가족과 함께 말이죠. 과거 같으면 상상도 못할 일이지만 요즘은 그런 희망을 가지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바다에는 육지처럼 경계선이 없다. 바닷물은 유유히 흘러가고 물고기들은 자유롭게 헤엄쳐 다닌다. 남과 북의 구별은 의미 없다. 대진항 어민들은 지금까지 남한의 가장 끝이라 여겼던 자신들의 바다가 그저 남에서 북으로 흘러가는 바닷물이 지나가는 그저 흔한 곳이기를 바랄 뿐이다.

순풍 부는 남북 관계로 또 한번 희망 꿈꾸는 고성

이주기씨는 지금껏 고성 지역의 발전 가능성이라는 말을 꺼내기조차 쉽지 않았다고 했다. 다른 농어촌 지역도 그렇지만 남북 접경 지역인 고성의 젊은 인구 감소 폭이 심각한 수준이어서다. 2008년 금강산 관광 중단 이후 고성군의 39세 이하 인구는 해마다 줄어(2013년 제외) 지난해 기준으로 3명 중 1명에 그치고 있다.

휴전선 이북에 있는 북고성이 고향인 실향민 부모에게서 태어난 남고성 출신 2세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현재 남고성에는 북고성 출신 실향민 1세대들이 200여명 살고 있다. 이들은 남북관계가 좋아져 자신의 부모들이 하루빨리 고향을 갈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 고성=박상준 기자

이씨는 앞으로 전에 없던 희망 노래들이 많이 들려올 것 같다며 부디 고성의 미래 세대를 위해 주민의 목소리를 제대로 반영한 청사진이 그려졌으면 좋겠다고 했다.

“15년 전 금강산 육로 관광이 시작되고 조용했던 지역이 들썩거렸고 외지인들에 의해 땅값은 크게 올랐지만 관광이 중단되면서 거품 빠지듯 하며 순식간에 가라앉았어요. 고성 사람들의 허탈함과 소외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죠. 현재 남북 관계를 풀어가는 방식이 그렇듯 한꺼번에 무조건 많이 짓고 새로 만드는 것보다 고성이 감당할 수 있는 선에서 차근차근 진행되길 바랍니다. 통일은 대박이니 특수니 이런 게 아니잖아요.”

다음달이면 2008년 7월 금강산 관광이 중단된 지 만 10년이 된다. 남북 교류 협력의 상징이었던 금강산 관광이 멈추면서 강원 고성을 출발해 금강산으로 향했던 길목도 텅 비어 있다. 하지만 최근 두 차례 남북정상회담 등으로 다시 한 번 금강산으로 향하는 길이 열릴 것이라는 기대가 커지고 있다. 지난달 24일 비무장지대(DMZ) 내 통일 전망대에서 바라본 금강산 해금강의 모습. 고성=홍인기 기자

고성=박상준 기자 buttonpr@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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