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호기의 100년에서 100년으로] <13> 김구의 ‘백범일지’

| 국한문 자서전 ‘백범일지’ 남겨
상권ㆍ하권ㆍ나의 소원으로 이뤄져
동학 접주ㆍ교육ㆍ독립운동 삶 기록
윤봉길 의거 등 주도 광복 이끌어

| 김구의 민족주의에 담긴 의미
“혈통적 민족만이 이 땅 위에 남아
최선의 문화로 다른 민족과 교류”
해방 공간서 통일정부 수립 추진

| 21세기 민족주의의 미래는?
美ㆍ中이 주도하는 ‘G2 시대’서
민족주의를 거부할 수만은 없어
배타성ㆍ폐쇄성 극복이 주요 과제
광복 이후 처음 치러진 1946년 3ㆍ1절 기념식에서 자리를 함께 한 김구(왼쪽)와 이승만. 현실정치인으로서 김구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다. 그럼에도 김구는 민족주의 사상가로서 각인되어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사상과 정치는 불가분의 관계를 맺는다. 사상의 궁극적 목표가 개인과 사회를 변화시키는 데 있다면, 정치는 그 개인과 사회를 바꿀 수 있는 구체적 힘이다. 그래서 사상은 정치에, 동시에 정치는 사상에 큰 영향을 미친다.

지성사의 시각에서 볼 때 지난 100년 동안 활동한 정치가들 가운데 누구를 주목할 수 있을까. 이승만, 김구, 여운형, 박정희, 김대중, 노무현을 먼저 떠올릴 수 있지 않을까. 이들에 대한 평가는 사람에 따라 다를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이 우리 사회의 현실ㆍ이념ㆍ사상에 결코 작지 않은 영향력을 행사해온 것은 분명해 보인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이 기획은 몇 사람의 정치가들을 다뤄 보고자 한다. 가장 먼저 주목하고 싶은 이는 김구다. 까닭은 세 가지다. 첫째, 김구는 지난 100년 동안 가장 넓고 깊게 존경 받아온 독립운동가였다. 둘째, 그의 민족주의는 우리 현대사에 큰 영향을 미쳐온 이념이었다. 셋째, 그가 삶의 마지막에서 추구했던 통일국가는 여전히 중대한 미완의 과제다.

독립정부의 문지기라도 되고 싶다던 김구는 광복을 이룬 조국에 돌아온 지 4년이 지난 후 세상을 떠났다. 김구의 삶은 고난과 저항으로 점철된 인생이었다. 그는 이승만처럼 ‘이승만 시대’를, 박정희처럼 ‘박정희 시대’를 열지 못했다. 그러나 그가 평생을 걸쳐 증거한 민족 독립의 열망은 지난 20세기 전반 우리 민족이 걸어온 길을 비춘 정신의 광채 중 하나였다. 이 광채가 담긴 저작이 바로 ‘백범일지(白凡逸志)’다.

동학 접주에서 독립투쟁 지도자로

‘백범일지’는 김구의 자서전이다. 원본은 국한문 혼용으로 집필됐다. 1947년 처음 출간된 후 널리 읽혀 왔다. 1994년 김구의 아들 김신이 원본을 공개했고, 이를 바탕으로 역사학자 도진순은 1997년 주해본 ‘백범일지’를 펴냈다. 도진순은 2016년에 다시 정본 ‘백범일지’를 내놓았다.

보물로 지정된 친필본 '백범일지'. 한국일보 자료사진
백범 전문가 도진순 교수가 내놓은 '정본 백범일지'.
초판본이 인기를 끌고 있는 가운데 '백범일지' 1948년판도 발간됐다. 김구, 그리고 ‘백범일지’의 생명력을 말해준다.

많은 국민들이 ‘백범일지’를 읽어온 까닭은 뭘까. 김구를 민족 지도자로 존경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 못지않게 주목할 것은 ‘백범일지’가 여느 자서전들과 다르다는 점이다. ‘백범일지’는 자신의 모든 것을 솔직히 고백하고 기록함으로써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전반까지 김구 개인사와 우리 민족사를 생생히 만날 수 있게 한다.

‘백범일지’는 ‘상권’과 ‘하권’, 그리고 ‘나의 소원’으로 이뤄져 있다. 1876년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난 김구의 본명은 김창암이었다. 김창암은 양반을 꿈꾸던 상놈이었다. 동학에 입문해 김창암은 김창수로 개명하고 접주가 됐으며, 김창수는 황해도 동학농민운동에 참여했다. 김창수는 명성황후 시해에 대한 복수의 일환으로 일본인을 죽였고, 김구(金龜)로 개명했다. 김구는 기독교를 받아들였으며, 애국계몽주의의 민권 사상과 일제에 맞서는 국권 사상을 배웠다. 이름을 다시 김구(金九)로 바꾼 그는 1919년 중국으로 망명해 상해 임시정부에 참여했다. 임시정부에서 경무국장ㆍ내무총장ㆍ국무령을 맡았고, 이봉창 의거와 윤봉길 의거를 주도했다. 1930년대 이후 임시정부를 대표하고 주석에 취임했으며, 광복군 창설 등 독립투쟁을 이끌었다. 1945년 광복이 이뤄지자 11월 그리운 조국으로 돌아왔다.

이처럼 김구는 반봉건ㆍ반외세를 외친 동학의 접주였고, 애국계몽을 내세운 교육운동가였으며, 민족 독립을 추구한 독립운동가였다. 김구의 삶은 개인적 차원뿐 아니라 국가적 차원에서 민족이 헤쳐 온 가시밭길을 상징했다. ‘백범일지’를 읽노라면 우리는 한민족이란 누구이고, 나라 사랑이란 무엇인가의 질문들과 조우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민족과 애국의 현재적 의미를 성찰하게 된다. ‘백범일지’가 안겨주는 선물이다.

김구의 민족주의에 담긴 의미

김구의 사상을 잘 드러낸 글은 ‘백범일지’ 말미에 실린 ‘나의 소원’이다. ‘나의 소원’은 ‘민족국가’, ‘정치 이념’, ‘내가 원하는 우리나라’로 나눠져 있다. 김구는 말한다.

“오늘날 소위 좌우익이란 것도 결국 영원한 혈통의 바다에 일어나는 일시적인 풍파에 불과하다는 것을 잊어서는 아니 된다. (...)혈통적 민족만은 영원히 성쇠흥망의 공동 운명의 인연에 얽힌 한 몸으로 이 땅 위에 남는 것이다. (...)현실의 진리는 민족마다 최선의 국가를 이루어 최선의 문화를 낳아 길러서 다른 민족과 서로 바꾸고 서로 돕는 일이다. 이것이 내가 믿고 있는 민주주의요, 이것이 인류의 현단계에서는 가장 확실한 진리다.”

김구의 민족주의 사상을 집약한 말이다. 도진순은 김구의 민족주의가 혈연을 기반으로 하는 단일민족론, 문화와 역사의 공통성을 강조하는 문화민족론으로 구성돼 있고, 이 민족주의가 내부적으론 자유민주주의, 남북 간에는 민족단결론, 대외적으론 열린 민족주의와 연결돼 있다고 정리했다.

현재의 시점에서 민족에 대한 김구의 혈통주의적 접근은 방어적 민족주의론으로 볼 수 있다. 세계화에 따른 다문화사회의 도래를 고려할 때는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와 해방 공간이라는 당대의 시점에서 완전한 독립국가의 건설은 더없이 중대한 민족적 과제였다. 지난 20세기 전반 우리 민족은 억압됐고, 상처 받았으며, 자기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수 없었다.

인간은 본디 복수적 자아들로 구성된다. 실존적 자아, 민족적 자아, 지구적 자아가 그것이다. 1945년 이후 전후 시대가 막 열렸던 당시 우리나라에 가장 시급한 과제는 새로운 국가와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었고, 민족은 의당 그 주체일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김구의 민족주의가 안겨주는 울림이 컸던 이유다.

‘백범일지’를 출간한 이듬해인 1948년 김구는 통일정부 수립을 요구한 ‘3천만 동포에게 읍고함’을 발표했다. 그리고 김규식과 함께 평양을 방문해 남북연석회의에 참여했다. 김구의 남북협상은 국민들로부터 큰 지지를 받았지만 결국 좌절됐다. 1949년 6월 김구는 안두희의 총탄에 맞아 운명했다.

백범 김구. 그는 울림이 큰 민족주의를 남겼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역사학자 서중석은 ‘한국 현대사 60년’에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김구는 이승만의 가장 유력한 정치 라이벌이었고, 1948년에 남북협상을 주장한 이래 통일독립운동의 민족적 지주로 존경을 받았다. 김구의 장례 행렬에는 무려 50만여 명이나 참여해 역사상 최대 인파를 기록했다.” 강화도조약이 맺어진 해에 태어난 김구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듬해에 이렇게 안타깝게 세상을 떠났다.

민족주의의 미래

김구의 사상은 혈통과 문화와 역사를 중시한 민족주의였다. 민족주의는 민주주의와 함께 광복 이후 우리 사회를 이끌어온 이념이었다. 21세기에 들어와서도 민족주의는 여전히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서구 지식사회에서 민족주의에는 두 이론적 전통이 맞서 왔다. 영속주의와 현대주의가 그것이다. 영속주의가 민족을 과거로부터 이어진 영원하고 불변하는 존재로 본다면, 현대주의는 민족을 현대성의 발명품으로 파악한다. 민족의 기원을 고대나 중세로부터 찾는 게 영속주의이며, 근대화가 민족주의를 만들고 이 민족주의가 민족을 창조했다고 보는 게 현대주의다.

주목할 것은, 서구 민족주의와 비서구 민족주의 사이에 상당한 차이가 존재한다는 점이다. 비서구 민족주의의 경우 반제국주의 성향이 두드러지고 민족의 역사성이 강조된다. 김구의 민족주의는 이러한 전통 속에서 배태됐다. 우리 역사를 돌아보면, 서구와는 달리 근대 이전에 민족과 민족주의는 실재했다고 보는 게 온당하다. 사회학자 신용하는 우리 역사에서 민족이 먼저 형성되고 이어서 민족주의가 출현했다고 분석한 바 있다.

그렇다면 21세기 현재 민족주의의 미래를 어떻게 볼 수 있을까. 한편에선 세계화 시대가 열린 이후 서로 다른 민족주의들이 격렬히 충돌하고 있다. 하지만 다른 한편에선 세계시민사회의 등장과 다문화사회의 도래에서 볼 수 있듯, 민족주의의 배타성이 시험대 위에 올라 서 있다.

분명한 것은, 강대국과 약소국이 경쟁하는 지구적 차원에서 민족주의를 일방적으로 거부할 수만은 없다는 점이다. 미국과 중국이 주도하는 G2 시대에 민족주의는 그 의미를 상실하지 않은 정치적 기획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그렇다고 해서 민족주의에 내재된 권위주의와 인종주의를 승인해서도 안 된다. 민족주의의 배타성과 폐쇄성은 극복돼야 한다. 민족적 정체성과 세계시민적 정체성을 어떻게 생산적으로 공존시킬 것인지는 새로운 100년으로 가는 우리 사회에 부여된 매우 중대한 과제의 하나라고 나는 생각한다.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 ‘김호기의 100년에서 100년으로’는 지난 한 세기 우리나라 대표 지성과 사상을 통해 한국사회의 미래를 생각하는 연재입니다. 다음주에는 신영복의 ‘담론’이 소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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