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이 알고 싶다] 당산동 ‘R하우스’ 전세 사기 사건

고시원 생활은 지옥 같았다. 술 취한 이웃 방 남자가 문을 두드리면 경찰이 올 때까지 숨죽이고 있어야 했다. 아무도 살지 않는 방처럼 보여야 했다. 그래도 서울에 올라올 때 품은 꿈을 떠올리며 석 달을 악착같이 버텼다. ‘쿵’ 천장에 불안하게 매달린 환풍기가 침대 위로 떨어졌을 때, 인내는 끝이 났다.

제주에서 혈혈단신으로 상경한 취업준비생 A씨. 홍인택 기자
“육지 것들 조심해야 한다”

취업준비생 A(23)씨가 당산동 ‘R하우스’에 입주한 계기다. 그는 항공정비사가 되기 위해 다니던 대학도 그만두고 2016년에 혈혈단신으로 제주에서 서울까지 올라왔다.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상경하니 거처를 마련하는 게 제일 큰 문제였다. 제주에서 1년 반 동안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모은 돈이 있었지만, 학비와 생활비도 고려해야 했다. 그렇게 월 20만원대 고시원을 구하게 됐지만 열악한 시설과 공포감에 공부가 손에 잡히지 않았다. A씨는 환풍기가 떨어진 그 날 새벽 울면서 부모님에게 전화를 걸었다. 도와주겠다는 부모님 말씀에 고시원 생활을 청산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안심하고 머물 수 있는 방을 찾기는 쉽지 않았다. 아무래도 불안한 1층이나 2층, 반지하 방만 보고 허탕을 치는 날이 많았다. “금방 나갈 것 같은 7층 방이 있다”는 부동산의 연락을 받았을 때 A씨가 반색한 이유다. 1층엔 관리소와 비밀번호로 출입하는 현관이 있고 폐쇄회로(CC)TV가 있었다. 학교까지 걸어서 15분. 위치도 적당했다. 등기부 등본에 등장하는 ‘신탁회사’, ‘소유권 이전’ 같은 말이 불안했지만, 중개사는 “100% 안전하다”며 안심시켰다. 신탁회사에서 나왔다는 공문까지 보여주면서 건물이 넘어가도 전세보증금을 돌려받을 수 있다는 설명. 달변가도 그런 달변가가 없었다.

고시원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A씨에게 ‘R하우스’는 안전한 공간으로 보였다. 홍인택 기자

그렇게 ‘R하우스’에 입주하고 2년 동안은 만족스러웠다. 월세 부담이 줄어서 아르바이트를 무리해서 늘릴 필요도 없었고 자연히 공부에 집중할 수 있게 됐다. 술에 취해서 문을 두드리는 이웃도 없었다. 이런 환경이 도움이 됐는지, 제법 괜찮은 성적으로 학교생활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부모님이 대출까지 받아가며 마련한 전세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건 2년 뒤였다. 엘리베이터에 공매 절차를 개시한다는 안내문이 붙으면서 건물 전체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항공정비사 자격시험과 취직을 앞두고 있던 그에게는 믿기 힘든 소식이었다. 대출까지 받아가며 방을 마련해준 부모님을 볼 낯이 없었다. 시험 서적을 들여다보다가 갑자기 눈물이 쏟아지는 날이 많았다. “육지 것들 조심해야 해” 할머니 목소리가 떠올랐다.

누구도 사과하지 않았다

이모(24)씨는 1년간의 준비 끝에 작년 말 취업에 성공한 사회초년생이다. 합격 발표는 기뻤지만, 첫 출근까지 주어진 시간은 일주일에 불과했고 급하게 회사 근처에 방을 구해야 했다. 부동산 중개 앱을 통해서 ‘R하우스’를 발견했다. 5평도 되지 않는 방은 한눈에 봐도 좁았지만 많은 방을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폐쇄회로(CC)TV나 1층 관리실 등 ‘안전성’도 나쁘지 않았다. 부모님의 경기도 아파트를 담보로 전세보증금을 마련했다. 부모님 도움을 받는 것은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다.

[저작권 한국일보] 합격 통보를 받고 일주일 만에 방을 구해야 했던 직장인 이씨. 처음엔 방이 비좁아서 당황스러웠지만 여기서 돈을 착실히 모아 더 넓은 곳으로 옮겨갈 생각이었다. 홍인택 기자

“너무 황당해서 꿈만 같았어요. 다음날 눈 뜨면 없는 일이 될 것 같았어요.” 이씨가 처음 소식을 들었을 때의 기분을 설명했다. 문을 두드리며 ‘대책회의를 위해 잠깐 나와 보시라’는 남성 입주민의 목소리를 들었을 때는 무서워서 나가지 말까 고민도 했다. ‘공매’ 등 단어는 처음 들어봤고 누가 내게 사기를 쳤다는 건지도 잘 이해되지 않았다. 직장에선 피해 사실을 털어놓지 못한 채 혼자 냉가슴만 앓을 뿐. 도움이나 조언을 구할 곳도 마땅치 않았다.

A씨나 이씨처럼 전세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할 수 있는 처지에 있는 ‘R하우스’ 입주자는 143명, 전세보증금 총액은 100억원이 넘는다. 발단은 현재 다른 범죄 혐의로 교도소에 있는 건물주 이모(58)씨가 새마을금고에서 받은 54억원가량의 부실대출. 이씨는 전세보증금을 대폭 ‘다운’시킨 계약서를 제출해서 새마을금고를 속였고, 새마을금고는 주민등록번호도 연락처도 없는 조작 계약서를 보고 대출을 승인했다. 전세보증금 7,000만원의 전세계약서가 보증금 500만 원에 월세 30만원, 보증금 1,000만 원에 월세 30만원의 월세계약서로 대놓고 조작됐지만, 건물 소유주인 신탁회사도, 새마을금고도 이를 알지 못했다.

[저작권 한국일보] 임차인들이 작성한 전세 계약서(왼쪽)와 건물주가 조작한 월세 계약서. 6,000만원 전세가 보증금 500만원 월세로 변했는데도 대출이 승인됐다. 홍인택 기자

이 시기 신탁회사에서 작성해 건물주 이씨에게 보낸 공문에는 ‘전세보증금이 우선수익자(새마을금고)의 채권보다 선 순위’라는 조항이 적혔고, ‘R하우스’를 전속으로 중개했던 공인중개사에선 이 조항을 강조하면서 신규 임차인을 들였다. 피해자 중에는 소유권 이전과 부실 대출 이후에 입주한 이들이 많지만, 이전부터 살다가 계약을 연장한 이들도 있다. 이들은 전세계약서가 월세계약서로 둔갑하는 ‘마술’ 같은 일을 경험했다. 결혼을 앞두고 저렴한 전세방을 찾다가 “사회초년생이 많이 들어온다”는 건물주 이씨의 꾐에 속은 이준호(34)씨가 대표적인 경우다. 2015년 전세 7,000만원에 입주해 매년 전세보증금이 100만원씩 올랐지만, 신탁회사에서 인정해주겠다는 보증금은 500만원에 불과하다.

[저작권 한국일보] 공인중개사가 "전세보증금을 돌려받을 수 있다"며 강조한 신탁회사 측 공문(왼쪽). 사건 이후 거래를 중개한 공인중개사 사무소는 문을 닫았고 연락도 받지 않았다. A씨 제공

피해자들에겐 누구도 사과하지 않았다. 부실하게 심사해 대출을 승인한 새마을금고나 ‘전세보증금이 우선순위’ 공문을 보낸 신탁회사 모두 “우리도 건물주에게 속은 피해자”라며 책임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피해자들은 이미 다른 범죄로 감옥에 가 있는 건물주, 새마을금고, 신탁회사, 공인중개사 모두에게 도의적인 사과조차 듣지 못했다. 피해자들은 입을 모아 “문제를 알고도 새로운 임차인 피해자를 양산한 것도 문제”라고 지적한다. 이제 피해자들이 이들을 상대로 법정 싸움까지 벌여야 하는 상황이다.

‘지옥고’아닌 ‘지옥고(苦)’

단칸방에서 청년들이 가꾸었던 꿈은 철저히 짓밟혔다. 직장인 박모(27)씨는 사건 이후 결혼 계획이 불투명해졌다. 결혼을 약속한 이와 함께 4년간 모은 7,000만원으로 전세보증금으로 냈기 때문이다. 부부의 첫 보금자리로 이곳을 택한 이들도 있다. 신혼여행에서 돌아오고 공매 소식을 접한 이들, 출산 이후에 소식을 접한 이들도 있다. 모두가 살뜰히 아껴서 언젠가 ‘내 집 마련’을 꿈꿨을 청년들이다.

[저작권 한국일보] 연인과 4년간 함께 모은 전세보증금 7,000만원을 잃을 위기에 결혼 계획도 불투명해졌다는 박씨(왼쪽). 직장생활 6년간 모은 돈으로 입주한 B씨가 계약 당시 받은 건물주의 주민등록증 사진을 가리키고 있다. 홍인택 기자.

“이럴 거면 왜 그렇게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돈을 모았나 싶다.” 6년간 직장생활을 하면서 차곡차곡 모은 적금을 전세보증금으로 넣은 직장인 B(33)씨의 말이다. 열심히 일하고 착실히 모으면 결혼도 내 집 마련도 가능하다고 믿었던 자신이 원망스럽기도 했다. 은행도, 신탁회사도, 건물주도, 부동산도 믿을 수 없게 됐다. B씨는 직장까지 그만두고 부모님 댁으로 들어가 살까 고민하고 있다. B씨는 “이런 일을 겪고 난 다음에 돈을 오히려 펑펑 쓰고 있다”고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저작권 한국일보] 'R하우스' 피해자들이 올린 국민청원 게시글(왼쪽)과 건물 엘리베이터에 붙여놓은 포스트잇. 홍인택 기자.

반지하ㆍ옥탑방ㆍ고시원의 ‘지옥고’가 아니더라도 ‘지옥 같은 고통’을 피하긴 어려웠다. ‘R하우스’ 피해자들은 입을 모아 “이건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말한다. 이들이 청와대 국민청원(링크)을 통해서 억울함을 호소하고 나선 것도 이와 같은 이유에서다. 언제쯤 평범한 사람들 모두가 안심하고 몸을 뉠 수 있는 집을 찾을 수 있을까. 청년들이 집 구하는 ‘지옥고(苦)’에서 허덕인다면 대한민국은 영영 ‘헬조선’ 일 수밖에 없다.

글ㆍ사진=홍인택 기자 heute128@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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