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시조 동명왕의 묘로 알려진 동명왕릉. 서기 472년 장수왕이 평양으로 수도를 천도할 당시 옮겨온 것으로 알려졌다. 2004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2005년 개성, 평양, 묘향산을 두루 여행할 기회가 있었다. 개성공단 본격 가동으로 남북 교류가 가장 활발했던 시기이기도 하거니와 금강산 관광사업이 호황을 누리면서 북한이 이들 지역을 추가 공개하기 위한 시범 관광 내지는 사전 답사 성격에서 이뤄졌다.

여행지라는 관점에서 개성, 평양, 묘향산은 그간 역사책에서만 접할 수 있었던 유적지를 두 눈으로 확인하는, 살아 있는 답사가 가능하다는 매력이 있었다. 사라진 유리 거울의 반쪽을 찾아 길을 나서는 원정대처럼 설렜던 기억이 생생하다.

고려 충신 정몽주가 이방원이 보낸 자객의 철퇴에 맞아 숨진 현장인 개성 선죽교에서 지금도 선명하게 남아 있는 핏자국을 발견하고 과거로 여행하는 것 같은 전율을 느꼈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중인 것과 더불어 단 2점만 남아있는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를 개성고려박물관에서 접했을 때의 감격은 쉽사리 잊을 수 없다.

당시 개성 관광을 주도한 현대그룹 현정은 회장이 박연폭포 앞에서 덩실덩실 춤추던 모습은 황진이와 서화담의 러브 스토리를 잇는 또 하나의 상징적인 사건으로, 지금도 눈에 선하다.

평양에서 만난 동명왕릉, 조선중앙역사박물관에 전시된 안학궁과 덕흥리 무덤벽화 모형 등 남한에서는 쉽게 접할 수 없는 고구려 시대의 다양한 유적을 접하면서 비로소 삼국시대의 완전체를 찾은 것 같은 희열을 느꼈다.

묘향산 초입에 위치한 북한 최대의 사찰 보현사는 임진왜란 당시 서산대사가 의병을 일으킨 역사의 현장이자, 합천 해인사의 팔만대장경 판본과 청주 흥덕사에서 금속활자로 찍은 직지심경을 보관 중인 문화유산의 보고이기도 하다. 묘향산의 기억 중 또 하나 잊을 수 없는 곳이 국제친선관람관이다. 4만6,000㎡나 되는 방대한 공간에 역대 외국 사절단이 방북 때 가져 온 선물들을 전시 중인데, 정주영 전 현대회장이 건넨 승용차를 비롯, 역대 대통령의 선물도 다수 있었다.

스탈린이 선물한 방탄 기차, 프로 레슬러 역도산이 건넨 벤츠 승용차 등 수많은 선물 중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작은 농구공 하나였다.

매들린 올브라이트 전 미국 국무장관이 핵ㆍ미사일 폐기와 북미 수교 담판을 짓기 위해 2000년 10월 방북했는데, 당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좋아하는 마이클 조던을 동행하는 대신 그의 친필 사인이 담긴 농구공을 건넸다. 이때 조던을 대신해 방북한 이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친분이 두터운 데니스 로드먼이었으니 이런 운명이 또 있을까 싶다.

이후 미 정권의 교체로 한반도의 관심이 상대적으로 낮아지면서 북미관계의 진전을 보지 못한 채 흘렀고, 남북관계마저 소원해진 채 세월이 지나면서 손에 잡힐 듯 했던 북한 여행의 꿈도 멀어졌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의 판문점 만남은 잊혀진 듯 희미해진 당시의 기억을 오롯이 되살리는 각성제 역할을 했다. “개마고원과 백두산을 트레킹하고 싶다”는 문 대통령의 발언에 흔쾌히 화답하는 김 위원장의 모습을 보며 북한 여행상품이 출시될 날이 머지않았음을 직감케 한다.

돌이켜 보면 전쟁 직전의 위기 모드에서 평화 모드로 급반전한 배경에 그 농구공의 역할이 조금은 있지 않았나 싶다. 김정은 위원장이 농구 광팬이 된 것도, 굳이 데니스 로드먼과 친분을 과시하는 것도 올브라이트가 건넨 농구공이 끼친 긍정적인 영향이 아닐까. 그래서인지 “경평 축구보다 농구부터 하자”는 김 위원장의 발언은 스포츠를 비롯한 민간 교류에 힘을 싣겠다는 진심이 묻어난다.

김 위원장의 최근 동향을 보면 모처럼 부푼 화해 모드의 판이 예전처럼 쉽게 깨지기는 어려울 듯 하다. 부디 이런 분위기가 한반도 평화의 초석이 됐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공은 북으로 넘어갔다.” 올브라이트 전 장관이 방북 당시 가져 간 농구공에는 이런 글이 적혀 있었다. 작금의 상황을 축약한 절묘한 문장이 아닌 가 싶다.

한창만 지역사회부장 cmha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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