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일이든 상관없이 누군가 갑자기 까닭을 물어볼 때면 난처하다. 분명 나름대로 곰곰이 생각하고 계획하고 결정하며 살아가는 듯한데, 때론 너무 습관적인 반성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는데, 까닭을 내놓아보라는 질문 앞에서는 멍해진다.

거꾸로 무슨 대단한 까닭이 있겠냐고 반문하고도 싶다. 인간이 늘 그렇게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동물이던가. 정작 가장 내밀하고 중요한 일들은 까닭 없이 좋고, 까닭 없이 싫은 감정으로 이루어지기도 하지 않나. 까닭 없이 사랑하고, 까닭 없이 분노하고, 까닭 없이 싸우고, 서로 까닭을 모른 채 헤어지기도 하는.

인간이 그러하듯 인간이 창작한 텍스트도 완벽한 합리로 구성되지 않고 비합리, 모순, 균열의 지점을 지니고 있다. 현대에 들어서는 그 틈을 들여다보는 게 텍스트를 잘 이해하는 방법이라고 여기기도 한다. 바로 그 틈 안에 더 중요한 까닭이 감추어져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근대로부터 이어져 온 교육제도는 여전히 어린이들에게 오직 합리성만을 유일한 가치로 가르치는 듯하다. 합리성은 시민사회를 구성하기 위해 기본적으로 단련되어야 할 요건이겠지만 교과서에서 정답을 가리는 일로만 제시된다면 곤란하다. 수많은 틈을 상상하거나 발견하면서, 빈틈없이 이루어진 예전의 인식을 깨고, 새로운 인식의 지평을 갖게 되는 과정을 훈련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까닭’을 찾아가는 길일 수 있겠다.

“동생도 없고 누나도 없고/형도 없이 나는 혼자//우리 반에 나 같은 애들/절반은 되는데//길에서 만난 할머니들은/요즘 애들은 혼자 자라서/저밖에 모른다 하셔//나는 친구들과 장난감도/과자도 사이좋게 나눠 먹는데//엄마가/“동생 하나 만들어줄까?”/하면/“아니요, 형 만들어줘요”/웃어넘길 줄도 아는데”(‘외둥이 1’ 전문)

“요즘 애들은 혼자 자라서 저밖에 모른다”는 통념을, 아이는 비판적으로 돌아본다. 외동이 절반인데 그 친구들이 다 자기밖에 모르나? 절반의 구성원이 자기밖에 모르는 집단이 제대로 유지될 수 있나? 자기밖에 모른다는 건 구체적으로 어떤 태도와 행위를 말하나? 나의 사회성 신장을 위해 태어나게 되는 생명은 또 대체 뭐지? 이러한 질문이야말로 어린이가 찾아가야 할 ‘까닭’이 되어야 하겠다.

김유진 어린이문학평론가ㆍ동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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