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한 당신] 밀리 던 비지

미국 남부서 태어난 시골소녀
모병 포스터 우연히 보고
‘편지는 군 사기의 핵심요소’
해외 파병 6888 부대 지원
흑인여성 고정관념 깼다
2년 넘게 방치된 전시 우편물
일일이 대조하며 분류작업
승전 후 프랑스서 퍼레이드
제대 후 활발히 인권운동
흑백분리반대 시위 참가하고
마틴 루터 킹 목사 연설 주선
여성 최초 NAACP 지부장 맡아
밀리 던 비지는 2차대전 미군이 유럽전선에 파병한 우편대대인 6888부대에서 복무한 베테랑이었다. 전원 흑인 여성으로만 구성된 6888부대는 성과 인종의 이중 차별을 감당하며 군지휘부의 예상을 뛰어넘는 성과로 ‘6888부대의 신화’를 창조했다. 전역 후 고향 노스캐롤라이나의 전미흑인지위향상협회 롤리시 지부장을 맡기도 했던 비지는 자신의 참전 경험을 무척 자랑스러워 했다. wunc.org

제2차 세계대전 전장의 미군이 본국 가족 친지와 주고받은 편지 등 우편물은 연 평균 50억 통이었다. 그 시기 미국 우정청장(Postmaster General)이던 프랭크 워커(Frank C. Walker)는 ‘육해군저널’에 기고한 ‘전시 우편 서비스’라는 글에서 “군 지휘부는 우편물을 사기(morale)의 핵심 요소로 간주해 탄약ㆍ식량과 맞먹을 만큼 중시했다”고 썼다.

말은 그랬지만 실정은 사뭇 달랐다. 국방부와 우편국(POD)은 전시 우편수요에 대비하지 못하다가 1941년 초에야 대서양 유럽 국가와 카리브해 연안 등 7곳에 군사우편국(APO) 설립을 추진했다. 마지막 우편국인 자메이카 시몬즈 항 APO가 만들어진 것은 진주만 공습 불과 3주 전이었다. 41년 말 참전한 미국은 전선이 확산되면서 부랴부랴 50여 개 국 400여 곳에 APO를 증설했지만, 저 엄청난 우편 수요를 따라잡기에는 인력도 부족하고 시스템도 부실했다.

우편물 부피도 부담스러웠다. 군 지휘부로선 전투병 수송과 탄약 보급이 더 급했고, C-레이션(전투식량)보다 크리스마스 카드와 쿠키 소포를 먼저 보낼 수는 없는 일이었다. 급기야 미국은 42년 6월 ‘V-메일(Victory mail)’ 시스템이란 걸 도입했다. V-메일은 코닥사가 고안해 영국이 먼저 채택한 전시 군사우편 시스템으로, 발신자가 V-메일용 봉투와 편지지로 편지를 쓰면 우편 당국이 분류해 군 당국에 넘기고, 군은 그것들을 촬영해 필름만 보내는 방식. 현지에서는 필름과 봉투 주소를 인화해 수신자에게 발송했다. 대서양 너머로 한 장짜리 편지 15만 통을 보내려면 우편 행낭 약 37개(2,575파운드) 부피였지만, V-메일로는 행낭 하나로 충분했다. 하지만 번거롭게 규격 용지와 봉투를 구해 써야 하고, 일반 특급우편보다 느리고, 편지 내용이 여러 차례 타인에게 읽히는 게 꺼림칙해 돈이 더 들어도 일반 우편을 이용하는 이들이 많았다.

모든 군사우편물은 뉴욕 우편집중국에 모여 군과 지역ㆍ전선별로 분류돼 배나 항공편으로 발송됐다. 현지에서는 그 무더기를 풀어 한 통 한 통 수신자 신원과 부대명, 주둔지를 확인해 다시 작은 행낭으로 나누어야 한다. 원칙적으로 뉴욕의 일은 우편국 업무고, 현지 일은 군인 업무다. 전투병도 부족해 모병에 허덕이던 때였다. 해를 넘기면서 군항 창고와 공항 격납고, 지역 APO에는 우편물이 쌓여갔다. 음식 소포가 부패해 악취가 풍겼고 쥐들도 들끓었다. 당시 한 현지 부관참모는 “D-데이(노르망디 상륙) 이후, 아니 그 전부터 유럽전선의 우편 인력 부족 사태는 심각했다.(…) 한 마디로 미군 우편시스템은 카오스였다”고 말했다.(history.army.mil)

우편 전문 ‘특수부대’인 ‘6888 대대(공식 명칭은 6888th Central Postal Directory Battalion)’가 급조된 배경이 그러했다. 부대는 45년 2월 유럽 전선으로 파병됐다. 간호부대를 제외하면, 2차 대전 중 해외로 파병된 유일한 흑인 여성 부대였다. 부대 캐치프레이즈는 ‘편지가 없으면, 사기도 떨어진다 No Mail, Low Morale’였다.(army.mil)

미 여군 전신인 육군여군지원단(WAAC, Women’s Army Auxiliary Corps)은 1942년 5월 출범했다. 단원은 4~6주 군사기본교육과 4~12주 전화교환, 정비, 제빵, 우편, 운전, 속기, 타이핑 등 비전투 주특기교육을 받고 배치됐다. 군복은 지급됐지만 군인 지위는 인정받지 못해 파병 수당이나 사망 보상금 혜택을 못 받는 임시 군무원 같은 신분이었다. 43년 7월 대통령 루스벨트는 WAAC를 육군여군단(WAC, Women’s Army Corps)으로 승격하고 계급 체계도 육군과 통일했다. 전시 WAC로 복무한 여성은 사병은 10만 명이 넘었고 장교도 6,000명 가량이었다. 장교의 경우 40% 이상 대졸자였고, 사병도 60% 이상 고졸자였다. WAC는 78년 육군에 통합되며 해체됐다. WAC와 별도로 여성항공비행단(WASP), 해군자원예비군(WAVES), 해안여성경비대 등 군별 조직도 있었다.(주미영의 ‘미국 전쟁사 속 여성’ 참조.)

루스벨트는 41년 6월 ‘행정명령 8802’로 군대 등 공공부문 인종차별을 금지했다. 흑인 여성의 WAAC/WAC 지원도 원칙적으로 가능했다. 하지만, 손이 달려 받기는 하면서도, 여성도 마뜩잖은데 흑인까지 받아야 했던 군과 미 의회는 WAC 내 흑인 비율을 당시 미국 인구 흑인비율인 10% 한도로 제한했다. 전시 WAAC/WAC로 복무한 흑인 여성은 장교 146명, 사병 6,527명으로 전체의 5.1%에 그쳤고, 주로 백인 여성부대와 별도로 편성됐다. 흑인 여성은 이중의 차별 즉, 군대 내 식당 등 편의시설과 수송편, 숙소 등 거의 모든 면에서 “당시 사회적 관습과 군대 전통”의 지배를 받았다.(womensmemorial.org, 위 책 참조) 그 부대 중 유일하게 전장으로 파병된 부대가 6888대대였고, 밀리 던 비지(Millie Dunn Veasey)는 대대 사병 817명 중 한 명이었다. 6888부대의 마지막 생존자 중 한 명으로, 당시 경험을 활발히 증언한 그가 3월 9일 별세했다. 향년 100세.

24세의 비지가 보았다는 1942년 전시 미 육군여군지원단(WAAC)의 모병 포스터. 그의 삶과 세계가 저 포스터 한 장으로 송두리째 달라졌다. womenofwwii.com

비지는 남부 노스캐롤라이나 주의 주도 롤리(Raleigh)에서 1918년 1월 31일 태어났다. 조부모는 노예였고, 부모는 인구 4만 명 남짓 되던 도시 바깥으로 거의 나가본 적 없는 토박이였다. 비지는 흑백분리의 ‘짐 크로 법(Jim Crow Laws, 1876~1965)’ 속에서 나고 자랐다. 그는 흑인학교인 워싱턴 고교를 졸업한 뒤 뉴딜 정책으로 운영된 카운티 직업교육시설(extention agent)에서 사무원으로 일했다. 지금도 남부 소도시에 가면 외국은커녕 바다 구경도 못해본 이가 드물지 않다니 당시는 더 했을 것이다. 비지는 마을 밖으로 나갈 일도, 바깥 세상에 대한 갈망도 없었다고 한다.

41년 12월 2차대전이 미국의 전쟁으로 번지고 이듬해 큰 오빠가 입대한 게 일가에겐 큰 변화였을 것이다. 비지가 군복 차림의 백인 여성이 성조기를 배경으로 멋지게 선 모습을 담은 육군 WAAC 모병포스터를 본 것도 42년 그 해였다. 포스터에는 ‘이것은 나의 전쟁이기도 하다 This is My War Too!’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그는 “백인 여성이 할 수 있다면 나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조국이 원하는 일이었다”고 말했다. 어려서부터 몸이 약해 천식을 달고 살았고, 비만 오면 인후염으로 고생했다는 그의 그 무렵 몸무게는 45kg 정도였다. 가족 모두 반대했지만 그는 그 해 12월 지원서를 냈고, 다들 체력테스트에서 떨어지리라 예상했지만 이듬해 1월 체력검사와 필기시험을 통과했다. 마을에서 함께 간 21명 중 합격자는 4명이었다. 시외버스를 타고 시험장인 노스캐롤라이나 포트 브랙(Port Bragg) 훈련소로 가면서 그는 난생 처음 마을 바깥 세상을 구경했다.(diversityinc.com)

비지는 기초훈련을 받고 아이오와(Fort Des Moines)- 텍사스(Fort Clark, Camp Maxey)- 조지아(Fort Oglethorpe) 등, 이름도 낯설었을 여러 훈련소와 부대를 거쳐 45년 2월 뉴욕 항에서 대서양 횡단 퀸 엘리자베스 호에 승선했다. 배도 물론 처음이었다. 엿새 항해 내내 멀미로 녹초가 됐다는 이야기, 도중에 독일 U보트의 공격을 받았고 영국 글래스고 항에 도착하자마자 V-로켓이 부두에 떨어져 훈련 받은 대로 바닥에 엎드려야 했다는 이야기, 다시 군사우편기지가 있던 버밍엄으로 이동해 기차에서 내렸더니, 구경꾼 중 누가 “저 여자들 봐 다들 분장(technicolor)을 하고 왔어”라며 웃더라는 이야기를, 그는 훗날 웃으며 말했다.(libcdm1.uncg.edu) 장교 포함 850여 명의 흑인 여성이 한 데 모여 있는 광경은 무척 진귀했겠지만 비지 역시 낯선 대륙과 폐허가 되다시피 한 도시 풍경에 얼이 나갈 지경이었을 것이다.

유럽 전선의 밀리 던 비지. 가끔 초대해 식사를 대접하던 버밍엄의 한 영국인 부부가 찍어준 사진이라고 한다. 6888th monument committee

2년 넘게 방치되다시피 쌓인 우편물도 그들을 질리게 했을 것이다. 부대명은커녕 수신자이름조차 온전히 적지 않은 편지가 부지기수여서, 그들은 유럽 주둔군 700만 명의 군번- 출신지 기록 카드와 일일이 대조해 수신자 신원과 부대를 확인해야 했다. 6888 부대장이던 당시 소령 채러티 애덤스 얼리(Charity A. Earley, 1918~2002)는 자서전(‘One Woman’s Army’, 1989)에서 “글씨를 흘려 써서 알아보기 힘든 것도 많고, ‘주니어’나 ‘바비’처럼 달랑 애칭만 적은 것도 무척 많았다. 바비 밥 롭 등 다양하게 불리는 로버트 스미스라는 이름의 병사만 유럽 전선에 약 7,500명이 있었다”고 적었다.(moaa.org) 대원들은 탐정처럼 편지 내용 등으로 수신자를 확인하고, 생존 여부도 확인해 전사자 편지는 반송해야 했다. 등화관제 때문에 실내는 늘 어두웠고, 난방시설이 없어 내복으로 추위를 버텨야 했다. 그들은 그렇게 단 하루도 쉬지 않고 하루 24시간 3교대하며, 한 장군이 “최소 6개월은 걸릴 것”이라고 내다본 그 일을 3개월여 만에 끝냈다. 시찰 나온 한 간부가 왜 부대원 전원이 일하지 않느냐고 윽박지르며 백인 지휘관을 파견하겠다고 한 적도 있었는데 얼리가 “내 시체를 밟고 가야 할 것(Over my dead body, Sir)”이라고 뻗대 영창을 갈 뻔했다는 이야기, 군인 클럽과 식당, 미용실 등은 백인만 이용할 수 있어 6888 부대원들이 독자적인 식당과 휴게시설을 운용했다는 이야기도 있다.(history.army. mil)

45년 5월 독일 항복으로 유럽 전쟁은 끝이 났지만 6888부대의 전쟁은 계속됐다. 비지 등은 며칠 휴가를 받아 런던 등을 여행한 뒤 프랑스 루앙으로 이동, 9개월 더 복무했다. 프랑스에서는 민간인과 독일군 포로들의 손을 빌릴 수 있었지만, 부대원도 줄어 45년 말 무렵엔 약 300명이 남았고, 46년 1월 제대 예정인 이들도 약 200명에 달했다. 소포 도난이 잦아 민간인 몸수색도 해야 했다고 한다. 보급 병장으로 진급한 비지는 자기 부대원만 볏짚 매트리스에 자는 것은 부당하다며 상급 부대에 항의, 전 부대원이 멀쩡한 매트리스에서 잠을 잘 수 있게 하는 ‘업적’도 남겼다.

그 해 12월 유럽 주둔 미군 장성위원회는 “미국의 국가안보는 인종ㆍ성별 불문, 시민 모두의 책임이다. 인구비례에 따라 백인 여성뿐 아니라 흑인 여성도 안보 책임을 지속적으로 부담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전향적 내용의 보고서(history.army.mil)를 채택했다. 노스캐롤라이나대 ‘베티 카터 전시 여성사 프로젝트’ 책임연구원 베스 앤 코얼쉬(Beth Ann Koelsch)는 “6888부대는 흑인 여성에게는 천한 일이나 맡길 수 있다는 고정관념을 깬, 위대한 업적을 남겼다.(…) 그들은 처음부터 언론의 주목을 받았으므로 실패나 부적절한 품행은 모든 흑인 여성의 문제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내가 연구한 자료에 따르면, 그들은 자신들의 역할에 대한 단단한 자부심으로 그 편견에 맞섰다”고 NYT 서면인터뷰에서 밝혔다. 마지막까지 남은 6888부대원은 46년 2월 전원 귀국해 뉴저지 주 포트 딕스(Fort Dix)에서 “해단식도 퍼레이드도 공적인 찬사도 없이” 해산, 뿔뿔이 고향으로 돌아갔다. 일부는 장교양성과정 지원 제안을 받았고 하사로 승진한 비지도 그 중 한 명이었지만 “나의 전쟁이 끝났기 때문에” 제대를 택했다.

조국과 군대는 그들을 차별했지만 유럽의 시민들은 그들을 환대했다. 45년 5월 프랑스 루앙 잔다르크 축일 퍼레이드에 참가한 6888대대. wikipedia.org

30세이던 비지는 ‘제대군인원호법(Serviceman’s Readjustment Act, 일명 GI Bill)의 학비 지원으로 48년 롤리의 세인트 어거스틴대(경영 전공, 국어 부전공)에 진학, 이듬해 결혼해 1년 쉬고 복학해 53년 졸업했다. 3년여 간 버지니아의 한 교교에서 교사로 일했고, 57년 모교 어거스틴대 교직원으로 취직해 28년간 총장 비서와 재학생 진로상담 부서 등에서 일했다. 노스캐롤라이나 센트럴대학서 석사(경영) 학위도 땄다.

사회의 집단적 환대를 받는 건 당시 흑인 여성으로선 드문 경험이었다. 유럽에서 비지는 흑인이기 이전에 조국을 해방시킨 승전국 군인이었다. 프랑스 루앙에서는 잔다르크 축일(5월 30일) 행사에 6888부대원 전원이 초대받아 퍼레이드를 펼치기도 했다. 그는 대학 재직 중이던 60년대 노스캐롤라이나 흑백 분리반대 시위(Sit-In)와 63년 워싱턴 행진에도 참여했다. 여성 최초 전미흑인지위향상협회(NAACP) 롤리시 지부 의장(65~68년)을 맡아 일했고, 66년 마틴 루터 킹의 롤리시 연설을 주선해 그를 수행하기도 했다.

80~90년대 레이건-H.W 부시 공화당 체제의 미국은 참전 세대인 ‘위대한 세대 Greatest Generation’를 열렬히 재조명했다. 얼리의 자서전(89년)도 나와 6888부대도 주목을 받았다. 책과 다큐멘터리 등이 나왔고, 우정국 역사나 전시 여성사, 흑인인권운동사에서도 6888부대는 빠뜨릴 수 없는 항목이었다. 말년까지 비지는 건강했고 대화하기를 즐겨, 숨을 놓기 한 달 전 100세 생일에도 몇몇 언론과 인터뷰를 했다.

그는 61년 남편과 아이 없이 사별한 뒤 재혼하지 않고 두 아이를 입양해 키웠다. 집 거실에는 70년 된 그의 군모가 늘 놓여 있었는데, 누가 “오, 남편은 어디서 복무했느냐”고 물으면 “내가 베테랑”이라며 군대 자랑을 풀어놓곤 했다고 한다.(nyt, 위 기사) 그는 “군 경험이 내 삶을 바꿔놓았다. 동료와 전우애를 알게 했고, 서로를 보살피고 지켜주는 일의 의미를 알게 했다. 영원히 간직할 경험이다”라고도 말했다. 40년대 “넥타이도 맬 줄 모르던” 흑인 여성인 자신의 가치를 알게 된 게 가장 큰 의미였을 것이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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