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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꽃과 벌, 그 아름다운 공생

입력
2018.05.16 18:17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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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담 아래 풀밭으로 들어서자 붕붕거리는 벌소리. 토끼풀꽃, 부추꽃, 종지나물꽃에도 벌들이 들고나느라 여념이 없고, 주먹만큼 송이가 큰 붉은 모란꽃에도 벌들이 날아들며 붕붕거린다. 벌들은 이 꽃 저 꽃 날아다니며 꿀을 채집하느라 분주하지만, 나는 목련나무 그늘에 앉아 풀밭 위를 날아다니며 벌들이 꿀 따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그렇게 한가롭게 앉아 있자니, 오전 내내 허물어진 사랑채 벽을 수리하느라 힘들었던 몸의 피로도 싹 가시는 느낌. 꽃과 나무, 나비나 벌 같은 무심한 존재들과 어울리는 순간들이야말로 내 영혼의 꿀을 채집하는 시간이며, 내 영혼의 근육을 키우는 소중한 시간. 풀밭에 저절로 자라는 풀들도 양식으로 삼지만, 풀밭의 향기와 색과 소리가 주는 기운 또한 내 영혼을 풍성하게 하는 양식이다.

뉘엿뉘엿 해가 질 무렵, 삐거덕∼하는 소리와 함께 육중한 대문이 열렸다. 대문 안으로 들어서는 이를 보니 오랜만에 보는 반가운 벗. 꽃을 따라 이동하며 사는 양봉가 시인이다. 남녘땅 진주 사람인데, 아카시아가 꽃 필 무렵이면 벌통들을 싣고 ‘야반도주하듯’ 내가 사는 강원도 산골까지 온다. “어이, 친구. 아카시아 꽃비 맞으러 왔구만!” 나는 반갑게 친구의 손을 맞잡았다. “글쎄, 하늘이 꽃비를 내려줄지 흙비를 내려줄지 모르겠네.” 이렇게 대꾸하는 친구 표정이 그리 밝지 않다. “아니, 흙비라니?”

아열대로의 심각한 기후변화가 나타나며 꽃이 피어도 꽃에서 꿀이 잘 나지 않는다는 것. 가장 많은 꿀을 제공했던 아카시아나무에서도 왕년처럼 꿀을 채취할 수가 없다는 것. “올핸 어떨지 모르겠으나 꿀이 나지 않으면 앞으로 고 시인 얼굴 잘 볼 수 없을지도 몰라.” 본래 꿀은 야생에서 얻는 것이 진짜. 정직하게 야생에서 얻는 꿀을 떠서 살아가는 양봉가 시인의 말을 들으며 내 마음도 잠시 울가망해졌다. 아, 야생에서 꿀을 얻을 수 없다면 이제 좋은 꿀을 먹기는 글렀구나. 설탕 꿀이 더 기승을 부릴 테니까. 무늬만 꿀이지 진짜 꿀은 영영 사라질 테니까. 그러면 꽃에 기대어 살아가던 내 친구도 양봉을 접을 수밖에 없을 것.

일찍이 아인슈타인은 환경 위기가 지금처럼 심각하지 않았을 때 이런 위기를 예견했었지. 벌이 없어지면 수분(꽃가루받이) 작용도 없어져 식물이 사라지고, 뒤이어 동물도 사라지고, 끝내 인간도 사라질 거라고. 이제 그런 예견이 눈앞의 현실이 된 것. “내가 염려하는 건, 이런 사태가 지속되면, 가장 아름다운 공생의 원리도 사라진다는 거야.” 양봉가 시인이 진지하게 하는 말을 나는 금방 이해했다. 그렇다. 벌들은 꽃에서 꿀을 따지만 꽃을 해치지 않고 식물이 생명을 영위할 수 있도록 수분 작용을 해주지 않던가. 얼마나 아름다운 공생의 모범인가.

여러 해 전 내가 번역한 스와미 웨다의 ‘1분의 명상’에서, 저자는 꽃과 벌의 비유로 수행자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설파한 적이 있다. “벌들은 꽃의 꿀을 따는 것이 목표인데, 그런 자기의 목표를 이루면서도 꽃이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돕는다. 공부가 깊어진 숙련된 수행자는 바로 꽃의 꿀을 따는 벌과도 같다.” 그 무렵 나는 요가 수행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가 말한 꽃과 벌의 비유에서 큰 감명을 받았었다.

친구 시인은 차 한 잔을 마신 후 선물이라며 꿀 한 병을 전해주고 돌아갔다. “꿀 한 병에 지구를 몇 바퀴 돈 길이만큼의 길고 긴 벌의 길이 들어 있다!”는 그 귀한 꿀을. 나는 친구가 선물로 준 꿀을 이전처럼 헤프게 먹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산책길의 아카시아나무 군락지를 지나면서도 바람결에 하늘하늘 흩날리는 꽃비를 두 팔을 활짝 벌려 맞으며 흔감할 수만은 없을 것 같았다.

고진하 목사ㆍ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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