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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민석의 성경 ‘속’ 이야기]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빵” 사랑의 실체 강조한 예수

입력
2018.04.28 10:00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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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사도'로 불리는 요한

복음서에서 57번 사랑 언급

홀로 묵상 대신 "서로 사랑하라"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형제자매 궁핌함 외면은 거짓"

성경, 말보다 행동ㆍ진실함 강조

“서로 사랑하라”는 유명한 성구가 적힌 옷을 입은 아기. '서로' 사랑하라는 것은 추상적 사랑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구체적으로 느낄 수 있는 사랑을 하라는 의미다.
“서로 사랑하라”는 유명한 성구가 적힌 옷을 입은 아기. '서로' 사랑하라는 것은 추상적 사랑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구체적으로 느낄 수 있는 사랑을 하라는 의미다.

얼마 전 영국의 왕세손 부부가 아기를 낳았다는 기사를 접했다. 영국 런던의 세인트메리 병원에서 낳았다 하여 옛 기억이 떠올랐다. 나의 첫아들이 태어났던 병원이기 때문이다. 그날의 분만실은 내게 공포 그 자체였다. 의사가 나보고 아기의 탯줄을 자르겠냐고 물었을 때, 나는 매우 명확한 영국식 발음으로 외쳤다. “오우 마이 거~엇, 노우! (Oh, my God. No!)”

간호사가 아기의 손가락과 발가락을 소리 내어 세었다. 나중에 아내가 말하기를 자기는 그때 가슴이 떨렸다고 한다. 혹시 아홉이나 열둘이라는 소리를 들을까봐서. 난 왜 세는지 아무 생각도 없었다. 난 그저 20대 후반의 철없는 아빠였다. 너무 어려서 솔직히 아빠가 된다는 것에 썩 기뻐하지도 않았다. 나와 아버지의 관계를 떠올려 볼 때, 어쩌면 아빠가 되는 것에 자신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간호사가 내게 아기를 처음 건네주었던 순간이 아직도 생생하다. 어떤 아빠들은 감격의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지만, 난 그저 이 조그만 게 뭔가 싶었다. 집에 데려와서도 이게 정말 살아있는 것인지 아닌지 몰라, 자는 아기를 손가락으로 찔러 깨워보기도 했었다. 그러기를 약 한 달쯤 지났을까,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버렸다. 내 아들은 물론, 이 세상의 모든 아기가 다 사랑스럽고 예뻐 보이는 것이 아닌가. 기적이었다.

사랑은 느낄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마음에는 늘 두려움이 있었다. 과연 내가 좋은 아빠가 될 수 있을까? 돌아가시기 전 노년의 아버지는 그렇지 않으셨지만, 젊으셨을 적 아버지는 꼭 집에 오신 손님 같았다. 아버지와 친밀한 시간을 나누었던 기억은 거의 없다. 당연히 날 사랑하셨겠지만, ‘스킨십’이 없었다. 그 아버지의 유전자가 내 세포에도 있기에, 나는 걱정이 많았다.

받은 사랑이 있어야 줄 사랑도 있다고 한다. 아버지와 아들간의 친밀함을 모르니, 나는 의식적으로 더 노력을 해왔다. 다행히 두 아들이 나를 손님처럼 여기지는 않는 것 같다. 반면에 아내는 어려서부터 장인어른과 친밀한 애정을 나누며 자라왔다. 그래서 그런지 자녀를 대하는 아내의 사랑은 아주 자유롭고 자연스럽다.

“사랑은 실체”이어야 한다는 어느 노래 가사가 있다. “Love is real.” 사랑이라는 것이 어느 아름다운 시 구절을 읽은 뒤 깨닫고 감동하는, 그저 관념적이고 감성적인 것은 아니어야 한다는 뜻 같다. 사랑은 만져지고 나눠지며 서로 주고받을 수 있는 실체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신다는 교회의 전도 문구를 자주 봤을 것이다. 실제 성경도 그렇게 말한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사람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한복음 3:16) 흔히 종교는 세상을 터부시하고 경계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쉬우나 사실 그렇지 않다. 이 세상은, 그리고 당신과 나는, 하나님이 너무나 적극적으로 사랑하는 대상인 것이다. 그런데 말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이 ‘실체’로 경험되는가? 하나님은 보이지도 만져지지도 않는데 말이다. 종교적 사랑은 ‘영적(靈的ㆍspiritual)’이라고 하는데, 영적이라는 말은 사실 어느 누구도 쉽게 설명하지 못할 알쏭달쏭한 개념이다.

예수 “난 빵이다”

그런데 예수는 어느 날 자신을 먹는 ‘빵’이라 하셨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6:51) 빵은 두툼한 덩어리여서 입안에 들어가면 뱃속을 든든히 채워주는 ‘실체’다. 그렇다면 기독교의 사랑이란 듣고 잠시 기분만 좋아지는 말 뿐은 아니어야 하지 않을까?

예수님의 제자 중 요한이 있는데, 그의 별명이 ‘사랑의 사도’다. 예수님의 일대기를 기록한 네 권의 복음서 중 요한복음에만 ‘사랑’이 무려 57번이나 언급된다. 나머지 세 권의 복음서는? 다 합해도 40번이다. 그야말로 요한은 사랑 전문가, 사랑꾼이다. 특히 성경에 남아있는 그의 편지들은 사랑에 대한 깊은 성찰과 아름다운 표현으로 아주 유명하다.

'사랑의 사도' 요한. 요한은 관념적인 사랑이 아니라 실제적인 사랑을 강조했다. 그림은 한스 홀바인 (Hans Holbein the Younger)의 1517년작 '성 요한'.
'사랑의 사도' 요한. 요한은 관념적인 사랑이 아니라 실제적인 사랑을 강조했다. 그림은 한스 홀바인 (Hans Holbein the Younger)의 1517년작 '성 요한'.

종종 오해가 있기도 한데, 요한이 헬라 철학의 영향을 많이 받아 매우 관념적인 사람이라는 것이다. 결코 그렇지 않다. 예수께서는 사랑을 ‘서술’이 아닌 ‘명령’으로 가르치셨다는 것을, 그는 자신의 복음서에 남겼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13:34) 여기에 ‘서로’라는 말이 있다. 사랑은 홀로 자기 방에 앉아 묵상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있는 현장에 가서 ‘서로’ 나누는 것이라고 말한다. 결국 영적인 하나님의 사랑은, 믿는 사람들이 서로 모여 있는 교회로부터 체험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은?

하나님을 향한 사람의 사랑도 실체적이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을까? 교회에 가서 사랑한다고 목소리 높여 찬양을 드리고 기도도 해본다지만, 그것이 전부일까? 이 사랑은 영적이어서 ‘실체’로서 만져지지는 않는 것 아닐까? 성경은 또 다시 사랑 전문가 요한을 통해 이렇게 가르친다. “누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기 형제자매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보이는 자기 형제자매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요한일서 4:20) 충분히 하나님을 실체적으로 사랑할 수 있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서 사람을 돌볼 줄 모르면 거짓말이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영적 사랑의 실체화라면, 그 실체는 다름 아닌 “빵”이다. 우리 배를 든든히 채우는 빵 말이다. 하나님은 요한의 입을 통해 이렇게 말씀하신다. “자기 형제자매의 궁핍함을 보고도, 마음 문을 닫고 도와주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이 그 사람 속에 머물겠습니까? 자녀 된 이 여러분, 우리는 말이나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과 진실함으로 사랑합시다.”(요한일서 3:17-18) 기독교에서는 사랑이 ‘신학’을 넘어 ‘실천’이어야 하는 이유다. 교회를 다니면서 자신의 신앙이 깊어진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내 통장에 있는 돈이 구체적으로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지 확인해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말이나 글로만 했던 사랑은 아쉽지만 무효다.

유럽의 오래된 기독교 전통

영국 왕세손이 태어난 세인트메리 병원에서 나도 첫 아이를 보았다고 해서, 내가 생활에 여유가 있던 유학생은 아니었다. 영국에서는 어느 병원에서 아기를 낳건 치료를 받건 모두 무료다. 왕세자도 나도, 1원 한 푼 내지 않는다. 퇴원할 때 그 병원은 심지어 내게 큰 꾸러미 하나를 선물해 주었고, 그 안에는 기저귀부터 콘돔까지 가득 들어있었다.

사람이 아픈데 돈이 없다고 치료하지 않는 것을, 가장 비인륜적 행위며 국가의 도리가 아니라고 영국은 생각한다. 그래서 그 땅에 발붙이고 있는 사람에게는 어느 누구에게든지 의료 서비스를 무료로 해준다. 영국은 개인의 토지 투기도 힘들고 돈을 많이 벌면 세금도 엄청 많이 낸다. 사회주의의 영향이기도 하지만, 사실 수백 년간 이어온 유럽 기독교 정신의 구현 때문이기도 하다.

혹자들은 유럽의 기독교가 죽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교회가 신자들 없이 썰렁하기 때문이다. 교인이 줄어가는 것이 아쉽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예수가 그 곳을 떠난 것은 아니다. 그럴 분도 아니다. 예수는 영국 사회의 법과 제도 안 곳곳에 정말 “빵” 그 자체로 건재해 계시다. 영국의 교회가 기독교의 사랑을 실체로 구현시킨 아름다운 유산이다.

기민석 침례신학대 구약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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