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종 수강생들에게 “X에 대해 비판하시오”라는 문제를 내곤 한다. 그러면 거의 모든 학생들이 X의 나쁜 점이나 부족한 점을 중심으로 답안을 작성해 제출한다. 비판과 비난을 동일시한 까닭에 벌어진 양상이다.

비판(批判)은 비난과 사뭇 다르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비판은 ‘현상이나 사물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여 밝히거나 잘못된 점을 지적하는’ 활동을 가리킨다. 일반적으로 판단은 논리를 기반으로 한다. 잘된 점은 그것대로, 잘못된 점도 그것대로, 그렇게 된 이유를 논리적으로 분석하는 활동이 비판이라는 것이다. 이에 비해 비난(非難)은 ‘잘못이나 결점을 책잡아서 나쁘게 말함’을 뜻한다. 하여 합당한 근거를 갖추지 못한 비판은 결과적으로, 잘못이나 결점이 없음에도 일부러 책잡아서 나쁘게 말하는 비난이 되고 만다.

그래서 제대로 수행된 비판은 건설적이게 마련이다. 객관적 근거를 기반으로 잘못이나 결점을 드러냈기에 기분이 상하더라도 인정할 수밖에 없다. 혼자라면 몰라도 남과 함께 일을 한다거나, 특히 공적 업무를 수행하는 경우라면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된다. 반면 비난은 하는 이나 듣는 이 모두에게 손해만 되고 말 여지가 크다. 잘못이나 결점이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일부러 나쁘게 말하든 있는 그대로 말하든 결과적으로 듣는 이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있지도 않은 잘못이나 결점을 고의로 책잡아서 나쁘게 말하면, 말하는 이는 거짓말쟁이가 되고 듣는 이는 억울하게 시달리게 된다. 우리에게 비난이 아니라 비판이 필요한 이유다.

비판이 되지 못한 비난, 그러니까 ‘삿된 비난’은 다 같이 망하는 ‘공멸(共滅)’적 결과를 야기한다. 비판은, 그것이 행해짐으로써 하는 이나 듣는 이 모두에게 이전보다 나은 결과를 선사한다. 그래서 제대로 수행된 비판은 늘 생산적이다. 이에 비해 삿된 비난은, 그것이 행해짐으로 인해 하는 이와 듣는 이 모두에게 부정적 결과를 야기한다. 그렇기에 누군가가 삿된 비난을 함으로써 이득을 봤다면 그는 틀림없는 사기꾼이다. 삿된 행위를 함으로써 이익을 얻었으니 사기꾼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삿된 비난에 동조하는 이 또한 마찬가지다. 아니, 그 처지가 더욱 딱하다. 사기꾼이야 사기를 침으로써 정당치 못한 이득이라도 본다. 그런데 사기꾼에 동조한 이들에게는 대체 어떤 이득이 실질적으로 있을까? 물론 비난 대상이, 안 그래도 주는 것 없이 밉고 존재 자체로 한없이 꼴 보기 싫은 이들이었다면, 사기꾼의 삿된 비난이 통쾌함을 안겨줄 수도 있다. 감정적, 심리적 차원에서는 이득을 볼 수도 있다는 얘기다. 문제는 그것을 이익이라고 여기는 만큼 사기꾼이 더욱 더 판치게 된다는 점이다. 삶터에서 사기꾼이, 그들이 우리 삶에 미치는 영향이 사라지기는커녕 줄어들지조차 않는다는 것이다.

게다가 사기꾼이 활개 칠수록 서로 다른 이들이 모여 한결 나은 미래를 만들어가는 일은 더욱 어려워진다. 혼자 사는 것이 아니라 사회를 일구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한, 우리는 나와 다른 이들과 더불어 살아갈 수밖에 없다. 원수처럼 지내던 상대일지라도 모두에게 더 나은 결과를 빚어낼 수 있다면 협력해야 할 때도 있다. 지금 당장 나에게 이득이 되지 않는다고 해도 장차 후손에게 도움이 된다면, 내키지 않아도 손을 맞잡을 수도 있어야 한다. 개인적 이해관계를 떠나 모두에게 더 나은 미래를 더불어 만들어갈 줄 알아야 비로소 인간이라 말할 수 있기에 더욱 그러하다.

비판이 건설적인 또 하나의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비판은 못돼도 하는 이와 듣는 이 모두의 인격적, 지적 성장을 견인할 수 있다. 또한 합당한 근거에 입각하여 잘잘못을 따지고 장단점을 가림으로써 잘된 바를 더욱 증진케 하고 못된 바를 바로잡는 합리적 방안을 도출해내기도 한다. 한마디로 비판에는 성장과 비전이 서려 있다. 비판은 더 나은 미래의 실현을 향해 있다는 것이다. 반면에 삿된 비난은 철저하게 과거 지향적이다. 더 나은 미래를 위한 성장과 비전이 깃들어야 할 자리에는 삿된 욕심과 술수만이 그득하다. 삿된 비난 곁에 주로 불신과 증오가 때론 폭력이 함께하는 이유다. 그래야 삿된 욕심과 술수가 가려질 수 있기 때문이다.

진보와 보수, 수구는 여기에서 판연하게 구분된다. 더 나은 미래의 내용, 그것을 주조하는 방식과 속도 등에서 적잖은 차이가 나지만, 진보와 보수는 어찌됐든 비전과 성장을 품고 있다. 반면 수구에게는 비전도, 성장도 없다. 그저 과거로부터 누려온 기득권 수호만 있을 따름이다. 그러니 그들의 말과 행위는 삿된 비난으로 점철될 수밖에 없다. 그렇게 수구는 공멸적이게 된다.

따라서 진보와 보수, 수구는 당사자들이 스스로를 규정한 말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 스스로는 진보니 보수니 하지만 그들이 입과 몸으로 행해지는 바가 삿된 비난이라면, 그들의 정체는 그저 공멸적 수구에 다름없게 된다. 그런 이들이 진보 또는 보수라고 운위되더라도 반드시 수구라고 이해해야만 하는 까닭이다.

김월회 서울대 중어중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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