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티지숍 밀리언 아카이브, 젊은 창작자 플랫폼으로

밀리언 아카이브 정은솔 대표
서울 성수동 창고를 개조해
1970년대 정취 원피스 등
이틀~한달 한정기간 판매
“더 많은 의류판매 원치 않아…
페미니스트로서 여성 돕고싶어”
수천 벌의 원피스 사이에 선 정은솔 대표. 지난해 1월 지인의 가게 한 켠에서 빈티지 의류숍 밀리언 아카이브를 시작해 꼭 1년 만에 서울 성수동 폐공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황수현 기자

맛집 줄도 아니고 아이돌 그룹의 사인회 줄도 아니다. 서울 지하철 2호선 성수역 인근 건물 앞에서 200여명이 줄 서서 기다리는 건 빈티지 원피스다. 철공장을 개조해 만든 빈티지 의류숍이자 여성 창작자들의 플리마켓인 ‘밀리언 아카이브’는 지금 서울에서 제일 ‘핫’하다는 성수동에서도 가장 뜨겁다.

“문 열기 전부터 약 200명 정도 대기줄이 생겨요. 한 번에 다 들어올 수 없으니까 70명 단위로 팀을 짜 대기표를 배부해요. 첫 팀이 50분 간 옷을 보고 그 동안 두 번째, 세 번째 팀은 근처 카페에 가서 쉬고 계시면 돼요.”

정은솔(31) 밀리언 아카이브 대표의 말이다. 빈티지 의류를 구하는 건 요즘 어려운 일이 아니다. 포털 사이트에 등록된 빈티지 쇼핑몰만 수만 개다. 물론 밀리언 아카이브에서 취급하는 건 단순 중고 의류가 아니다. 1970~80년대 정취를 그대로 간직한 미국, 유럽, 일본의 빈티지 의류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밀리언 아카이브를 향한 이상열기를 설명할 순 없다. 밀리언 아카이브는 어떻게 이 많은 사람을 줄 세우는 곳이 됐을까.

. 이달 열린 빈티지 의류숍 ‘원피스숍’에 줄을 선 사람들. 매일 문을 열려다가 사람들이 너무 몰려 금요일과 토요일 운영으로 변경했다. 밀리언 아카이브 제공

국민대 시각디자인과를 나와 그래픽 디자이너로 일하고 있는 정 대표는 스무 살 때부터 서울 삼청동 길거리에서 ‘옛날 옷’을 판 “10년차 빈티지 셀러”다. “어릴 때 엄마 사진을 보면서 빈티지가 너무 예쁘다고 생각했어요. 물론 길거리로 나온 건 돈을 벌기 위해서였지만요.” 집의 원조를 기대할 수 없어 온갖 ‘알바’를 전전하던 그는 이왕이면 좋아하는 일을 하자 싶어 빈티지 의류를 팔기 시작했다. 삼청동, 온라인, 영국에서까지 빈티지 옷을 팔던 그가 밀리언 아카이브를 시작한 때는 지난해 1월. 창작집단 ‘스튜디오 워크스’가 이태원의 공간 한 켠을 빌려 주면서다. “‘스웨터숍’이란 이름으로 스웨터 하나만 팔았는데 그게 재미있었는지 누가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후기를 올렸어요. 이후 찾는 사람이 늘어 여기서 모은 돈으로 성수동의 작은 창고건물로 들어갔죠.”

밀리언 아카이브는 단 하나의 품목을 한정된 기간 동안 판매한다. 지난해 내내 스웨터숍, 원피스숍, (하와이안 셔츠만 파는) 하와이안숍을 계절별로 열었다. 기간은 길게는 한 달에서 짧게는 단 이틀. 정 대표 혼자 매입부터 판매까지 다 하느라 기간을 짧게 잡은 것이지만, ‘긴박한’ 일정은 빈티지 마니아가 아니라도 괜스레 엉덩이를 들썩거리게 했다. 이외에도 빈티지 의류를 ㎏ 단위로 파는 ‘킬로그램 마켓’, 빈티지 안경테를 모은 ‘할아버지 안경테’ 기획전, 모녀 손님이 옷을 사면 스카프를 증정하는 ‘모녀 찬스’ 등 깨알 같은 기획은 밀리언 아카이브의 힘이다.

지난해 12월 진행한 크리스마스 스웨터숍. 촌스러운 스웨터를 입고 모이는 ‘어글리 스웨터 데이’에서 착안한 아이디어로 큰 호응을 얻었다. 밀리언 아카이브 제공

가장 크게 히트를 친 건 지난해 12월 열린 크리스마스 스웨터숍. 정 대표는 그냥 스웨터가 아닌 빈티지 ‘어글리 스웨터’를 모아 팔았다. 크리스마스 즈음 저마다 가장 촌스러운 스웨터를 입고 모이는 서구의 ‘어글리 스웨터 데이’에서 아이디어를 가져온 것으로,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못생긴 스웨터를 사려는 사람들이 몰려 3시간 대기는 기본에, 스웨터를 입은 모습을 촬영해 엽서로 만들어주는 이벤트까지 대성황을 이뤘다. 여기서 축적한 자본으로 밀리언 아카이브는 올 1월 과거 제철공장이었던 현재의 공간으로 자리를 옮겼다.

남의 가게 한 켠에서 40여평짜리 자기 공간을 갖기까지 꼭 1년. 그의 목표는 더 많은 빈티지 의류를 파는 게 아니다. “제 목표는 처음부터 공간이었어요. 저와 비슷한 감성을 가진 사람들을 만나 함께 재미있는 일을 만들어가는 거예요. 페미니스트로서 특히 여성 창작자들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어요.”

원피스숍에서 판매한 의류들. 단순한 중고의류가 아니라 1970,80년대의 재봉, 패턴, 분위기가 담겨 있는 옷들을 엄선해 선보인다. 밀리언 아카이브 제공
4월 21일 열린 여성 창작자 마켓에 나온 콜렉토그래프의 작품들. 한 달에 한 번 여성 창작자들에게 무료로 공간을 내줘 작품을 판매할 수 있게 하고 있다. 밀리언 아카이브 제공

지난 21일 열린 여성 창작자 마켓은 그 일환이다. 일러스트레이터, 산업디자이너 등 젊은 여성작가 8팀이 밀리언 아카이브에서 자신의 작품을 전시하고 판매했다. 수수료도, 공간 사용료도 없다. 참여 작가는 정 대표가 직접 모았다. SNS에 인상적인 작품을 올리는 작가에게 연락하기도 하고, 빈티지 마켓에 손님으로 온 사람에게 접근해 “선생님, 뭐 만드세요?” 물어 인연을 만들기도 했다.

“빈티지 좋아하는 사람들은 대개 감성이 비슷하거든요. 저는 향수병자들이라고 불러요. 유니클로를 유니폼처럼 입는 시대지만 지난 세기의 분위기, 디자인, 공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이런 일을 하는 이유는 뭘까. 정 대표는 “나보다 능력 있는 사람들이 돈 없고 힘 없이 사는 게 싫다”고 한다. “젊은 작가들이 여기서 돈을 벌어갔으면 좋겠어요. 저는 더 많은 사람을 불러들이기 위해 재미있는 기획을 하고요. 빈티지 마켓만으로 계속 사람들이 줄을 서진 않겠죠. 다음엔 어떤 걸 할까 궁리할 때가 제일 행복해요.”

황수현 기자 soo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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