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은의 ‘삶도’ 인터뷰] <7>'프로파일러 1호' 권일용 전 경정

제대 앞두고 아버지 권유에 경찰의 길로
28년간 살인사건 1000건 다루는 강행군
“제복은 곧 약속… 피해자 위해 범인 잡아”
28년 경찰 생활 중 17년을 범죄자의 행동 심리에 돋보기를 대고 산 권일용 전 경정. 명예퇴직 한 지 꼭 1년이 되는 4월 30일, 그를 만났다. 돋보기를 내밀자, 그는 범죄 현장 사진을 PC 모니터로 들여다 볼 때 실제 돋보기를 썼다며 반가워 했다. 김주성 기자

2000년 이전만 해도 우리나라에는 개념 조차 낯설었으나, 지금은 꿈나무들의 새 장래희망 목록 중 하나가 된 ‘프로파일러’. 정작 그 길을 닦은 개척자는 어릴 적 꿈이 없었다. 대학은 꿈도 못 꿨던 어려운 가정형편이 꿈을 차단했다. 인생을 바꾼 건 군 제대 몇 달 전 아버지가 건넨 경찰공무원시험 지원서였다. “네가 제대해도 딱히 집안 사정이 달라질 건 없다. 그러니 살 길을 스스로 찾거라.” 불쑥 놓인 인생의 선택지. 거부할 수도 있었지만 그는 순응했다. ‘그래, 월급을 모아 하고 싶은 공부나 해보자’는 심산이었다.

그렇게 들어선 삶의 길, 28년을 한 눈 팔지 않고 걸었다. ‘국내 프로파일러 1호’란 간판에, 잇단 특진을 거쳐 국가의 훈장(옥조근정훈장)까지 달게 될 줄 그때는 몰랐다. 2000년 작고한 아버지는 아들이 포털 검색창에 이름만 쳐도 화려한 경력과 기사들이 줄줄이 뜨는 인물이 된 걸 보지 못했다. 부친을 묻은 지 17년 만에 아들은 아버지 앞에 가 눈물을 쏟았다. 돌이켜보니 삶의 푯대가 된 건 ‘어디서든 필요한 사람이 되라’고 하신 부친의 생전 말씀이었다.

4월 30일, 경찰 옷을 벗은 지 꼭 1년이 되는 날, 권일용 전 경정을 만났다. 국내 프로파일러의 대표 명사인 그는, 정년퇴직이 아닌 명예퇴직을 했다. 지금껏 인생의 중요한 길목마다 자신의 선택이 아닌 주어진 길을 걸어왔을 뿐이란 그가 어쩌면 자신의 의지로 행한 첫 결단이었다. 1년 365일 중 3분의 1이 ‘출장 중’인 보따리 인생, 17년 간 분석한 흉악 범죄만 1,000여건인 그의 삶에 여유란 없었다. 그랬던 그가 혀 끝에 닿는 아메리카노의 맛에 반응하고, 벚꽃 그늘 아래서 읽는 책 한 권에 세상을 얻은 듯 행복하다. “‘아, 이렇게 아무 생각 없이 있는 시간에 진정 내가 살아있다는 걸 느낄 수 있구나’라는 생각을 태어나서 처음 해봤어요.”

석 달 간 아내까지 설득해 퇴직하고 나서 얻은 그 행복. 그건 어쩌면 보통 사람은 상상할 수 없는 극한의 치열한 삶이 있었기에 가능한 게 아닐까.

경찰 퇴직 후 권일용 전 경정은 동국대 경찰사법대학원 등 대학에서 객원·겸임 교수로 강의를 하며 지내고 있다. 김주성 기자

-퇴직한 지 딱 1년이 되는 날이네요. 요즘 어떻게 지내세요?

“대학원에서 강의를 하며 지내요. 사건 생각은 안 하면서 살고 싶은데… (웃음) TV 시사 프로그램에서 요청이 오면 거절 할 수 없으니, 의뢰해오는 사건 분석도 하고요. 작년 4월 30일이 행정상 퇴직 처리가 된 날이에요. 명예퇴직 신청서를 냈는데 위에서 결재를 안 해주더라고요. 모두 ‘다시 생각해보라’고 잡았죠. 감사한 일이지만, 마음을 바꿀 순 없었어요.”

-왜 명예퇴직을 택하신 건가요?

“하기 싫어서요. 하하. 퇴직할 때는 후배 양성도 하고 좀더 자유롭게 쉬면서 이 일을 하고 싶다고 말했는데, 본심은 너무 지쳐서 하고 싶지가 않았어요. 이렇게 살다가는 죽을 것 같더라고요.”

-굉장히 고단한 일이지요.

“범죄자를 한, 두 명 만난 것도 아니고 1, 2년 이 일을 한 것도 아니니 스트레스가 엄청나게 누적된 느낌이었어요. 프로파일러는 범죄자와 몇 시간씩 목적을 갖고 얘기를 하고 분석을 해요. 그 일이 힘든 가장 큰 이유는 범죄자를 만나기 전 그가 저지른 범죄현장을 보고 와야 하는 것이죠. 그런 현장을 만든 인간과 대화를 나누고 미친 듯이 분석하고, 쉴 틈 없이 또 다른 현장에 가고 범죄자를 만나고…. 내 어딘가에 계속 나쁜 기운이 쌓이는 것 같더라고요. 오죽하면 (스트레스로) 어금니 두 개가 빠졌겠어요.”

-잔혹 범죄를 간접 경험하고 또 그 범죄를 저지른 피의자의 심연에 들어갔다 나오니 경찰 프로파일러도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가 있을 텐데, 치유 프로그램이 있나요?

“없죠. (프로파일러뿐 아니라) 모든 경찰이 그래요. 프로파일러는 대부분 심리학 전공자들이기 때문에 스스로 극복해나가는 수밖에 없죠. 2012년 말에 이대로는 도저히 안되겠으니 다른 부서에 갔다 오고 싶다고 강력하게 요청했어요. 그래서 2013년 초 경찰수사연수원 교수로 발령이 났죠. 연수원에 있는 동안 강의는 많았지만 모든 것에서 해방되는 느낌이었어요. 지상낙원이더라고요. 수업이 끝나면 나를 찾는 사람이 없다는 게 그렇게 좋았어요. 그 때 공부도 많이 했고요.”

연수원에서 2년을 보낸 뒤 그는 2015년 다시 경찰청 과학수사센터 범죄행동분석팀장으로 복귀했다.

-업무 강도가 대체 어느 정도였나요?

“그만 둔다고 했더니, (선배가) ‘경찰 생활 하루, 이틀 한 것도 아닌데 그걸 못 견디느냐’고 하더라고요. (웃음) 그래서 제가 그랬죠. ‘이렇게 지내다가는 몇 년 후에는 더 대책 없이 망가질 것 같다’고, ‘한번 생각해 보라’고요. 보통 형사 30년 해도 살인사건 20건 넘게 맡기 쉽지 않아요. 저는 28년 간 1,000건을 다뤘어요. 따져보니 1년 365일 중 100일이 출장이었더라고요. (중대사건의) 수사본부에 한번 파견 가면 일주일은 있으니…. 그걸로 끝나나요? 전남경찰청 가 있다가 끝나면 이제는 충북경찰청 (소관) 사건 수사본부로 가고 하는 식이었죠.”

-프로파일러 업무는 어떻게 하게 된 건가요?

“2000년 2월 경찰이 처음으로 범죄분석팀을 만들면서 발령이 났어요. 그 전에 1993년 서울 광진경찰서(당시 동부경찰서)에서 과학수사(CSI)를 맡았던 게 계기가 됐죠. CSI도 제가 원해서 한 건 아니었어요. 그냥 위에서 ‘너 이거 한번 해봐라’ 해서 하게 된 거죠. 당시 과학수사팀에 (현장) 감식 담당이 1명씩 있었어요. 감식 교육도 없고, 체계적인 시스템이 갖춰져 있지도 않았고, 그러니 감식도 제대로 하지 못했을 때죠. 그래서 보통 다른 업무와 함께 맡겼어요. 저한테 ‘네가 감식도 겸무해라’ 해서 하게 됐는데, 몇 달 뒤 서울경찰청에서 감식 교육 과정을 처음 만들었어요. 2주쯤 교육을 받고 와서 절도사건 현장에 나갔는데 지문이 나오는 거예요. 당시에 현장 나가서 지문 채취가 가능한 경찰서가 서울에 딱 3군데였어요. 게다가 현장에 가도 지문을 찾기가 쉽지 않은 시절이었죠. 그런데 저는 지문을 잘 찾아내니까, 선배들이 ‘타고 났다’고 놀리곤 했어요. 지금이야 지문자동검색기가 있지만, 그 시절에는 채취한 지문을 본청(경찰청)에 보내면 행정관들이 수기로 찾아야 했거든요. 본청 행정관들이 ‘일용아, 그만 좀 보내라!’하면서 즐거운 비명을 질렀죠. 참 신나게 일했어요.”

-지문을 찾기가 쉽지 않은 일이었나 보죠?

“나중에 프로파일러 업무를 하면서 일맥상통한다는 걸 알았는데, 결국은 범죄자의 행동 심리를 이해해야 하거든요. 무턱대고 분말을 뿌리면 (범인이 낀) 장갑 자국만 나오기 마련이죠. 이를테면, 한여름에 강도가 들었다고 쳐요. 목격자는 범인이 장갑을 낀 채 칼을 들고 있었다고 해요. 그런데 그 집 칼은 아니래요. 그럼 범인이 가져온 거죠. 현장에서 칼은 발견되지 않았어요. 그러면 (집안은 감식할 필요 없이) 집 밖으로 나가야 해요. 가방도 없이 칼을 옮기려면 신문지나 두꺼운 종이에 둘둘 말아서 이동했을 가능성이 커요. 그럼 집 주변에서 말려있는 종이뭉치를 찾아내서 지문을 채취하는 거죠.”

-범인의 행동심리를 파악해야 하는 거군요.

“그렇죠. 그때 현장을 다니다 보니까,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어, 이거 한달 전 봤던 사건하고 행동이 비슷한데 동일범이거나 성격이 비슷한 놈인가 보다. 그렇다면 지문을 찾지 못해도 현장에서 파악된 행동 패턴 만으로도 용의자를 추정할 수 있지 않을까?’”

권일용 전 경정. 꿈이 없던 그에게 부친이 내민 경찰공무원시험 원서가 인생을 바꿔 놓았다. 김주성 기자

과학수사로 현장 냄새를 맡아가던 그를 프로파일러로 발굴한 게 윤외출 경무관(현 워싱턴 주재관)이다. “앞으로는 범죄 수사 방향이 바뀔 거야. 범죄 심리 분석 해보는 게 어떻겠나?” 당시에는 ‘프로파일러’라는 말도 생소할 때다. “공부 해 본 적도 없는 분야인데 제가 할 수 있겠습니까?” 불안해하는 그를, 윤 경무관은 “어쨌든 관심은 있지?”라는 말과 함께 서울경찰청 과학수사계에 신설한 범죄분석팀으로 데려간다. “프로파일링이란 일도 자네가 만들어야 한다”는 중압감도 덤으로 주면서. 2000년 2월의 일이다.

“발령이 나고도 한 달쯤은 그냥 앉아만 있었어요. 경찰 내에서도 프로파일러가 뭘 하는 사람인지 모르니 일 시키는 사람도 없고요. 우울증이 올 거 같더라고요. 하하. 내가 이거 뭐하고 있나 자괴감이 드는 거죠. ‘이래선 안되겠다’ 싶어서 검거된 범죄자들을 만나고 다니기 시작했어요. 당직보고서를 보면서 강도나 성범죄 피의자가 잡히면 수사팀에 요청해서 면담을 한 거죠. ‘어떻게 살았느냐, 왜 그 집에 들어갔느냐, 하필이면 현장에서 이 물건을 왜 이렇게 옮겨놨느냐’ 하는 것들을 물었어요. 현장 감식 경험이 큰 도움이 됐죠.”

그때부터 그는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해가기 시작했다. 자료를 찾아보니 미국 연방수사국(FBI)이 만든 범죄분류매뉴얼(CCM)이 있었지만, 큰 도움이 되진 않았다. 총기 소지가 가능한 미국에선 대개 범행 도구가 총이었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으니까. 하는 수 없이 당시 서울경찰청 과학수사계에서 1960년대부터 살인사건의 기록을 집약해놓은 파일을 참조해 주요한 현장 변인 300개를 추려냈다. 범행 장소, 범행 도구, 피해자 나이, 피해 부위, 범행 후 처리 방법 같은 범죄의 변인들을 유형화한 것이다.

“그 다음부터는 그 변인 목록을 들고 가서 그걸 토대로 범죄자들한테 묻기 시작했어요. 그렇게 면담한 범죄자가 100명, 200명이 넘어가니까 나도 모르게 ‘이 자는 현장에 가서 이걸 이렇게 옮겼을 거야’ 하는 게 떠오르더라고요. 제가 영민한 분석 능력을 타고 나서가 아니라 그 만큼의 범죄자를 면담해보니 가능하게 된 거죠. 현장에 가면, 내가 범인이 돼 그의 눈으로 현장을 다시 봤어요.”

프로파일링 역시 현장에서 나오는 거였다. 범죄자의 심리를 분석하는 게 아니라 범죄자의 행동을 분석해 범죄 사건을 재구성해야 가능한 일이란 얘기다. 그는 범행 준비 단계부터 범행 후까지 범죄 유형 별로 변인을 모은 일종의 ‘범죄의 규칙’을 축적하기 시작했다. 그가 만들기 시작한 범죄현장 분석 변인 데이터베이스는 경찰의 범죄분류체계 프로그램인 스카스(SCASㆍScientific Crime Analysis System)로 진화했다.

-달리 ‘프로파일러 1호’라고 하는 게 아니군요.

“당시 저를 끌어다 놓은 윤외출 경무관이 나중에 우스갯말로 그러더라고요. ‘한 1, 2년 하다가 못 버티고 도망갈 줄 알았는데 잘 있어줘서 고맙다’고. 하하. 프로파일링을 하면서 대학에 가서 심리학 공부를 하고 대학원에 진학해 석사, 박사까지 했죠. 공부가 그렇게 재미있더라고요. 이론을 배울 때 ‘아 그래서 그 놈이 그랬구나’ 하는 현장이 파노라마처럼 머릿속을 지나니, 얼마나 재미있었겠어요!”

-잔혹 범죄자의 심리를 들여다 보는 건 어떤 일인가요?

“이를 테면 정남규(2004년부터 2년간 13명을 살해한 연쇄살인범)는 피해자들을 모두 돌려 세워서 범행을 저질렀어요. 등 뒤에서 해치고 도망가는 게 통상의 패턴인데 말이죠. 생존자의 진술을 들어보니, 얼굴에 미소를 지으면서 계속 찔렀다고 한 걸로 봐서 ‘이 놈은 피해자가 고통스러워 하는 장면을 보는 데서 자존감을 느끼는 구나’ 하는 걸 짐작했죠. 실제 잡고 보니, 그런 진술을 했어요. 이런 얘기를 듣고 현장에 가서 범인의 행동 심리를 분석하는 게 어떻겠어요? 결국은 다 나에게 상처가 되는 거죠.”

그가 언론 인터뷰에서 나이 같은 신상 정보 밝히기를 꺼리는 것도 실은 이 정남규 때문이다. 정남규의 거주지를 압수수색 했을 때 권 전 경정의 인터뷰 기사를 스크랩 해놓은 자료를 발견해서다. 혹시라도 범죄자들이 자신의 인적 정보를 이용해 가족까지 추적할까 우려해 그때부터 최소한의 ‘보안’을 지키고 있다.

말을 이어가던 그는 “이제는 범죄자의 마음이 아니라 ‘나의 자아’로 살고 싶다”고 했다. 그 한마디에서 그간 삶의 황폐가 어렴풋이 짐작됐다.

잔혹한 범죄자도, 현장도, 프로파일링도 모두 내려놓은 권일용 전 경정. 그는 자신의 눈으로 삶을 바라보고 싶다고 했다. 김주성 기자

-프로파일러의 삶과 지금의 삶, 뭐가 달라졌나요?

“주위에서는 ‘얼굴이 좋아졌다, 표정이 달라졌다, 미소가 많아졌다’고 해요. 그럴 수밖에요. 정말 달라진 건 가족과의 관계예요. 그 전에도 사이가 나쁘거나 소원하지는 않았는데 대면할 시간 자체가 별로 없었거든요. 대화도 잘 되지 않았죠. 저녁 먹으면서 ‘오늘 학교에서 뭐했니’, ‘중간고사 봤어요’ 하고는 그 다음엔 할 말이 없는 거죠. 서로 공유하는 공통분모가 없으니까요. 지금은 하다못해 손 잡고 시장에 가서 순댓국에 막걸리 한 잔을 해도 얘기가 끊기지 않아요. 아빠가 피곤해 할까 봐 못했던 ‘우리 어디 함께 가봐요’ 하는 말도 잘 하고요.”

-어렸을 때 경찰이 꿈이었나요?

“저는 꿈이 없었어요. 생각해보면 그저 주어지고, 요구되는 역할을 하다 보니 삶이 됐어요. 대학에 갈 형편이 못 됐으니, 무슨 꿈을 꿀 수 있었겠어요. 저에게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나 마찬가지였어요. 군대나 가자 싶어서 입대를 했고 제대 얼마 전 아버지가 경찰공무원시험 원서를 갖다 주셨어요. 그리곤 합격을 해서 경찰학교에 들어갔죠. 1등을 하나 꼴등을 하나 똑같은 순경이니까 열심히 놀았죠. 하하.”

-아버지가 갖다 주신 원서가 ‘프로파일러 1호’ 권일용을 만든 거네요.

“그러게요. 아버지가 제 적성에 경찰이 맞다고 생각해서 갖다 주신 건지는 알 수가 없어요. 아버지는 2000년 돌아가셨어요.”

-그럼 프로파일러로 활약한 건 보지 못하셨나요?

“그렇죠. 작년에 퇴직하고 나서 다음날 집사람하고 아버지 산소에 갔어요. 왜 그렇게 눈물이 철철 나던지. 아내도 그렇게 우는 건 처음 본다고 하더라고요. 그 때 1시간 동안 속으로 아버지한테 하고 싶은 말 다 했지요.”

-그렇게 고단한 프로파일러를 17년이나 하게 만든 동력은 뭔가요?

“피해자죠. 현장에서 본 피해자의 모습은 잊히지 않아요. 경찰 제복을 입은 내가 가진 능력, 내가 했던 경험을 모두 동원해서라도 잡고 싶은 욕구가 동력이었어요. 제복은 곧 약속이거든요. 꼭 범인을 잡아달라는 고인의 말없는 요청에 대한 약속. 사실 범죄자들 보다 고인이 된 피해자들이 더 많이 생각이 나요. 일선에 있을 때 행복은 그 분들과의 약속을 지켰을 때였죠.”

-지금은 어떤 때 행복한가요?

“수업 끝나고 경찰 선, 후배나 친구들과 족발에 술 한 잔 하고 집에 들어가는 것, 그렇게 들어가면서 ‘내일은 오전 일정이 없으니 늦잠을 잘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에 즐거운 것! 요즘도 수업 시간 보다 일찍 (캠퍼스에) 와서 나무 아래 벤치에 커피 한 잔 놓고 책을 읽고 있으면 내가 살아 있는 것 같아요. 뭘 분석 하거나 현장에 가거나 하지 않아도, 심지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어도 나는 살아 있구나 싶은 거죠.”

-평생 프로파일러로 산 권일용의 삶의 길, 삶의 도는 뭔가요?

“지금까지 특별히 제가 선택해서 여기까지 온 게 아니었어요. 인생을 너무 막 사나, 싶을 정도로. 아버지께 받은 교훈이 이거예요. ‘어디서 뭘 하든 필요한 사람이 돼라.’ 돌이켜보니까 저는 무슨 사회적 성취를 바란 게 아니라, 어느 현장, 어느 조직에 있든지 늘 필요한 사람이 되려고 그저 노력해왔어요. 그게 제 삶의 시작이고 끝인 거죠. 제 앞에 붙은 수식어들은 제겐 중요한 게 아니에요.”

그의 부친은 의학 연구에 시신을 기증해 마지막까지 생전의 가르침을 실천하고 가셨다.

그는 “그간 쉼표 없이 삶의 문장을 이어가다 보니 숨이 벅차 내 삶인데도 잘 읽지 못했다”고 했다. 지금 그러니까 그는, 자신의 삶을 찬찬히 정독하며 처음으로 생을 음미하고 있는 것이다.

김지은 기자 luna@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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