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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와 화해하기

입력
2018.05.25 04:40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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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진상조사 및 제도개선위원회가 지난 8일 서울 소격동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최종 조사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류효진기자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진상조사 및 제도개선위원회가 지난 8일 서울 소격동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최종 조사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류효진기자

“사무실에 앉아 총 쏘라고 명령만 한 사람이야 무감각하겠죠. 하지만 그 명령을 받아 실제 현장에 나가 예술인을 만나 총을 쏜 뒤 시체를 확인해서 보고해야 했던 일선 직원들의 심정은 어떻겠습니까. 거짓말하고, 읍소하고, 서류도 조작해야 했던 일선 직원들 말입니다. 그 직원들은 지금도 그 때 기억 때문에 수치스럽고 고통스럽다는데, 사무실에 앉아 총 쏘라 명령했던 사람이 영전해서 오면은요.”

한 문화계 인사는 분통을 터트렸다.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진상조사 및 제도개선위원회(진상조사위)의 활동 내용을 잘 아는 사람이다. 다름 아닌 전 국립극단 사무국장 윤미경씨를 예술경영지원센터장으로 임명했다 철회한 문화체육관광부의 처사에 대한 것이었다.

그럴 법도 했다. 진상조사위 명의의 종합조사결과가 발표된 것이 지난 8일이었다. 그 발표문에 블랙리스트 시행 사례가 명시되어 있는 인물이 바로 윤씨였다. 1, 2년 뒤도 아니고 바로 이틀 뒤인 10일 예술경영지원센터장으로 임명됐다는 발표가 나왔다. 진상조사위는 문체부 관료들도 참여하는 민관합동 기구다. 문체부가 진상조사위 발표 내용을 모를 수 없는 구조다.

좀 너무 하다 싶은 건 그 다음 얘기다. 이 문화계 인사에 따르면 센터장 인사 진행 과정에서 “블랙리스트 연루 의혹 때문에 진상조사위에서 조사받은 사실이 있으며 아직 그 발표가 안 나왔는데 괜찮겠느냐”고, 오히려 윤씨가 문체부에다 물었다 한다. ‘나 해도 괜찮겠느냐’ ‘나 임명해도 문체부가 괜찮겠느냐’는 뜻이다. 그것도 두 번이나 물었다고 한다.

이 정도면 문체부가 진상조사위에다 대고 ‘조사를 받았다는데 어느 정도인 거냐’라고 물어본다든가, ‘사정은 알겠는데 그래도 이만한 사람 흔치 않으니 기회를 주자’라는 논리로 진상조사위를 설득하고 양해를 구했어야 한다. 그런 과정은 없었다. 센터장 임명 소식이 나온 뒤 진상조사위가 윤씨 개인에 대한 호불호를 떠나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인사라고 반발하고, 문체부가 하루 만에 결국 인사를 거두어 들인 건 이런 속사정 때문이다.

문체부의 고충도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박근혜 정부의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는 ‘전방위적’이었다. 전방위적이란 말은, 조직의 공식 계선 라인을 따라 블랙리스트 실행이 부과됐고, 응하지 않거나 고분고분하지 않은 이들은 인사 조치됐다는 의미다. 그 시절 어느 정도 권한과 책임 있는 자리에 있던 사람이라면, 그 자리에 있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블랙리스트 실행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이런 상황에서 누구에게 무엇을 얼마나 책임 지울 것이냐라는 문제는 고통스럽다. 블랙리스트 뒤처리 문제가 해방 뒤 친일파 처리 문제와 비슷하다는, 마냥 웃을 수만은 없는 우스개(?)가 돌아다니는 이유이기도 하다.

명 지휘자 레너드 번스타인은 고통스러웠던 기억 중 하나로 빈 필과의 협연을 꼽았다. 번스타인과 빈 필의 협연은 명반을 많이 남긴 훌륭한 조합으로 꼽힌다. 그런데 대체 왜? 사실 독일에 가려서 그렇지 오스트리아도 독일 못지 않게 나치를 지지했다. 베를린 필보다 빈 필에 나치 부역자가 더 많았다는 연구도 있다. 유대인이라 독일 악단과 연주를 거부했던 번스타인을 슬프게 한 건, 그 빈 필이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의 지휘봉을 따라 너무나 완벽하고 유려한 선율을 뽑아냈기 때문이다. 번스타인은 그게 더 슬펐다 했다.

진상조사위 결과 발표 뒤 도종환 문체부 장관을 시작으로 문화예술위원회 등 각 기관들의 사과 릴레이가 이어지고 있다. 진상조사, 사과, 백서 발간, 그리고 블랙리스트 사건 종결. 이 유려한 흐름이 때론 피해자들에게 더 고통스러울 수 있다는 걸 문체부가 좀 더 생각해봤으면 좋겠다. 블랙리스트 사건의 최종 도착지는 화해여야 하고, 그렇다면 진상조사와 백서 발간은 끝이 아니라 시작일 테니까.

조태성 문화부 기자 amorfat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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