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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야만 나갈 수 있는 철창… 어린 곰이라도 살릴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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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야만 나갈 수 있는 철창… 어린 곰이라도 살릴 수 있을까

입력
2018.05.19 04:40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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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웅담 가격 폭락에 천덕꾸러기 신세

농가 방치 속 최소한 사료로 연명

# 지리산반달곰 종복원 170억원 투자하면서

‘생태계 교란’ 이유로 방사도 금지

# 전국 600여마리 관리 사각지대에

“어린곰부터 정부가 매입해 관리를”

경기 김포 한 사육곰 농장에서 반달가슴곰 한 마리가 철창 밖을 내다보고 있다. 신상순 선임기자
경기 김포 한 사육곰 농장에서 반달가슴곰 한 마리가 철창 밖을 내다보고 있다. 신상순 선임기자

지난 14일 경기 김포의 한 사육곰(웅담채취를 위한 곰) 농장. 일렬로 늘어선 붉은색 철창 중 한 칸에 곰 두 마리가 보였다. 정부가 사육곰 사업 종식을 위해 사육곰에 대한 중성화수술을 시행하면서 2015년 마지막으로 태어난 사육곰 암컷과 수컷이었다. 사람이 다가가자 암컷은 철창 앞으로 다가와 호기심을 보였지만 수컷은 갑자기 공격성을 띠며 달려 들었다. “끽끽”소리를 내면서 콧바람을 뿜어대고 좁은 철창 안을 계속 왔다갔다 하더니 또 다시 사람을 향해 달려 들었다. 하루 종일 수컷이 하는 행동은 철창 안을 앞뒤로 왔다갔다 하는 것뿐이었다. 이 두 마리에게 하루 종일 주어지는 건 한 포에 1만1,000원짜리 대형견 사료 5㎏ 정도다.

“정부가 하라고 해서 했는데… 이제 다 끝났지. 아파트 몇 채는 날려 먹었어.”

이곳에서 35년 넘게 사육곰 농장을 운영하는 김모씨 부부는 정부의 사육곰 정책으로 모든 사육곰 농가가 피해를 입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들 부부는 1981년 정부가 수출용 사육곰 사업을 장려한 당시 미국으로부터 스무 마리의 곰을 수입하면서 사육곰 사업에 뛰어들었다. 한 마리당 가격은 400만원 가량으로 꽤 큰 돈을 들였다. 국제적 멸종 위기종인 곰 보호 여론이 높아지자 1985년 곰 수입이 금지됐고 우리나라가 1993년 사이테스(CITESㆍ멸종 위기에 처한 동식물의 국제 거래에 관한 협약)에 가입하면서 수출길이 막혔지만 김씨 부부의 수입은 괜찮았다. 웅담판매도 있었지만 새끼를 낳아 다른 사육곰 농가나 테마동물원에 판매했기 때문이다. 한 쌍에 500만원까지 받았다. 한 때 반달가슴곰, 흑곰 등 서른 마리까지 사육했던 이들 부부는 2014년부터 정부가 남은 사육곰 967마리에 대해 중성화 수술을 시키면서 사업을 접었다. 김씨 부부는 곰들이 더 이상 새끼를 낳을 수 없게 되자 도축이 가능한 10년 이상 된 곰들을 차례로 도축했고, 2015년 새끼 두 마리만 남겼다. 김씨는 “이제 잡지도 못하고 사료값만 든다”며 “정부를 믿고 사업을 했는데 이제라도 책임을 져야 한다”고 비판했다.

정부의 별다른 대책이 마련되지 않는 한 이 두 마리는 7년 이상을 좁은 철창에서 지내야 한다. 정부의 사육곰 종식 정책은 언뜻 성공한 듯 보이지만 오락가락 정책은 결국 국제적 멸종위기종 곰 수천마리의 희생으로 이어졌다. 지금도 사육곰 600여마리가 철창 속에서 죽을 날만 기다리며 여전히 방치되어 있다.

경기 김포의 한 사육곰 농장에서 수컷(오른쪽) 한 마리가 철창 속을 앞뒤로 왔다갔다 반복하고 있다. 신상순 선임기자
경기 김포의 한 사육곰 농장에서 수컷(오른쪽) 한 마리가 철창 속을 앞뒤로 왔다갔다 반복하고 있다. 신상순 선임기자

18일 녹색연합에 따르면 지난해 11월 기준 전국 사육곰 농가 34곳에 남아 있는 곰은 628마리. 도축이 허용된 열 살 이상 곰은 400여마리가 넘는다. 사료도 아닌 최소한의 잔반을 먹으면서 비좁고 더러운 공간에서 언제 있을지 모를 웅담채취만을 위해 생명만을 연장하고 있는 사육곰들이 대다수다. 스트레스로 털이 다 빠지기도 하고 다리가 잘려나간 곰들도 있다. 한 때 1,500만원까지 육박했던 웅담가격이 찾는 사람이 줄면서 700만원 가량으로 떨어졌는데 사육업자들은 밥 값만 축낸다며 곰들에게 더 이상 투자를 하지 않고 있어서다. 관리도 부실하다 보니 지난해에는 김포의 한 농장에서 사육곰이 허술한 철창을 탈출해 붙잡히는 사건도 발생하기도 했다.

경기 김포 한 사육곰 농장에서 사육중인 반달가슴곰. 신상순 선임기자
경기 김포 한 사육곰 농장에서 사육중인 반달가슴곰. 신상순 선임기자

정부는 증식 금지 수술을 끝으로 더 이상 예산을 배정하지 않고 있다. 반면 지난 2004년 시작한 지리산 반달가슴곰 종복원 사업에는 170여억원 이상이 쓰였다. 모든 곰은 국제적 멸종위기종인데 이처럼 다른 대우를 받고 있는 이유는 뭘까. 단 하나의 차이는 바로 출신지다. 지리산 반달가슴곰은 러시아 연해주와 중국, 북한 쪽에 사는 ‘우수리 아종’이지만 사육곰은 일본이나 대만에 살던 해양계 반달가슴곰이라 유전자가 다르기 때문에 생태계 교란 등으로 방사할 수 없다는 논리다. 하지만 설사 방사할 수 있다고 해도 이미 야생성을 잃은 곰들이라 사실 방사는 불가능하다.

경기 김포의 한 사육곰 농장에 사는 2015년 생 반달가슴곰 두 마리는 정부의 대책이 마련되지 않는 한 2025년까지 좁은 철창에서 살아야 한다. 신상순 선임기자
경기 김포의 한 사육곰 농장에 사는 2015년 생 반달가슴곰 두 마리는 정부의 대책이 마련되지 않는 한 2025년까지 좁은 철창에서 살아야 한다. 신상순 선임기자

그렇다고 600여마리가 죽을 때까지 이렇게 방치하는 것은 학대라는 게 환경단체들의 주장이다. 정의당 이정미 의원과 녹색연합은 정부가 당장 모든 사육곰들의 여건을 개선하지 못한다면 앞으로 철창에서 살아갈 기간이 긴 어린 곰이라도 먼저 매입해 교육용이나 전시용으로 활용할 것을 정부에 제안했다. 이 의원은 “지난 37년간 정부의 사육곰 정책은 한 마디로 실패다”며 “정부는 다섯 살 이하 어린 곰이라도 먼저 매입하는 등 곰 관리 대책 마련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환경부에 따르면 다섯 살 이하 어린 곰은 55마리다. 환경부 관계자는 “지방자치단체나 동물원 등과 교육용이나 관광객유치를 위해 사육곰 매입에 대해 논의하는 등 관련 대책을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고은경기자 scoopko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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