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이 13일 청와대에서 전격적으로 열린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와의 영수회담에 앞서 악수하고 있다. 고영권기자

“국회의 직무유기가 심각하다. 국민과 국가에 해악을 끼치는 국폐다.”

추미애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9일 자유한국당을 향해 날린 쓴 소리다. 앞의 말은 그렇다 쳐도 뒤의 말은 과하다. 사사건건 발목을 잡는 제1야당의 고약한 심보가 꼴 보기 싫은 심정이야 이해가 간다. 하지만 적폐로도 모자라 국폐라니. 그러면 홍준표 대표는 나라의 폐해와 국기문란을 조장하는 불한당의 우두머리인 셈이다.

나흘 뒤 문재인 대통령은 국폐의 수장과 깜짝 단독회담을 가졌다. 청와대와 민주당이 번갈아 야당을 살갑게 달래고 호되게 꾸짖는 고차원의 역할분담을 했다면 다행이련만, 안타깝게도 그런 증거는 찾기 어렵다. 추 대표가 서슬 퍼런 국폐 발언으로 분위기를 다잡은 그날, 같은 자리에서 우원식 원내대표는 김기식 금융감독원장을 엄호했다. “본인이 사과한 마당에 야당이 무리한 정치 공세를 이어가면 묵과하지 않겠다”고. 그러나 1주일 뒤 김 원장은 사퇴했다. 청와대가 선관위의 유권해석이라는 벼랑 끝 카드를 꺼내는 동안 민주당은 무기력하게 결과를 지켜봤다.

국정의 중심축인 여당 ‘투 톱’의 잇단 헛발질이다. 무엇보다 말에 묵직함이 떨어진다. 정치인의 말에 기대하는 건 지지세력을 결집하고 반대편을 옭아매는 묘한 카타르시스다. 유력 정치인이면 두말할 것도 없다. 비수를 꽂더라도 품격과 여유가 묻어나야 상대를 압도할 텐데 거친 자기주장에 그친다면 굳이 들을 이유가 없다. ‘아무 말 대잔치’는 개그 프로그램으로 충분하다.

물론 여야간 살벌한 정치공세는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문제는 국회의 자존감이다. 제아무리 기량이 뛰어나도 링 위에서 상대를 인정하지 않는 선수에게 박수를 보낼 관중은 없다. 청와대가 정치권을 극도로 불신하며 던진 개헌안이 이마에 큼지막한 낙인을 찍었는데도, 여당은 야당을 뭉개는데 여념이 없으니 답답할 노릇이다. 누울 자리를 보고 발을 뻗어야 하건만, 우선순위를 무시하고 대통령의 선공에 맞춰 허둥대며 국민투표법 처리의 데드라인만 외치느라 체면을 구겼다. 이제 6월 지방선거와 동시 개헌이 무산된 책임을 떠넘기며 다시 시궁창으로 빠져들 판이다. 그나마 릴레이 정상회담의 거센 외풍에 가려 국회의 볼썽사나운 모습이 국민들에게 덜 비춰지는 게 다행일 지경이다.

정치의 요체는 협상이고, 협상의 기본은 주고 받는 것이다. 여소야대의 현실적 한계를 탓하기에 앞서 여당에 소명의식을 기대하는 이유다. 제1야당의 한심한 작태를 모르는바 아니다. 하지만 여당이 아무것도 내려놓지 않고 ‘꽃 길’만 걷겠다고 고집하면 뒤따르는 국민들은 가시밭길로 떠밀릴 수밖에 없다. 문 대통령의 지지율 고공행진에 취해 ‘하필 2년 후에야 총선을 치르는 게 유일한 악재’라며 들떠 있을 때가 아니다.

더구나 4ㆍ27 남북정상회담 이후 국회의 역할은 어느 때보다 막중하다. 여야가 뜻을 모아 법으로, 제도로 뒷받침하지 않으면 합의문은 회담 직후 또다시 쓰레기통에 처박힐 수밖에 없다. 과거 남북기본합의서와 두 차례 정상회담의 교훈이다. 70년간 총부리를 겨눈 북한과도 평화를 논하며 비핵화 담판을 벌이려는 마당에 여야가 손잡고 머리를 맞대지 못할 이유가 없다. 남북이 고르디아스의 매듭을 끊어 한반도에 역사적인 물줄기를 트려는 참이다. 도랑을 쌓고 물길을 내는 건 국회의 몫이다. 개헌 정국에 악재가 겹치면서 망가지고 흐트러진 정치권의 저력을 오롯이 보여줄 기회다.

완연한 봄 기운에 국회 잔디와 분수대 주변에는 전국 각지에서 찾아온 아이들로 붐비면서 생동감이 넘친다. 반면 그 뒤로 자리잡은 국회 본청 앞 계단에서는 야당의 천막 농성이 한창이다. 어른들이 천덕꾸러기 신세를 자초하고 있으니 볼수록 얼굴이 화끈거린다. 정치에 등을 돌려야 할 이유가 하나 더 생겼다. 하지만 이내 약발이 떨어질 진통에 불과하다. 달갑지 않지만 미워도 국회다.

김광수 정치부 차장 rolling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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