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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가 문관 꿈꾸는 유생에게 병법책 하사한 까닭

입력
2018.04.26 04:40
2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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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성균관 시절부터 아끼던 다산에

정조, 왜병 방어법 ‘병학통’ 하사

#2

‘무과로 바꿔서라도빨리…’ 속뜻에

낙향하려다 급제하며 해프닝으로

#3

‘새로운 구원자’ 풍문 잦았던 난세

왕조 수호자 간절했던 임금 뜻

유배지에서도 전략서 써내 보은

이런 임금 이런 신하

성균관 유생 시절부터 다산은 정조의 특별한 관리를 받았다. 다산은 반시(泮試)에서 연거푸 우수한 성적을 받으면서 총애가 한 몸에 모였다. 임금은 그를 깊이 아꼈으나 덮어놓고 편만 들지는 않았다.

25세 때인 1787년 8월 23일, 우등 합격 축하선물로 독한 계당주를 단번에 마시게 한 뒤 술기운이 오른 다산이 휘청이자 임금은 내감더러 그를 부축해 물러가게 했다. 잠시 후 그저 가지 말고 빈청에서 기다리라는 명이 다시 내렸다. 얼마 뒤 승지 홍인호가 소매 속에 책 한 권을 품고 나왔다. 홍인호는 혼인 날 꼬마 신랑에게 경박한 소년이란 말을 들었던 다산의 사촌 처남이었다. 그가 그 책을 주면서 임금의 하교를 전했다.

“자네가 장재(將才)를 아우르고 있음을 아신 까닭에 특별히 이 책을 하사하신다고 하셨네. 훗날 김동철(金東喆) 같은 역적이 일어나면 자네가 일어나 나가 싸울 수 있을 거라고 말이지.” ‘균암만필’을 인용한 대목이다.

정조가 다산에게 특별히 하사했던 어정병학통. 정조는 다산을 군인으로 키워볼 생각도 했다.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제공
정조가 다산에게 특별히 하사했던 어정병학통. 정조는 다산을 군인으로 키워볼 생각도 했다.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제공

집에 돌아와 보니 임금께서 하사하신 책은 바로 ‘병학통(兵學通)’이었다. 명나라 장수 척계광(戚繼光)이 왜병(倭兵)을 방어하면서 진(陣)을 치고 군사 훈련시키던 방법을, 정조가 손수 정리하여 여러 군영(軍營)에 하사한 책이었다. 정조는 문과 급제를 위해 정진 중이던 다산에게 왜 뜬금없이 장재(將才)를 언급했을까?

김동철의 역모와 ‘정감록’

한편 정조가 다산에게 말했다는 김동철의 일이 궁금해진다. 두 달 전인 1787년 6월, 제천 사람 김동익, 김동철 등이 정진성(鄭鎭星) 및 신승(神僧) 명찰(明察)과 작당하여 바다 가운데 있다는 무석국(無石國)에 근거를 두고 역모를 획책하다가 붙들려 죽었다. 이들은 장차 팔도에 내응을 심어둔 채 거사의 일시를 적은 암호로 된 시와 거사 계획을 돌리다가 적발되었다. ‘조선왕조실록’ 정조 11년 6월 14일 기사에 자세하다.

나라를 원망하고 세상을 미혹시켜, 국운(國運)과 화복(禍福) 운운한 흉언을 담은 내용이 이들 사이에 오갔고, 그들의 조직이 팔도에 퍼져있다는 말에 조정이 아연 긴장했다. 그 글 속에 “청의(靑衣)가 남쪽에서부터 오는데 왜인(倭人)과 같지만 왜인은 아니다. 산(山)도 이롭지 않고 물도 이롭지 않으며 궁궁(弓弓)이 이롭다”는 알 수 없는 내용이 있었다. 관련자의 신문 내용 중에 또 이들의 복색(服色)이 청색이고, 모두 푸른 관(冠)을 썼다는 자백도 있었다. 황건적이 아니라 청건적(靑巾賊)을 표방한 셈이다.

글 가운데 궁궁(弓弓) 운운한 대목은 60년 전인 1728년(영조 4) 무신년에 발생한 이인좌의 난 진압 과정에서 이미 한 차례 등장했던 구절이었고, 또 1748년(영조 24) 5월 23일 호서 역모 때의 친국에서도 똑같이 등장했던 비기(祕記)였다. 이는 모두 당시 조선사회를 뒤흔들었던 ‘정감록(鄭鑑錄)’의 진인(眞人)에 관한 소문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그것은 해도(海島)에서 정도령(鄭都令)이라는 진인(眞人)이 군대를 이끌고 와서 조선을 점령해 새로운 세상을 만든다는 아득한 풍문이었다.

이는 일종의 메시아니즘, 즉 구원 신앙의 변이 형태였다. 정(鄭)을 파자하면 유(酋) 대(大) 고을(邑)로, 정도령은 유대고을 도령이 된다. 재림예수의 코드로 읽힐 수 있는 체제 전복의 불온한 은유였던 셈이다. 숙종조부터 시작된 이 같은 풍문이 근 100년 동안이나 조선 사회를 소요케 했다. 김동철 사건은 이들을 사형에 처함으로써 일단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지만, 정조는 다산에게 이 같은 일이 훗날 다시 생길 때 네가 앞장서 정벌해서 발본색원하라고 당부했던 셈이다. 이 문제는 당시 남인 세력의 향배와 천주교 문제와도 미묘한 접점을 둔 대단히 민감한 사안이었다.

실속이 없다

넉 달 뒤인 1787년 12월에 다산은 다시 반시에 응시했다. 이번에는 등수가 형편없이 낮았다. 임금의 말씀이 이랬다. “여러 번 시험을 보아 번번이 1등을 했지만, 화(華)만 있고 실(實)이 없다. 특별히 그를 위해 화(華)를 거두려 한다.” 일부러 등수를 낮춰 정신을 차리게 하겠다는 뜻이었다.

1789년 초계문신과시방. 수석합격자로 다산의 이름이 나온다. 아래 사진은 다산 이름 나온 부분 확대본.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1789년 초계문신과시방. 수석합격자로 다산의 이름이 나온다. 아래 사진은 다산 이름 나온 부분 확대본.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사암선생연보’는 이 기사에 이어 알쏭달쏭한 다음 한 마디를 덧붙였다. “공은 과거 공부를 그만두고 은거하여 경전 공부에 힘 쏟을 뜻이 있었다. 대개 임금께서 무과(武科)로 진출시켜 쓰려는 뜻이 있었기 때문이다.(公欲廢擧業, 有隱居窮經之意. 盖上有以武進用之意故也.)”

다산은 임금이 자신의 등수를 일부러 낮춘 것을 문과가 아닌 무과로 이끌어 등용하려는 의도를 드러낸 것으로 받아들였다. 무엇보다 ‘병학통’을 하사하며 하신 말씀이 목에 컥 걸렸고, 그 뒤로도 그 같은 낌새가 다른 경로로 전해졌던 것이 틀림없다.

정조는 하루라도 빨리 다산을 곁에 두고 싶었다. 하지만 그의 대과 급제는 자꾸 늦어지고 있었다. 임금이 보기에 다산은 장재(將才)가 있었다. 그 장인인 홍화보 또한 무과로 급제해서 승지까지 지냈으니, 장인의 뒤를 따른다면 누가 보더라도 구색이 잘 맞았다. ‘병학통’은 무과 응시자라면 반드시 읽어야 할 필독서였다.

'사암선생연보' 기록 가운데 정조가 다산을 무장으로 발탁하려 했다는 내용이 보이는 기사. 펼침면 우측에 보인다.
'사암선생연보' 기록 가운데 정조가 다산을 무장으로 발탁하려 했다는 내용이 보이는 기사. 펼침면 우측에 보인다.

이 같은 임금의 의중을 알아차린 다산은 그만 과거를 포기하고 시골로 돌아가 경전 공부에만 몰두할 작정을 했다. 안 그래도 그 해 4월에 장인의 재정적인 도움을 받아 양수리 인근의 문암(門巖)에 집과 전지를 구입해두고 있던 터였다. ‘사암선생연보’는 또 위 기사에 바로 이어 “매문엄향장(買門崦鄕庄)”, 즉 문암의 시골집을 매입했다고 적어, 두 일 사이에 관련성을 높였다. 그는 당장이라도 가족을 이끌고 서울을 떠날 기세였다.

목숨을 바치자 한들

이 소동은 결국 임금이 다산을 무과로 올리려는 뜻을 접으면서 가라앉았던 듯하다. 다산은 1년 뒤인 1789년 정월에 문과에 당당히 급제해 이 일은 애초에 없던 해프닝으로 끝났다. 훗날 1800년 11월 6일, 정조의 장례가 끝나 건릉(健陵)에 묻히자, 다산은 세상을 떠난 임금이 사무치게 그리워 그때 정조가 자신에게 하사했던 ‘병학통’을 꺼내 들었다. 울며 그 책을 어루만지다가 첫 면 여백에 짤막한 글을 적었다.

“옛날 내가 벼슬하기 전 중희당에서 임금을 뵈었을 때, 술을 내려주시고 또 이 책을 주시며, ‘네가 무재(武才)가 있음을 안다. 이후 김동철 같은 자가 일어나거든 네가 가서 정벌 하거라. 너는 돌아가 이 책을 읽어라’고 하셨다. 아! 나는 실로 재목감이 아니다. 설령 그럴 뜻이 있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고자 한들, 이제 와서 어찌 그리 할 수 있으랴. 책을 어루만지며 긴 탄식을 금치 못한다”고 썼다. 여기에 한 번 더 김동철의 이름이 등장한다.

당시 다산은 정조 서거 후 서서히 숨통을 죄어오는 죽음의 그림자를 느끼고 있었다. 마재 집으로 돌아가 머뭇머뭇 두려워한다는 의미를 담은 ‘여유당(與猶堂)’이란 당호를 내걸고 납작 엎드려 지낼 때였다.

‘아동비어고’와 ‘민보의’ 저술

다산은 자신에게 장재(將才)를 기대했던 임금의 바람을 끝내 저버리지는 않았다. 귀양지의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임금과의 생전 약속을 지키기 위해 꾸준히 ‘아방비어고(我邦備禦考)’와 ‘민보의(民堡議)’의 저술에 힘을 쏟았다. 외교 관계 대응 사례를 주제별로 일목요연하게 정리 편집한 ‘사대고례(事大考例)’ 또한 임금과의 해묵은 약속을 지키기 위함이었다.

이들 책은 모두 국방 및 외교와 관련된 예민한 정보를 취급한 것이어서, 유배 죄인의 처지에 함부로 접근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었다. 특별히 ‘아방비어고’ 같은 국방 관련 저작은 많은 군사기밀을 포함하고 있어, 자칫 문제를 삼기로 하면 엮기에 따라 곤란한 처지에 놓일 수가 있었다.

정주응의 저술로 알려진 '미산총서'. 다산이 엮은 ‘아방비어고’의 미완성 상태를 보여준다. 국민대 성곡도서관 제공
정주응의 저술로 알려진 '미산총서'. 다산이 엮은 ‘아방비어고’의 미완성 상태를 보여준다. 국민대 성곡도서관 제공

결국 ‘아방비어고’는 유배 당시 강진에 병마우후(兵馬虞候)로 내려와 다산과 가깝게 지냈던 이중협(李重協)과, 해배 뒤 다산에게 수학한 제자 정주응(鄭周應)의 이름을 빌려 ‘비어고(備禦考)’와 ‘미산총서(眉山叢書)’ 등의 이름으로 흩어졌다. 이중협이 엮은 것으로 되어 있는 규장각본 ‘비어고’ 10책과, 정주응의 저술로 국립중앙도서관과 국민대학교 성곡도서관에 나뉘어 소장된 ‘미산총서’ 각 6책, 8책은 모두 다산이 직접 진두지휘해서 엮은 ‘아방비어고’의 미완성 상태를 보여준다.

특별히 ‘아방비어고’는 본격적인 국방 관련 저작으로 이전에 누구에게서도 나온 적이 없던 놀라운 규모와 세밀함을 갖춘 국방전략 종합 보고서였다. 다산의 저술이 분명하므로 이제라도 제 이름을 찾아주는 것이 맞다.

정민 한양대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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