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용과 윤동주가 유학한 도시샤는 어떤 학교인가? 건학의 동기와 이념을 개관해보자. 도시샤대학의 창립자 니지마 죠(新島襄, 1843~90)는 에도에서 하급무사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국가의 개혁자, 근대화의 선구자가 되겠다는 뜻을 품고, 1864년 홋카이도 하코다테에서 국법을 어기고 출국해 이듬해 미국 보스턴에 도착했다. 그는 필립스 아카데미 재학 중 세례를 받고 뉴잉글랜드 퓨리턴의 일원이 되었다. 그는 아카데미 졸업 후 아머스트 칼리지에서 배우고, 그리스도교 선교사가 되어 귀국할 생각으로 앤드버 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니지마는 근대국가를 건설한 인간에 강한 관심을 가졌다. 특히 미국의 중고등교육기관이 그리스도교 인격주의교육과 전인교육을 통해 지덕체를 고루 갖춘 인간, 곧 나무도 보고 숲도 볼 수 있는 입체사고의 인간을 기르고, 그렇게 육성된 사람들이 지방과 국가의 지도자로서 정치, 경제, 문화, 교육을 이끌어가는 데 주목했다. 그는 앤드버 신학교 재학 중 이와쿠라(岩倉) 사절단의 일원으로 1년여 미국과 유럽 8개국의 교육제도를 조사하고 시찰했다. 10년여 구미 생활에서 그는, 근대국가를 창출하고 지탱하는 것은 그리스도교 신앙을 바탕으로 민주주의를 체득한 독립자존(獨立自尊)의 인간이기 때문에, 그런 인간을 교육할 수 있다면 일본도 근대화시킬 수 있다고 확신했다.

니지마는 1874년 선교사로 귀국하여 복음을 전파하는 한편, 근대화 지도자를 양성하고자 1875년 11월 교토에 도시샤영학교(同志社英學校, 도시샤대학의 전신)를 설립했다. ‘도시샤’는 뜻을 같이 하는 개인이 만드는 결사라는 의미였다. 그는 그리스도교 인격주의 교육을 통해 전도자를 양성하고, 근대과학과 민주주의를 체득한 인간을 육성하는데 힘을 쏟았다. 그는 학생들에게 세상을 위해 사는 것이 중요하고, 사회사업은 신의 위탁이라고 설파했다. 이에 감화되어 도시샤에서는 많은 사회사업가가 배출되었다.

니지마는 일본을 그리스도교로 교화하고 도시샤대학을 설립하는 일을 필생 목표로 삼았다. 1882년부터 대학설립운동을 시작한 그는 모교 아머스트 대학을 모델로 삼으면서도, 신학, 철학, 문학, 법학, 이학, 의학 등의 전문 학부를 가진 구미 전통의 종합대학교를 지향했다. 그는 학생이 독자일기(獨自一己)의 기성(氣性)을 발휘하고 자치자립(自治自立)의 인민으로 성장하는 데는 국립 도쿄대학보다는 사립 도시샤대학이 더 낫다고 말하며, 정재계 요인뿐만 아니라 일반 민중을 상대로 널리 협력을 구하고, 미국에서도 모금활동을 벌였다. 그는 오랜 과로 끝에 대학설립을 눈앞에 두고 1890년 1월 급서했다.

그런데 니지마의 부인 야에(新島八重, 1845~1932)도 대단한 여장부였다. 아이즈번사(會津藩士)의 딸로 태어난 그녀는 쌀가마를 가볍게 들어 올릴 정도로 완력이 셌다. 23세 때는 단발과 남장을 하고 총과 칼로 무장하여 메이지정부군과 싸웠다. 그녀는 이 전쟁에서 아버지와 형제를 잃은 후 남편과 이혼했음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살아갔다. 메이지유신 이후 아이즈인은 역적의 낙인이 찍혀 심한 차별과 멸시를 받았다.

야에는 26세 때 교토로 이사하여 니지마 죠를 만나 그리스도교인이 되고, 그와 재혼하여 그리스도교 대학 설립을 방해하는 불교 또는 국수 세력과 싸웠다. 인습에 빠진 사람들은 남자 뺨칠 정도로 활달한 야에를 악처라고 비난했지만, 오랜 구미 생활로 ‘레이디 퍼스트’가 몸에 밴 죠와는 잘 어울렸다. 그녀는 1876년 미국 선교사와 함께 도시샤여학교(도시샤여자대학의 전신)를 개설했다. 남편이 죽은 후 일본적십자 독지(篤志) 간호부가 되어 청일, 러일 전쟁의 부상병을 돌보았다. 그녀는 아이즈와 그리스도교 정신을 겸비하고 신념대로 살았다.

근대 일본은 천황제 절대주의 국가체제 아래 군국주의로 치닫고 신민교육(臣民敎育)을 강화하는 한편 그리스도교를 배척했다. 도시샤는 시대의 광풍 속에서 일본이 패전할 때까지 고난의 길을 걸었다. 정지용과 윤동주는 그 한가운데서 이 대학을 다닌 셈이다.

일본 공영방송 NHK는 2013년 ‘야에의 벚꽃(八重の櫻)’이라는 대하드라마를 방영했다. 동일본대진재로 고통을 겪는 아이즈 지역을 격려하자는 뜻에서 야에의 일생을 재조명했지만, 나에게는 일본판 역사화해의 몸짓으로 보였다.

정재정 서울시립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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