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째 이름 밝히길 거부하며
“형편 어려운 학생에게 써 달라”
게티이미지뱅크

고려대 기금기획본부에 최근 한 졸업생로부터 1억원의 장학기금이 입금됐다. 벌써 4년째, 총 4억원을 선뜻 내놓았음에도 이 중년 남성 기부자는 한사코 자신의 이름을 밝히길 거부했다. 14일 대학관계자는 “1억원 이상 고액 기부자는 교내 시설에 기부자 이름을 붙이는 ‘네이밍(naming)’으로 예우해 왔는데, 매년 사양했다”고 했다. 학교에선 그런 그를 ‘키다리 아저씨’라 부른다.

키다리 아저씨는 그러나 사용처를 명확히 해달라고 부탁했다. “형편이 어려운 학생이 아르바이트 하느라 학업에 소홀해지는 일이 없도록 써 달라”는 요구였다. “(키다리 아저씨는) 지방에서 상경해 어려운 가정형편을 극복하고 자수성가한 인물로, 형편이 어려운 후배들 고생을 조금이나마 덜어주고자 기부한 것으로 안다”는 게 관계자 얘기다.

학교는 키다리 아저씨의 기부금 등으로 2015년부터 ‘KU 프라이드 클럽’ 장학기금을 운영하면서,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에게 해외 교환학생 참여 기회를 제공하거나 장학금을 줬다. 이를 통해 벌써 100명에 가까운 저소득가정 학생들이 견문을 넓혔다. 학교 관계자는 “고려대에 기부하기 훨씬 전부터 (키다리 아저씨가) 여러 단체와 기관 등에 기부했지만, 투명하지 못한 기금 운영에 실망했던 것으로 안다”면서 “우리 학교는 모든 기부금 사용처를 공개하고 있다”고 했다.

키다리 아저씨의 익명 기부는 세대를 넘어선 ‘기부 선순환’의 씨앗이란 시선이 많다. 실제 기부 혜택을 받은 많은 학생이 “‘진짜 성공’이 무엇인지 깨달았고, 사회 진출 뒤 어떤 방식으로든 환원하겠다”고 밝혔단다. 한 사회단체 관계자는 “장학금이나 기부금 혜택을 받은 학생들 가운데 상당수는 이를 ‘공짜’가 아닌 ‘빚’으로 생각한다”고 했다. 자신이 받은 혜택을 기부자에게 직접 돌려줄 순 없지만, 작은 도움의 값어치를 알기에 사회에 진출한 후 조금이라도 기부를 하게 된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김형준 기자 mediaboy@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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