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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한 당신] ‘여성해방 의식 고양’ 페미니즘 제2의 물결 일으키다

입력
2018.05.07 04:25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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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세대 #미투 운동 시작

회원 자격ㆍ규율도 없는 CR모임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

상징적 슬로건 만들어 내

# 추상적 주장에서 구체적 사례로

22세 유치원 교사 앤 포러 파인

“여성이 겪는 억압들을 들려 달라”

과학적 연구방법론으로 진화

# 작가를 꿈꾸던 페미니스트

공산주의자 아버지ㆍ간호사 어머니

정치ㆍ사회 관심 많던 작가 지망생

‘전통 여성성 장례식’ 주도하기도

# “CR모임은 가장 성공적 여성 연대”

“잡담 모임” 조롱 들으면서도

2세대 급진 페미니즘 눈 띄워

세계 각지 변혁운동으로 이어져

앤 포러 파인은 2세대 페미니즘 운동의 핵심 동력이 된 ‘의식 고양 모임’의 아이디어를 제공한 페미니스트다. 그는 이렇다 할 책을 쓰거나 묵직한 감투를 쓴 적 없는 무명 활동가였고, “여성해방운동은 저명한 몇몇 여성들만이 아니라 (자신처럼) 이런저런 모임에 나고 들며 그 언저리에 머물던 수많은 여성들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말을 남겼다. ‘레드스타킹스’ 아카이브에 남아 있는 1989년의 앤 파인. meetinggroundonline.org
앤 포러 파인은 2세대 페미니즘 운동의 핵심 동력이 된 ‘의식 고양 모임’의 아이디어를 제공한 페미니스트다. 그는 이렇다 할 책을 쓰거나 묵직한 감투를 쓴 적 없는 무명 활동가였고, “여성해방운동은 저명한 몇몇 여성들만이 아니라 (자신처럼) 이런저런 모임에 나고 들며 그 언저리에 머물던 수많은 여성들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말을 남겼다. ‘레드스타킹스’ 아카이브에 남아 있는 1989년의 앤 파인. meetinggroundonline.org

사단법인 한국여성연구소가 펴낸 ‘젠더와 사회’(동녘, 2014)는 페미니즘의 여러 쟁점과 지향, 이론-실천의 지형을 개괄한 책이다. 1부 첫 글은 페미니즘과 여성운동의 역사를 시기별 주요 사건과 인물, 슬로건 등을 통해 살핀 ‘여성주의 역사와 젠더 개념의 등장’(이남희)이다. 거기 2세대 페미니즘을 설명하는 대목에, 이런 구절이 있다.

“새로운 여성운동의 동력은 1968년을 전후해 다양한 ‘의식 고양 집단’을 통해 고사리 순처럼 올라왔다. 이들 ‘조직 없는 조직’의 구성원들은 대부분 30대 이하 여성으로, 지난 10년간 각종 사회운동에 참여해 정치교육을 받거나 학생이 직접 원하는 강좌를 개설ㆍ운영할 수 있는 자유 대학을 이수한 경험이 있었다.(…) 이 모든 변화가 여성해방운동이 도래할 수 있는 조건이었다.”

저 ‘의식 고양 집단’을 리베카 솔닛은 책 ‘여자들은 자꾸 같은 질문을 받는다’에 이렇게 소개했다. “1970년대 페미니즘 운동의 한 가지 중요한 현상은 여자들이 모여서 각자의 경험을 말하는 ‘의식 고취 모임’이었다.(…) 여자들은 처음에는 집안일에 대해 불평했지만 그 다음에는 그 동안 그들을 침묵하게 만들고 외롭게 만들었던 수치심을 깨고 강간이나 폭력 같은 어두운 문제를 말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시인 뮤리엘 루카이저의 시구를 자주 인용했다. ‘한 여자가 자기 삶에 대해서 진실을 말한다면 어떻게 될까? 세상은 터져버릴 것이다.’”(102쪽)

의식 고양 집단 혹은 의식 고취 모임은 ‘Consciousness-Raising Groups(줄여서 CR모임)’를 옮긴 말로, 1968년 급진주의 페미니스트 그룹 ‘뉴욕의 급진 여성들(NYRW)’이 처음 시작한 1세대 ‘미투(Me Too)운동’이었다. 그들은 매주 한 차례 멤버의 집 부엌이나 거실에 모여 다양한 주제로 각자 경험과 생각을 공유했다. 주제는 육아나 가사노동, 성생활, 낙태, 취업과 경제적 독립, 외모 가꾸기 등, 다들 할 말이 많은 것들이었다. 특별한 회원 자격도 규율도 없었다. 무겁고 어두운 이야기여도 일단 쏟아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신나는 일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CR모임은 서부 캘리포니아와 남부 플로리다 등 대도시를 중심으로 “고사리 순처럼” 솟아나, 몇 년 새 모임 수가 1,000여 개로 불어났다.

여성들은 CR모임을 통해 자기 문제가 자기만의 문제가 아니란 걸 확인했고, 문제의 뿌리를 토론하며 탐구했고, 함께 맞서 싸웠다. ‘자매애는 강하다(Sisterhood is Powerful)’같은 실천적 구호와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Personal is Political)’이라는 2세대의 상징적 슬로건이 그 토양 위에서 발아했고, 앤 코트(Anne Koedt)의 에세이 ‘질 오르가즘의 신화’, 케이트 밀렛의 ‘성의 정치학’, 슐라미스 파이어스톤의 ‘성의 변증법’ 등이 쓰여졌고, 68년 1월의 ‘전통 여성성 화형식’ 9월의 미인대회 반대시위 낙태금지법 폐지운동 등이 이어졌다. 한 마디로 CR모임은 2세대 급진 페미니즘 이론 연구와 학습의 모판이자 ‘여성해방운동’을 조직하고 실천한 기초 모듈이었다.

급진주의 페미니즘이 60년대 말 분화한 과정은 앞서 로절린 벅샌덜, 케이트 밀렛 등의 삶을 통해 살펴본 바 있다. 엘리너 루스벨트의 대통령 직속 여성특별위원회(1961~63)가 63년 ‘여성 지위 보고서’를 낸 뒤 해산하고, 그 해 ‘여성의 신비’를 출간한 베티 프리던이 66년 전미여성협회(NOW)를 창립하며 2세대 운동이 물꼬를 텄지만, 67년 출범한 ‘뉴욕의 급진여성들(NYRW)’은 NOW의 ‘주류’ 운동이 법ㆍ제도 개선과 권리 신장의 개량적 노선에 치우쳐 성 억압ㆍ차별의 뿌리는 건드리지 못한다고 판단했다. NYRW는 여성 스스로 권력을 쟁취하고 ‘여성성(feminity)’에 대한 사회적 인식과 문화ㆍ관습을 전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들의 주장은 반전ㆍ고용 평등 같은 주류 이슈와 달리, 처음엔 다소 막연하고 추상적이었다. 67년 11월, NYRW의 소수 활동가들이 창립멤버 중 한 명인 앤 코트의 아파트에 모여 대중운동 아이디어 회의를 했는데, 유치원 교사였던 22세 여성 앤 포러 파인(Anne Forer Pyne)이 이런 말을 꺼냈다.

“내 생각엔 우리의 의식을 고양시킬 수 있는(raising our consciousness) 다양한 활동이 필요한 것 같다.” 처음 듣는 생경한 표현에 사라차일드가 “의식 고양?”이라고 반문했고, 파인이 부연했다. “나는 여성이 겪는 억압에 대해 최근에야 생각해보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매일매일 새로운 사실을 깨닫고 점점 내 의식이 고양되는 걸 느낀다.” 앤 파인은 몇 가지 예를 들었다고 한다. 여성의 매력이란 게 뭔지 생각해보고 있다고, 남자 앞에선 매사 서툰 척 하고, 늘 친근하게 비위를 맞추고, 옷도 구두도 말끔하게 갖춰 입어야 하고, 그러자니 살을 빼야 하고, 안경은 안 써야 하고…, 그 모든 것들이 자신의 천부적 자유나 권리와 무관하게 남성들이 말하는 매력에 나를 옭아매는 것임을 깨닫게 됐다는 이야기, 그런 ‘의식의 고양’이 필요하다는 이야기.(수전 브라운 밀러는 앤 파인이 “노동자들에게 계급의식을 고취시켜야 한다던 구좌파들의 말처럼, 나도 내 의식을 고양할 수 있게 여러분들이 내게 여성으로서 겪은 억압의 사례들을 좀 들려달라”고 말했다고, 회고록 ‘In Our Time’에 썼다.)

사라차일드는 “나는 여성 억압을 오래 생각하고 책도 많이 읽었다고 자부했지만, 앤의 말을 듣고는 더 깊이 들여다볼 수 있는 관점을 얻었고, 내가 아는 것들을 어떻게 표현하고 공유해야 할지 더 고민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썼다. 그럼 아예 그런 대화 모임을 꾸려보자고 제안한 건 70년 앤솔러지 ‘Note from the Second Year’에 수록한 에세이 ‘The Personal is Political’로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란 구호를 대중화한 캐럴 해니쉬(Carol Hanisch)였다. CR모임이 그렇게 탄생했다.

1960년대 말 미국 뉴욕의 한 CR모임. 여성들은 매주 한 차례 저렇게 모여 각자의 삶의 현실에 대해 자유롭게 발언하고 토론했다. 그들의 논의가 2세대 페미니즘 이론의 양분이 됐고, 그들의 유대가 여성해방운동의 실천적 동력이 됐다. hercampus.com
1960년대 말 미국 뉴욕의 한 CR모임. 여성들은 매주 한 차례 저렇게 모여 각자의 삶의 현실에 대해 자유롭게 발언하고 토론했다. 그들의 논의가 2세대 페미니즘 이론의 양분이 됐고, 그들의 유대가 여성해방운동의 실천적 동력이 됐다. hercampus.com

그 일화를 두고 훗날 사라차일드는 “(의도하진 않았지만) 우리는 17세기 과학이 스콜라학파에 대항하던 방식, 즉 ‘책이 아니라 자연을 탐구하라(study nature, not books)’는 과학적 연구방법론을 획득한 셈이었다”고 썼다. 페미니즘 작가 앨릭스 케이츠 슐먼(Alix Kates Shulman)은 “CR모임의 토론이 강력했던 것은 우리의 모든 경험들을 세상에 드러내 보일 수 있는 거대한 빛을 획득했다는 각성 때문이었다. 그건 우리의 삶에 드리운 어둡고 두려운 그늘을 일순간에 걷어낼 수 있으리라는 깨달음을 선사했다”고 말했다.(rejuvenationmedia.com)

2세대 급진 페미니스트들을 각성시키고, 제2의 물결과 이후 다양한 변혁운동에 기여한 무명 페미니스트 앤 포러 파인이 3월 21일 신부전으로 별세했다. 향년 72세.

앤 파인은 1945년 뉴욕 맨해튼에서 태어나 퀸스에서 성장했다. 공산주의자였던 간호사 어머니와 교사 아버지는 정치 사회적 현안에 관심이 많아 반전 인권 운동 등 사회적 이슈가 식탁 대화의 단골 소재였다고 한다.(nyt, 18.3.30) 파인은 안티오크 대학을 거쳐 뉴욕시립대를 졸업, 유치원 교사가 됐다. 66년 맨해튼으로 이사하고 얼마 뒤 페미니즘 운동이 본격화하자 앤은 ”물 만난 오리처럼 행복했다”고, 2012년 낸 자전적 소설 ‘Haboob: A Novel of a girl’s life in year 2012’의 작가 소개에 썼다. 그의 꿈은 작가가 되는 거였다.

앤은 25세이던 1970년 뉴욕의 한 히피 레스토랑에서 4년 연하의 아르바이트생 윌리엄 파인을 만나 몇 달 뒤 동거를 시작했다. 얼마 뒤 윌리엄이 월스트리트 증권가에서 문서 수발을 돕는 주급 96달러짜리 일자리를 얻고는 “생계는 내가 책임질 테니 글쓰기에 전념해보라”고 큰소리를 쳤고, 앤은 그 길로 직장을 그만두고 전업 작가가 됐다. 둘은 1991년 뉴욕 생활을 청산하고 기르던 개와 함께 애리조나 주 툭슨(Tucson)으로 이사, 동거 21년 만에 혼인 신고를 했다. 부부는 2011년 윌리엄이 숨질 때까지 “행복하게 잘” 살았고, 앤도 “주부의 삶”에 만족했다고 한다. 그 사이 앤은 몇 권의 소설과 에세이를 주로 자비로 출판했고, 다섯 번째 소설인 ‘Haboob(아랍어로 ‘큰 바람’이란 뜻)’ 등에는 윌리엄이 삽화를 그렸다. 부부는 각각 앤 윌렌스키(Anne Wilensky)와 빌 스탬펀(Bill Stampone)이라는 필명을 썼다. 확인된 앤 파인의 이야기는 그게 거의 전부다. 부부에게 자녀는 없었다.

68년 1월 15일, ‘저넷 랭킨 여단(Jeannette Rankin Brigade, 1916년 최초의 여성 하원의원으로 의회에 진출한 저넷 랭킨이 대열의 선두에 섰다)’이라 불린 5,000여 명의 여성들이 벌인 미 의회 앞 ‘반전 평화 행진’은 NYRW의 출정식이기도 했다. “정치적 권력도 발언권도 없는 우리 여성이, 다만 의회 남성들의 선의에 호소하는 것으로 전쟁의 흐름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지나치게 천진난만하다”.(파이어스톤, Notes from the First Year) NYRW 회원 50여 명은 거기서 컬러(curler)와 가터(garter), 리본 등으로 장식한 커다란 여성 인형을 불태우는 ‘전통 여성성 장례식(Burial of Traditional Womanhood)’을 열었다. 장례식 초대장에 파이어스톤은 “조화는 사절”이라며, 대신 전장으로 떠나는 남편ㆍ애인을 눈물 젖은 손수건 흔들며 배웅하는 ‘전통적 여성의 역할과 가치(American Mom and Apple Pie)’를 버릴 각오를 지니고 오라고 썼다.

1968년 1월 '저넷 랭킨 여단'의 미 의회 앞 반전평화행진. 급진주의 그룹 NYRW 회원들은 저 행진 직후 독자적인 '전통 여성성 장례식'을 열어 급진주의 운동에 시동을 걸었다. democraticunderground.com
1968년 1월 '저넷 랭킨 여단'의 미 의회 앞 반전평화행진. 급진주의 그룹 NYRW 회원들은 저 행진 직후 독자적인 '전통 여성성 장례식'을 열어 급진주의 운동에 시동을 걸었다. democraticunderground.com

앤 파인도 저 50여 명 중 한 명이었다. 캐럴 해니쉬는 자신이 창간한 온라인 매체 ‘Meeting Ground’에 앤 파인이 썼다는 글 몇 편을 소개했다. 하나는 72년 메릴린 벤더(Merilyn Bender)라는 페미니즘 문학비평가가 앨릭스 슐먼의 첫 소설 ‘한 고교 무도회 퀸의 회고록 Memoirs of an Ex-Prom Queen’을 신랄하게 비판하자 그 비평을 반박한 글이다. NYRW의 등사판 유가 잡지 ‘Woman’s World’에 발표한 벤더의 비평은, 앤 파인의 글로 추정컨대 “문체가 썩 서정적이지도 않고, 상상력도 독창적이지 않고(…내용 면에서도) 주인공이 페미니스트로서의 모범에 못 미친다’는 게 요지였던 듯하다. 앤 파인은 뉴욕타임스에 기고한 글에 이렇게 썼다. “중요한 것은 (슐먼의 작품이) 페미니스트 소설이라는 점이다.(…) 성장하는 동안 예뻐 보여야 한다는 압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여성이 몇이나 될까. 여성은 자신을 위해 쏟아야 할 시간과 에너지를 사회가 바라는 전형적 미를 가꾸는 데 쏟아 붓는다. 사회는 여성을 외모로 억압해왔다.(…) 슐먼이 소설로 그 음흉한 사회적 억압을 폭로했다면, 그것만으로도 그는 무척 큰 일을 해낸 셈이다.(…) ‘No’라고 말하지 못하는 것은 비단 그 소설의 주인공만이 아니다. 사실 우리 대부분이(legions of us) 그렇다.(…) 덜 각성된 여성이 이 사회에서 겪는 현실은 결코 아름다운 이야기일 수 없다. 하지만 그건 패배자의 이야기가 아니라, 스스로를 위해 싸움을 배워 나가야 하는 여성들의 진짜 이야기이다.”

레드 스타킹스(Red Stockings)의 ‘페미니스트 혁명’이란 책에 수록한 에세이에서는 ‘여성해방운동’을 편의상 여성운동이라 줄여 부르는 관행을 비판하며 여성, 해방, 운동의 세 낱말 모두 빠뜨려서는 안 될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해방이란 낱말을 입밖에 꺼내는 것 자체가 의식의 고양에 도움을 준다”고 썼다.

CR모임이 확산되자 지금 한국 사회가 겪는 것처럼 ‘백래시(backlash, 반발)’도 거세졌다. 좀스럽다(petty, trivial)거나 정치와 멀어졌다거나 사적인 심리치료 수준으로 전락했다는 진영 내의 비판도 들었고, 남성혐오집단이라거나 남성질투(sour grapes)모임이라는 바깥의 조롱도 들었다. ‘잡담 모임(coffee Kaltches)’, ‘암캐 세션(bitch session)’이라고 부르는 이들도 있었다. 모임이 많아지면서 그렇게 변질된 예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케이트 밀렛을 소개하며 언급한 것처럼, 70년대 중반 급진주의 운동이 동력을 잃으면서 (젠더 권력에 대한) 대항적 운동이 아닌 대안적 ‘여성 반문화공간’으로 퇴각한 것도 CR모임의 변질 양상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뉴욕타임스와 ‘Rejuvenation Media’ 등에 따르면 앤 파인도, 글쓰기(혹은 연애)에 몰두했는지 점차 운동과 멀어졌다. 적어도 표나게 활동한 기록은 없다.

비판과 한계에도 불구하고 CR모임은 ‘제2의 물결’ 그 자체였다. 수전 브라운 밀러는 “CR모임은 여성운동의 가장 성공적인 연대의 형식이자 창조적인 발상의 원천이었다”고 평가했다. 모임의 전통은 이후 세계 각지의 다양한 변혁운동과 LGBT 등 소수자 인권운동의 방편이자 목표로 지금도 이어지고 있고, 교육학의 한 방법론으로 연구되고 있다. 80년대 한국의 국가권력은 자취방 같은 데 모여 계급론ㆍ혁명론 등을 공부하던 대학ㆍ노동현장의 운동권을 ‘의식화 집단’이라 불렀다.

69년 뉴욕서 열린 레드 스타킹스의 ‘낙태 경험 공개발언’에 동참했던 앤 파인은 20주년이던 1989년 기념행사에 참석, 낙태 경험에 대한 자신의 복잡한 심정을 토로했다. 그는 출산ㆍ양육 준비가 전혀 안 돼 있던 당시 자신의 선택을 결코 후회하지 않지만, 그 뒤로 다시 아이를 가지지 못한 슬픔 또한 적지 않았다며 “미래 세대는 그런 감정의 갈등을 덜 느낄 수 있도록 여성해방운동이 도움을 주리라 기대한다”고 말했다. 그는 최근까지도 CR모임의 진화ㆍ발전을 위해 e-메일 토론 등에 참여하고, 원년 활동가들과도 접촉하곤 했다고 한다. 그리고 “여성해방운동은 이름을 남긴 몇몇 여성들만이 아니라 이런저런 모임에 부유하듯 나고 들며 그 언저리에 머물던 수많은 여성들(sea of women)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말을 남겼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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