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항공 직원들이 지난 12일 서울역광장에서 2차 촛불집회를 열고 한진그룹 조양호 회장 일가 및 경영진 퇴진, 갑질 중단 등을 촉구하고 있다. 뉴시스

물컵 한 잔에서 시작된 한진 사태가 홍수가 됐다. 애초 갑질을 겨냥했던 화살은 총수 일가의 관세법 위반, 일감몰아주기 혐의를 거쳐 상속세 포탈, 외환거래법 위반까지 겨누고 있다. 여론은 이제 조양호 회장 일가의 경영능력까지 의심하는 상황이다.

몇 차례 사과와 함께 한진그룹이 꺼내 든 사태 진화 카드는 전문경영인 체제였다. 지난달 최대 계열사 대한항공에 경영 전담 부회장직을 신설한 데 이어, 지난주엔 조 회장이 진에어 대표직에서 취임 49일만에 물러났다. 총수 일가 스스로도 경영에서 한 발 물러서는 게 여론의 바람이라 여긴 셈이다.

한진의 전문경영인 카드가 영원할 거라 믿기는 사실 쉽지 않다. 오너 일가라면 거의 예외 없이 계열사 회장, 사장, 임원직을 나눠 맡고 있는 한국 재벌의 문화 때문이다. 대주주가 직접 경영을 맡아야 성공이든 실패든 책임질 수 있고, 미래를 위한 과감한 투자 결단은 전문경영인 체제에선 어렵다는 대기업들의 논리는 늘 굳건하다.

하지만 치열한 능력 경쟁의 시대에, 사회는 이미 고개를 갸웃거리기 시작했다. 금수저로 났다는 이유만으로 자질과 상관 없이 당연한 듯 경영직에 앉아 갖은 특권을 향유하는 행태가 과연 온당하냐는 질문이다.

이는 단지 갑질과 편법이 주는 불편함을 넘어, 우리 경제의 큰 부분을 차지하는 대기업들의 장기 생존능력과도 직결된 문제다. 한진뿐 아니라, 3~4대 경영 체제로 접어든 삼성, 현대차, SK, LG 같은 대표기업들이 지금대로라면 과연 몇 년이나 갈까라는 의문과도 연결된다.

이웃 일본엔 수백년 이상 간판을 이어가는 초장수기업들이 유독 많다. ‘고작’ 100년을 넘긴 기업(비금융사 기준)이 두산, 동화약품 정도인 한국에 비해, 일본엔 1,000년 이상 기업만 7개, 100년 넘은 기업은 5만여개에 달한다.

한국은행은 2008년 일본기업의 장수비결을 분석한 보고서에서 일본의 ‘혈연을 초월한 기업승계 문화’를 주요 요소로 꼽았다. 일본 기업 사이엔 ‘3대째는 양자’라는 말이 통설이다. 창업자 이후 2대째까지는 대체로 번영하나 3대째에 가서는 도산하는 경우가 많아서 생긴 말이라 한다.

일본 기업들은 과거 봉건시대부터 장자의 자질이 의심되면 능력 있는 직원이나 사위 또는 외부 인재를 양자로 영입해 후계자로 삼았다. 요새 말로 하면 전문경영인이다. 서기 578년 창업해 세계 최고(最古) 기업으로 꼽히는 건축회사 곤고구미의 대표자 1대 평균 재임연수(약 35년)는 장자 상속 중심이던 에도막부의 도쿠가와 가문 장군들(17.3년)보다 2배 이상 길었다. 혈족과 무관한 승계를 했기 때문이다.

가훈이나 사훈에 아예 명시해 후계자 외엔 기업에 머무르지 못하게 만드는 ‘분쟁 회피수단’도 장수기업엔 전통으로 자리잡고 있다. 1625년 창업한 양조기업 후쿠미쓰야는 사업계승을 하는 형제 외엔 기업에 머물지 못하게 하고 있다.

3~4세대까지 세습경영이 당연시되고, 자녀의 경영능력은 그다지 문제 삼지 않으며, 선대의 유산을 놓고 형제ㆍ자매들이 진흙탕 다툼을 벌이는 우리 재벌기업의 행태와는 모두 절묘하게 반대되는 전통들이다.

치열한 경쟁 속에 세계적으로도 거대기업의 수명은 그리 길지 않다. 포춘 500대 기업의 최근 60년간 생존율이 12%에 그쳤다거나, 미국 내 가족소유 기업이 3세대 이상 살아남는 비율이 15%에 불과했다는 식의 통계가 숱하다.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은 최근 한 언론인터뷰에서 “재벌 3세들은 최고경영자(CEO)가 아닌 이사회 의장으로서 역할을 수행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그룹의 규모가 너무 커져서 수십 개 계열사에서 벌어지는 일을 일일이 보고받고 결정할 수 없는 상황이 돼버린 만큼 총수는 코디네이터(조정자)로서 역할이 더 중요해졌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이 말이 꼭 정답은 아닐지라도, 우리 대기업 오너들이 진지하게 되새겨 볼만한 말은 될 것이다.

김용식 산업부 차장 jawohl@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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