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항공 갑질 사과에 되레 비난 잇따라
사과문에 추가 갑질, 불법 관행들 생략
계속 가족회사처럼 여긴다면 개선도 난망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의 최근 사과문을 두고 혀를 차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그룹 계열사 7곳의 임원을 맡은 둘째 딸의 갑질에 용서를 구하고 재발 방지책을 마련하겠다는 취지였으나, 사과 자체가 부실하고 대책도 눈속임이라는 지적이 빗발치고 있다. 조 회장은 이번 사건의 책임자인 둘째 딸은 물론이고 3년여 전 대한항공 갑질 시즌 1의 장본인인 큰딸까지 한진그룹 내의 모든 직책에서 사퇴시키겠다고 했다.

그러자 그 집안의 갑질 원조라며 잇따라 동영상, 음성파일이 공개되는 부인에 대해서는 왜 아무 말이 없느냐, 과거 행패로 여러 구설에 올랐던 아들은 그냥 놔두는 거냐는 비난이 쏟아진다. 큰딸을 모든 자리에서 물러나도록 하겠다고 해 놓고선 슬그머니 복귀시켰는데 그때와 다를 바 없는 이번 사과를 어떻게 믿느냐는 이야기도 나왔다. 전문경영인 도입 요구에 부응한다며 부회장직을 신설해 거기에 ‘조 회장의 오른팔’로 알려진 한진칼 대표이사를 선임한 데 대한 반응은 “기가 막힌다“로 요약된다.

조 회장은 2014년 12월 땅콩 회항 관련 사과문 발표 때 대한항공 본사 1층 로비에서 언론이 지켜보는 가운데 고개를 숙였고 기자들과 질의응답까지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담당 기자들에게 이메일을 보낸 게 전부였다. 사과문 발표 직전 사무실 방음공사를 지시했다는 이야기까지 나오면서 사과의 진정성마저 의심받고 있다. 한마디로 아니함만 못한 사과가 돼 버렸다.

이런 비판에 대체로 동의하면서도 내가 이 사과문에서 의아하다 못해 기괴하게까지 느낀 대목은 따로 있다. 우선 30대 중반의 성인으로 대한항공 전무, 칼호텔네트워크 대표이사를 맡은 어엿한 기업중역을 대신해 아버지가 나서서 “모든 것이 저의 불찰이고 저의 잘못”이라고 해야 하는 이유가 얼른 떠오르지 않는다. 내부 메일로 사과문을 발표했으나 비난이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면 당사자가 기자회견이라도 열어 사죄ㆍ반성할 일이지 아버지가 책임을 지고 공개 사과할 일인가. 게다가 엄연히 이사회가 존재하는 기업의 임원을 이사회 논의, 본인들의 사의 표명도 없이 조 회장 개인이 “사퇴하도록 조치하겠다”는 것도 어리둥절하다.

그가 사과문에서 쓴 “국민 여러분께 죄송하다“ “국민 여러분께 사죄 드린다”는 표현도 듣기에 불편했다. 만약 조 회장이 사과문에서 미국 국적의 딸이 불법으로 진에어 등기이사를 지낸 문제를 언급했더라면 이런 표현이 이상하게 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이번 물세례 사건 직후 불거진 조 회장 일가의 세관 패스 의혹을 사과문 발표 이유의 하나로 거론했더라면 고개를 끄덕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공정거래위 조사를 받았던, 세간에 조 회장 일가의 ‘진짜 갑질’로 알려진 ‘자식들에게 일감 몰아주기’ 문제를 암시라도 했다면 또 달랐을 것 같다. 그런데 사과문에서 조 회장이 “가족들과 관련된 문제”라며 구체적으로 밝힌 것은 “여식이 일으킨 미숙한 행동”, 그러니까 물세례 갑질 뿐이다.

오래 고민할 필요도 없이 이런 의아함과 불편함은 아무리 대주주라고는 해도 조 회장과 그 가족들이 대한항공과 여러 계열사를 이사회가 통제하는 주식회사가 아니라 조씨 일가의 가족회사로 착각하고 있다고 이해하면 자연스럽게 풀린다. 한진그룹의 진짜 문제는 부인과 자녀들에게만 있는 게 아니라 조 회장 자신에게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얘기다.

대한항공 직원들이 단톡방을 만들어 집단으로 갑질 제보를 공유하고, 세무 당국도 관련 자료를 수집 중이라니 이번 사태가 쉽게 유야무야 될 것 같진 않다. 그러나 그 결과로 이런저런 처벌을 받는다 하더라도 조 회장이 방음 사무실 안에서 건재하는 한 한진그룹이 크게 달라질 것 같지는 않다. 설사 그리 되더라도 꼭 한 가지만은 부탁하며 글을 맺고 싶다. 다음에는 제발 제게는 사과하지 말아 주세요.

김범수 논설위원 bski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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