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번 주 금요일이 딱히 특별하지는 않다. 1년 365일 중의 평범한 하루일 뿐이다. 1년이나 하루라는 개념조차도 과학적으로는 별로 매력적이지 않다. 한때는 1년을 기준으로 해서 1초를 정의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우주에 흔해 빠진 평범한 별 주위를 그보다 더 흔한 돌덩어리가 한 바퀴 도는 데 걸리는 시간에 자연의 근본원리가 담겨 있지는 않다. 1967년 이후로는 세슘133 원자의 물리적 성질을 이용해 1초를 정의하고 있다.

과학적으로는 무미건조한 나날을 특별한 하루로 만드는 것은 역시 인간의 노력이다. 2018년 4월27일은 1953년 한국전쟁이 멈춘 뒤로 65년 만에 가장 획기적인 날로 기억될 것이다. 남북정상회담이야 벌써 세 번째이니 완전히 새롭지는 않다. 이번 4.27 남북정상회담은 5월말~6월초로 예정된 북미정상회담 및 남북미 정상회담과 연결돼 공식적으로 한국전쟁을 끝내고 동북아시아에 새로운 질서를 구축할 것으로 기대된다. 물론 이는 희망 섞인 전망이다. 실제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1953년 정전협정이 체결된 이후 그 질서를 공식적이고 실질적으로 바꿀 가능성이 가장 높은 것도 사실이다. 정상회담이 시작되기도 전에 북한은 핵-미사일 동결의 첫 단계를 선언하고 나섰다. 북한의 핵실험이나 미사일 도발로 평창 올림픽을 망칠까 봐 노심초사했던 몇 달 전과 비교하면 그야말로 상전벽해다. 지금은 관련 당사국들 모두가 큰 틀에서 같은 방향으로 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 북핵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고 새로운 평화체제를 정착시킬 절호의 기회가 실질적으로 조성되고 있다. 만사를 제쳐두고 온 국민이 관심과 주의를 기울일만한 가치가 있다는 얘기이다.

그 중요성에 비해 상대적으로 국내 언론은 관련 이슈를 남의 나라 일인 양 냉랭하게 보도해 왔다. 국가 정보기관과 군부대까지 동원된 여론조작 사건에는 별 관심도 없던 매체들이 지금은 일개 팬클럽 조직의 댓글 조작 의혹에 사운을 걸고 달려드는 모양새다. 선거철이 다가오면 갑자기 북한 관련 보도를 쏟아내던 행태도 이상하게 찾아보기 어렵다. 북풍으로 선거이슈를 덮어버린다는 방정식이 이제는 정반대 방향으로 작동하고 있다. 나라 안팎으로 대전환의 시기에 접어들었다는 또 다른 징표가 아닐까 싶다.

한 가지 걱정은 혹시 이 와중에 우리가 정말로 천재일우의 역사적 기회를 놓치지나 않을까 하는 점이다. 여기에는 단지 언론이 남북정상회담을 비중 있게 다루지 않거나 일부 정치세력이 정략적으로만 이용한다는 것 이상으로 심각한 문제가 있다. 60년이 넘는 정전체제를 끝내고 평화공존의 시대로 넘어가는 과정은 우리가 전혀 겪어보지 못한 여정이다. 세계사적으로도 예가 드물다. 대한민국의 역사는 식민지배, 분단, 전쟁, 정전의 문법으로 적혀 왔다. 정전체제 종식은 새로운 문법을 필요로 한다. 기존의 사고방식이 적합하지 않을 수 있다.

과학자들이 쓰는 표현을 빌리자면 생각의 회로를 바꿔야 한다. 20세기가 시작될 무렵 과학자들은 원자 이하의 미시세계를 탐색하면서 이전의 개념과 사고방식이 새로운 현상을 설명하기에 너무나 적합하지 않음을 절실하게 깨달았다. 지금 대한민국의 처지도 그와 다르지 않다. 우리 머릿속의 휴전선부터 걷어내고 신사고의 철로를 다시 깔아야 한다. 물론 북한도 마찬가지이다. 가까운 미래에 통일이 되지 않는다면 한동안 우리는 1민족 2국가의 평화로운 분단체제라는 새로운 실험에 돌입할 가능성이 높다. 과연 우리는 지금 얼마나 준비돼 있을까? 수십 년에 걸쳐 수많은 사람들의 피로 쌓아올린 민주주의도 순식간에 무너질 수 있음을 우리는 최근까지 목격해 왔다. 한반도와 동북아의 신질서룰 구축하는 문제뿐만 아니라 과거로의 역행 없이 그 질서를 유지하고 관리하는 혜안까지 고민해야 한다. 온 국민의 지혜와 노력이 정말로 필요한 시점이다.

다행히 우리에겐 지난 촛불혁명의 경험이 있다. 따지고 보면 지금의 극적인 남북관계의 시발점도 촛불혁명이었다. 이제는 그 촛불이 우리 안팎에 여전히 남아있는 냉전의 적폐부터 불사를 때가 되었다.

북한이 핵-경제 병진노선을 바꿔 일차적인 핵-미사일 동결을 선언한 것은 노동당 중앙위 3차 전원회의였다. 여기서 다룬 두 번째 의제는 과학교육에 관한 것이었다고 한다. 아마 북한에서도 경제 강국을 만드는 유력한 수단으로 과학을 지목하고 있는 듯하다. 과학에 국가적인 관심을 가지겠다고 하니 한 명의 과학자로서 한편으로는 반갑기도 하지만, 남한이나 북한이나 결국 과학을 경제발전의 도구로만 생각하는 게 아닌가 싶어서 씁쓸하기도 했다. 예전에 공산체제 유지를 위해 과학이 왜곡되고 오용된 역사가 북한에서 되풀이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과학 분야의 활발한 남북교류를 기대해 본다. 과학 특히 기초과학이야말로 체제와 이념을 초월한 인류 보편의 지적 성취물이다. 파스퇴르의 명언을 살짝 비틀어 말하자면, 과학자에게는 조국이 있지만 과학에는 국경이 없다.

이종필 건국대 상허교양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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