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일 경기 파주시 도라전망대에서 비무장지대(DMZ) 북측 초소의 대남방송 확성기 자리가 빈 자리로 남은 모습(오른쪽 사진)이 보이고 있다. 왼쪽은 지난해 9월 대남방송 중인 확성기가 초소 옆에 자리한 모습. 연합뉴스

버스는 북쪽으로 향했다. 군부대 훈련소 앞에서 몇몇 ‘장정’들을 내려주고 운전수는 무심히 북녘을 향해 액셀레이터 페달을 밟았다. 보충대 동기들이 하나 둘 먼저 내릴 때마다 담배 연기에 섞인 한숨 소리는 길어졌다. 최전방 가까운 곳에 배치될 가능성이 커져갔기 때문이었다. ‘종점’에 해당하는 곳에 내려 첫날 밤을 보낼 때 웽웽거리는 소리에 마음이 어지러웠다. 북쪽 스피커 속 남녀의 쇳소리가 맹렬했다. 열 단어에 한번 꼴로 등장하는 김일성 수령 동지와 위대한 지도자 김정일 동지 표현은 내가 2년 넘게 지내야 할 곳이 서울보다 개성에 가깝다는 사실을 알렸다. 대남방송과의 첫 만남은 공포였다.

대남방송은 군 생활의 일부였다. 인기그룹 룰라가 내무반 TV 속에서 ‘천사를 찾아 사바사바 사바’(곡 ‘날개 잃은 천사’)라고 노래 부를 때 밖에서 ‘당의 영도력’이 가사 사이로 끼어드는 식이었다. 처음엔 공포를 안겼던 대남방송은 점차 지리멸렬이었다. 제아무리 위대하신 분이라고 해도 너무 자주 언급되니 정말 위대하신 분 맞나라는 의문이 당연히 들었다. 행진곡과 군가 풍의 노래가 바통을 이어받으며 지상낙원을 선전할 때 그곳이 정말 끔찍이 획일적이고 억압적인 곳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만약 남한 군인들을 꾀여 북쪽으로 귀순시킬 요량이었다면 그런 딱딱하고 거친 내용의 방송을 하진 않았을 것이다. 대남방송은 그저 그들이 그런 방송을 한다는 사실에 만족하는, 관성적 행태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이 훌쩍 지나 2010년쯤 한국영상자료원에서 북한영화 ‘돌아오지 않는 밀사’(1984)를 보게 됐다. ‘돌아오지 않는 밀사’는 북한이라는 원산지 표시가 붙었을 뿐 남한 영화에 가까웠다. 납북 영화인 신상옥(1926~2006)-최은희(1926~2018) 부부가 북한에서 제작자와 감독으로 협업해 만든 영화였다. 북한 최초로 해외 로케이션(체코)을 했고, 북한 영화사상 해외 영화제 첫 수상 기록(카를로비바리국제영화제 특별감독상)을 남겼다. 영화는 1907년 고종의 밀사로 특파됐다가 일제의 방해로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지 못한 이준 열사의 비극을 그린다. 북한 체제 선전과는 무관한 내용이었다. 하지만 영화를 보기 전 주민등록번호와 이름을 기록장에 남겨야 했다. ‘주적 국가’의 영화를 본다는 이유에서였다. 남한에서 북한이라는 공포는 21세기 들어서도 그렇게 관성적으로 작동했다.

지난달 27일 남북 정상회담과 판문점 선언으로 최근 대남방송 시설과 대북방송 시설이 철거됐다. 일각에서는 북한이 가장 두려워하는 강력한 무기 중 하나가 사라졌다고 우려한다. 일부 맞는 말이다. 남한 드라마나 영화가 담긴 USB 돌려 보다가 당국 단속에 걸려 처벌 받는 북한 주민이 적지 않다는 소문이 종종 들리는 걸 보면, 북한 군인을 유혹하는 대북방송의 파괴력은 만만치 않았으리라. 하지만 한반도 화해 기류가 강해지고 남북 교류가 활발해진다면 남한의 대중문화가 북한에서 좀 더 자유롭게 유통될 가능성이 크다. 남한 체제가 70년 동안 민주주의를 발전시키면서 진척시켜온 표현의 자유의 결과물은 북한 주민의 마음을 크게 흔들 것이다.

표현의 자유의 무서움은 중동지역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터키는 미국에 이어 드라마 수출 세계 2위 국가다. 이집트와 이란,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등 범이슬람권에서 특히 큰 사랑을 받고 있다. 터키 드라마의 무기는 세속화다. 음주와 혼전 성관계 등 이슬람 국가들이 금기시하는 내용을 다룬다. 정치와 종교를 엄격히 분리해 이슬람권에서는 가장 세속적인 터키 사회라서 가능한 일이다. 이슬람권 친구에 따르면 중동 사람들이 가장 가고 싶어하는 여행지는 터키 이스탄불이다. 터키 드라마 속 남녀가 만나고 사랑하고 헤어지는 낭만의 장소라서다. 비핵화가 실현되고 미국이 북한 체제를 보장하는 동시에 남북 교류가 봇물을 이룬다면 남한 대중문화는 북한에 어떤 영향을 끼칠까. 상상은 즐겁지만 지금 당장은 대남방송과 대북방송을 더 이상 듣지 않게 되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

라제기 문화부장 wender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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