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부터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 조현민 전 대한항공 전무, 정우현 전 MP 그룹 회장. 한국일보 자료사진.
‘땅콩 부사장’ 이전에 ‘라면상무’가 있었다

‘땅콩의 품격’에 앞서 ‘라면의 품격’을 논했던 선구자가 있었다. 본명보다 ‘라면상무’라는 별칭으로 더 널리 알려진 그는 미국 연방수사국(FBI)이 인지할 정도로 ‘갑질 공화국’의 위상을 떨친 바 있다. 포스코에너지의 전 상무이사 왕모(68)씨다. 2013년 4월 15일 LA행 대한항공 A380기, 비즈니스석 승객이었던 그는 기내 주방인 갤리로 난입해 들고 있던 잡지의 모서리로 승무원의 눈두덩이를 내리찍었다. ‘라면이 짜다’는 이유였다. 갖가지 트집을 잡으며 그가 받아낸 세 번째 라면엔 스프가 고작 반만 들어가 있었다. 미국 땅에서 그를 맞이한 건 다름 아닌 FBI. “기내 승무원 폭행은 테러행위다. 구속 수사를 받든 지 여기서 당장 귀국하라.” 울며 겨자 먹기로 되돌아온 그는 머잖아 한국 갑질의 아이콘이 됐다.

얼마 지나지 않아 대한항공 사내 게시판엔 직원들의 안위를 사려 깊게 걱정하는 한 임원의 글이 올라왔다. “승무원이 겪었을 당혹감과 수치심이 얼마나 컸을지 안타깝습니다. 기내 폭행은 절대 있어서는 안 된다는 사회적 계몽 효과를 보았습니다.” 글쓴이는 놀랍게도 우리 모두가 잘 아는 바로 그 사람, ‘땅콩 회항’ 사건의 장본인인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이었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난 2014년 12월 1일, 그는 같은 비행기 안에서 같은 방법으로 사무장의 손등을 내리찍었다. 라면상무 사건도, 자신의 글도 까맣게 잊은 듯이 말이다.

햇수로 4년이 흐른 지금, 대한항공을 무대로 한 ‘갑질의 역사’는 시즌제 드라마를 연상케 한다. 이번엔 그룹 전체가 휘청거릴 위기에 처했다. (관련기사☞ 대물림된 군림 본능, 재벌가 갑질 부른다) 비단 대한항공만일까. 종근당, 미스터피자, 대림산업… 당장 머리를 스치는 ‘갑질’ 오너들의 스캔들만 헤아려도 열 손가락이 모자란다. 야구방망이로 두들겨 팬 뒤 ‘맷값’을 던져준 재벌 2세부터, 수행기사에게 140장에 달하는 ‘노예 매뉴얼’을 내린 황제 사장까지 지난 몇 년간 갑질로 국민의 공분을 샀던 ‘문제적 회장님들’을 되돌아본다.

왼쪽은 맷값 폭행으로 물의를 빚었던 최철원 전 M&M 대표가 2010년 당시 경찰 조사를 받기 위해 서울지방경찰청 폭력계에 출두하는 모습. 오른쪽은 최철원 전 대표를 모델로 만들어진 영화 <베테랑>의 조태오 캐릭터. 한국일보 자료사진, CJ 엔터테인먼트 제공.
‘어이가 없네’ 1,400만 관객 영화의 모티브 ‘맷값 2,000만원’

“엎드려, 한 대에 100만 원이다.”

영화보다 더 영화 같았던 이 사건은 실제로 영화가 됐다. 2015년 여름 1,400만 관객을 불러모았던 영화 <베테랑> 속 재벌 3세 조태오(유아인 役)의 모델은 최태원 SK그룹 회장의 사촌동생 최철원 당시 M&M 대표다. 영화 속에서 택배기사 배씨(정웅인 役)가 본사의 횡포에 항의하기 위해 직접 회사를 찾았다가 오너 조태오에게 구타를 당하는 설정은 ‘야구방망이 맷값 폭행’ 사건을 그대로 따왔다.

2010년 10월 18일 서울 용산의 SK 본사 앞에서 1인 시위를 하고 있던 50대 화물기사 유모씨는 누군가의 부름을 받았다. 오너였던 최철원 대표였다. 그는 넌지시 유씨를 자신의 사무실로 불러 올렸다. 당시 유씨는 다니던 회사가 M&M으로 인수ㆍ합병되면서 고용승계가 안 되는 바람에 1년 이상 벌이가 없던 상황. 그가 예상했던 것은 ‘협상’이었지만 사무실에 들어서자 황당한 명령이 떨어졌다. “엎드려라.” 7~8명의 간부들이 지켜보는 자리였다. 난데없이 야구방망이가 등장했다. 상황 파악도 전에 내리 10대를 맞았다. “살려주세요. 용서해주세요.” 유씨가 몸부림을 치며 무너졌다. “어? 피해? 지금부터 한 대에 300” 최 대표는 하늘 높이 치켜든 방망이를 있는 힘껏 떨어뜨렸다. 석 대를 더 맞고도 끝나지 않았다. 주먹이 얼굴을 향했다. 쓰러진 유씨의 몸 위로 수표가 떨어졌다. ‘맷값’ 2,000만 원이었다. 사과를 요구한 유씨에게 기업 임원들은 답했다. “이 자식이 이거 형편없는 새X 아니야. 내가 볼 땐 2,000만 원어치도 안 맞았는데.” 그 오너 아래 그 임원들이었다.

그의 사무실에서 두 동강 난 골프채가 나올 때마다 ‘초주검’ 상태가 된 직원들이 다리를 절며 따라 나왔다. 조폭 영화에서나 볼 법한 삽자루와 각목도 예사로 등장했다. 때론 사냥개 무리를 몰고 출근했다. 모두가 멀찍이 서서 벌벌 떨었다. 그 폭력적 남성성을 과시라도 하듯 그 해 12월 서울지방경찰청의 소환을 받고 출두한 그의 모습에선 흔히 등장하는 휠체어도 마스크도 찾아볼 수 없었다. 위풍당당 그 자체. 고개를 빳빳이 쳐든 그는 법정에서 이렇게 말했다. “군대에서 하듯 ‘빠따’로 훈육한 것이다.” 피해자는 최씨의 ‘삼촌뻘’(11살 차이)이었다. 1심에서 ‘폭력행위등처벌에관한법률’ 위반 혐의로 1년 6개월 실형을 선고받았지만 2심에서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이 사건을 담당했던 박철 서울중앙지검 부장검사는 최씨가 집행유예로 풀려나자마자 돌연 사표를 냈다. 그리고 이듬해 SK그룹에 전무로 입사했다. 직무는 ‘윤리경영’. ‘유전무죄, 무전유죄’가 여실히 입증되는 순간이었다.

지난 8년간 발생한 재벌가의 주요 갑질 사건 타임라인. 박지윤 기자
“회장님 운전기사는 목숨도 걸어야 하나요?”

VVIP의 운전기사는 ‘상시 모집’이었다. 운전석은 예고 없이 공석이 됐다. 2015년 당시 그의 고급 세단을 거쳐간 운전사만 1년 새 무려 40명. 최소 열흘에 한 번씩은 새로운 기사가 온 셈이었다. 재벌 3세인 이해욱 전 대림산업 부회장의 이야기다. ‘백미러를 접고 운전하라’는 터무니없는 명령에 목숨이 위험했던 적도 수 차례, 극도의 긴장 상태 속에서 작은 실수라도 할라치면 인간의 입에서 나올 수 있는 최대치의 욕설이 쏟아졌다. “이 컵에 물이 가득 담겨 있는데, 이게 한 방울도 흘러내리면 안 돼. 출발할 때든 멈출 때든.” 운전에 취미가 있는 이 회장이 직접 운전대라도 잡는 날엔 운전기사들은 ‘인간 내비’가 되어야만 했다. 중계 속도가 주행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면 어김없이 폭언이 쏟아졌다. 신경쇠약에 걸린 기사들은 3일씩을 내리 굶었다. 도저히 음식이 넘어가지 않았던 탓이다. 이씨는 기분 내키는 대로 기사를 해고했다. 도로 한 복판에서도 한 마디면 됐다. “너 나가.” 그러나 피해를 입은 수십 명의 운전기사 중 재판까지 간 사람은 1명, 벌금은 겨우 1,500만 원. 이 전 대표는 지난해까지 연봉 20억 원을 받아 갔다.

“A4 140장에 달하는 수행기사 매뉴얼이 따로 있었어요. 모닝콜은 받을 때까지. ‘가자’는 문자가 오면 ‘번개같이’ 뛰어 올라와라. 충전 끝난 휴대전화 배터리를 충전기에서 분리하지 않아서 경위서를 쓰기도 했죠.” 정일선 현대비앤지스틸 대표는 아예 ‘갑질 매뉴얼’을 제작했다. 매뉴얼엔 ‘사장님께서 빨리 가자고 하실 땐 교통법규도 무시할 것’이라는 문구가 붉은 글씨로 강조돼 있다. “급할 땐 갓길을 타고 역주행하기도 했어요. 한 달간 제가 뗀 과태료만 500~600만 원이었죠.” 조금이라도 늦을 때는 머리를 얻어맞았다. “왜 이 길로 왔냐 X신아.” 권투가 취미인 정씨의 주먹질은 눈물이 날 정도로 아팠다. 20~30대씩 연이어 얻어맞을 때는 통증보다 모멸감에 사무쳤다. ‘갑질 매뉴얼’이 2016년 언론에 공개되며 여론의 맹비난을 받았지만, 정씨가 낸 벌금은 고작 300만 원. 그가 한 달에 내는 과태료의 딱 절반 값이었다.

’갑질 논란'에 휩싸인 미스터피자 창업주 정우현 전 MP그룹 회장이 2017년 7월 3일 오전 피의자 신분으로 조사를 받기 위해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검으로 들어서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내가 아직 안 나갔는데 감히 문을 닫아?”

“이 XX, 하면서 느닷없이 주먹이 날아왔죠. 술을 마시고 있었는지 술 냄새가 났어요.”

서울시 서대문구 대신동의 한 대학가 건물, 2016년 4월 3일 그날도 경비원 황모 씨는 늘 하던 대로 밤 10시가 되자 정문을 걸어 잠갔다. 도난 사고가 끊이질 않아 정문은 외부인이 드나들 수 없도록 닫아 놓아야만 했다. 그때였다. 머리가 하얗게 새기 시작한 한 60대 남성이 잔뜩 흥분해 삿대질을 하며 나타났다. “내가 아직 여기 있는데 출입문을 닫아?” 식당 안으로 끌려 들어간 황씨는 그 자리에서 영문도 모른 채 폭행을 당했다. 알고 보니 정우현 전 MP그룹 미스터피자 회장이었다. 그가 술을 곁들인 식사를 한 곳은 건물 1층의 계열사 지점. 자신의 건물도, 미스터피자의 직원도 아니었던 황씨를 단지 ‘자신이 안에 있는 것을 몰랐다’는 이유만으로 때린 것이었다.

언론에 이 사실이 알려지자 정씨는 직접 피해 경비원에게 사과하는 등 급하게 진화에 나섰지만, 갑질의 흔적들은 고구마 줄기 캐듯 주렁주렁 나왔다. 치즈 공급과정에 자신의 동생이 운영하는 회사를 끼워 넣어 비싼 값을 받아냈고, 대리점주들이 식자재 비용을 카드로 계산할 수 있게 해달라 요청하자 “금치산자냐”라는 폭언 공지를 내걸었다. 정 회장의 딸이 고용한 가사도우미 월급은 본사에서 지급하면서 대리점 할인행사 비용은 모두 점주가 떠안아야 했다. “광고비를 매출의 4%씩이나 떼어가는데 정작 우리 광고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고, 지출내역을 알려달라고 해도 모른척하니 길이 없죠.” 본사의 이런 안하무인식 경영은 ‘오너리스크’의 연장선이었다. 매년 100억 원 이상씩 매출이 줄자 손실 규모는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정씨의 외아들인 정순민 전 MP그룹 부회장은 전문경영인의 등장과 함께 물러나면서도 무려 8억 원 대의 퇴직금을 받았다.

박창진 전 대한항공 사무장(왼쪽 두번째)이 25일 서울 강서구 대한항공 본사 앞에서 열린 정의당 정당연설회에서 지켜보던 사측 직원들을 향해 항의하고 있다. 왼쪽부터 이정미 대표, 박 전 사무장, 이홍우 경기도지사 후보, 권수정 서울시의원 비례후보. 연합뉴스
당연하다고 체념하는 순간 괴물을 키운다

“아, 나는 개가 아니었지, 사람이었지.”

4년 전 겨울, 낯선 이국 땅의 황량한 공항에 홀로 쫓겨난 18년 차 승무원은 한 때 ‘하얀 제복, 푸른 비행기’만 봐도 가슴이 뛰었다. 빳빳이 다려진 제복 위에도 늘씬하게 빠진 기체 위에도 같은 마크가 찍혔다. 언제 보아도 자랑스러운 대한항공의 태극문양이었다. 그러나 그날 새벽, 박창진 사무장은 그간 자신이 ‘개’였음을 깨달았다. 당시 서울대 교수였던 조국 청와대 민정수석은 칼럼에 이렇게 썼다. “노동자는 봉급을 위해 노동을 팔 뿐이지, 인격까지 파는 것은 아니다. 회사 밥을 먹는다고 ‘오너’의 ‘개’가 되어야 한다면, 그 회사는 ‘동물농장’이다.” 그러나 대한항공의 전ㆍ현직 승무원들은 “이런 게 뉴스에 나왔다는 게 오히려 의아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오너 일가의 갑질에 무뎌져야만 했던 그들에게 문제의식을 기대하긴 어려웠다.

<개천에서 용 나면 안 된다 : 갑질 공화국의 비밀>(2015)을 저술한 강준만 교수는 ‘갑’이란 어디선가 하루아침에 ‘뚝’하고 떨어진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상식 이하의 각종 갑질이 수년간 끊이지 않은 것만 보아도 갑의 횡포가 단순히 ‘별난 개인의 예외적 일탈’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는 갑들이 눈치 안 보고 마음껏 ‘갑질’할 수 있게 만든 것은 수많은 ‘을’들과 그들을 자발적으로 복종하게 만든 ‘시스템’이라고 설명한다.

'땅콩회항' 피해자인 박창진 전 대한항공 사무장과 정의당 이정미 대표, 김종민 서울시장 후보 등이 25일 서울 강서구 대한항공 본사 앞에서 열린 정의당 정당연설회에서 황제경영 및 갑질경영을 규탄하며 손팻말에 물을 붓는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4년간 숙성된 분노는 배가 됐다. 2014년 당시에는 ‘쉬쉬’하고 묻혔던 대한항공 오너 일가의 횡포가 내부자의 증언으로 속속 드러나고 있다. 조현민 전 전무의 고성과 폭언 녹취를 공개한 직원은 “겁 나지만 박창진 사무장을 보면서 힘을 낸다”고 말했다. 여전히 비행기에 오르고 있는 박 사무장 또한 최근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누구든 용기를 낸다면 그 옆에 서겠다”고 밝혔다. ‘개’가 되기를 거부하고 ‘인간’으로서 존중받을 수 있는 일터를 꿈꾸기 시작한 이들은 더 이상 외로운 내부고발자가 아니다. 강 교수는 ‘땅콩 회항’ 사건을 해석한 글의 말미에 이렇게 밝히고 있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특정인에 대한 분노와 증오를 넘어서 그런 상황을 일상화하는 시스템을 바꾸는 것이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사건은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할 수 있겠다.”

박지윤 기자 luce_jyu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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