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향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적폐청산의 깃발을 들고 쾌속 질주하던 문재인 정부가 집권 1년 만에 중대고비를 맞았다. 김기식 전 금융감독원장이 후원금 위법 사용 및 외유성 출장 의혹으로 낙마하는 과정에서 '내로남불 도덕성' 논란이 불거졌고, '민주당원 댓글사건'에 문 대통령의 최측근인 김경수 의원이 깊이 얽힌 것으로 드러나 파문이 커지고 있다. 밖으로는 남북정상회담과 북미정상회담을 둘러싼 한반도 비핵화 논의의 물살이 거칠고 빨라졌다. 상대적으로 그 동안 움추렸던 보수정당은 반전의 호재와 기회를 잡았다는 듯 전방위 공세를 퍼붓고 있다. 이 흐름을 지방선거까지 이어가 재건의 토대를 닦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공동묘지'에 비유될 만큼 지리멸렬한 자유한국당 등이 반성과 쇄신은 팽개친 채 반사이익에만 기대는 것은 길이 아니다. 300년 가까운 최장수 생명력을 자랑하는 영국 보수당의 역사와 리더십을 줄곧 연구하며 보수주의를 천착해온 박지향 서울대 교수를 만나 한국 보수정당의 현재와 미래를 따져봤다.

박지향 서울대 교수. 배우한 기자

-문재인 정부가 정권의 도덕성 논란으로 비화한 이른바 ‘김기식-김경수 사건’으로 어려움에 처하자 그 동안 수세에 몰렸던 자유한국당 등 보수정당이 아연 활기를 띠며 ‘댓글로 흥한 정권 댓글로 망한다’는 등의 총공세로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다. 이번 사건이 보수진영 결집 및 재건, 혹은 국면 반전의 계기가 될 수 있겠는가.

“좌파 혹은 진보는 우파에 비해 깨끗하거나 도덕적으로 우월할 것이라고 생각해온 국민들은 많이 실망했을 것이다. 너희들도 별수 없구나 하는 냉소가 번져 정치불신이 더욱 커질까 우려된다. 보수진영에 반사이익이 돌아가겠지만 정치권, 특히 집권층에 만연한 내로남불식 위선과 이중잣대에 대한 혐오가 커지면 꼭 유리한 것만도 아니다. 진보는 물론 보수도 자신을 되돌아 보는 시간이 돼야 한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이후 보수세력은 구심점을 잃고 사실상 궤멸상태에 빠졌다. 해방 이후 70년 세월 동안 ‘가끔 진보세력에도 투표하는 보수주의 국가’였는데도 이렇게 보수가 맥없이 몰락한 원인은 뭐라고 보나. 도대체 보수는 그 동안 무엇을 한 것이며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된 건가. 보수의 얼굴을 가졌지만 한번도 제대로 된 보수정당은 없었다는 지적도 있다.

“보수정당은 북한의 위협을 앞세워 안보장사에 몰두했을 뿐 철학과 비전을 가꾸지 않았다. 가혹하게 말하면 기득권 친목단체였다.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전가의 보도처럼 말하는데 그 ‘자유’는 북한의 공산주의를 반대하는 개념에 그쳤다. 자유주의의 미덕을 수용하면서 민주주의를 수용하는 것인데도 말이다. 보수주의가 뭔지, 보수정당의 정체성은 어떠해야 하는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되나. 박 전 대통령 탄핵과 함께 보수 전체가 무너진 것은 기득권에 안주하며 실력을 쌓는 데 소홀했다는 증거다. 그렇다고 보수가 궤멸됐다거나 희망이 없다고는 보지 않는다. 고민하고 공부하면 새 길이 보일 것이다.”

-대선에서 패배한 한국당이 지난해 여름 혁신의 길을 모색한다며 개최한 세미나에서 강연 했는데 어떤 얘기를 했나. 당시만 해도 한국당 의원들은 환골탈태해야 한다는 의지가 갖고 나름대로 대안을 모색했다. 홍준표 대표 체제가 들어서면서 당의 목표와 방향이 뭔지 모르게 됐다. 홍 대표의 원맨쇼에 의존할 뿐 소속 의원들은 중진이든 소장파든 모두 생존에 급급해 말 그대로 지리멸렬하고, 각자도생이 지금의 모습이다. 오죽하면 ‘공동묘지 같은 당’이라는 모욕적인 말까지 나오겠는가. 어디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보나.

“철학의 재정립과 새피 수혈, 그리고 책임지는 모습이다. 같은 이념과 가치로 모인 조직이 비극적 상황에 처했으면 힘을 합쳐 위기를 돌파하겠다는 결기를 보여줘야 한다. 그것이 정당이다. 애써 만든 정강정책은 어디에 쓸 것인가. 지도부가 소속의원들과의 소통을 중시하며 이념적 공감대를 넓혀야 한다. 또 당선이 확실한 지역에 유능하고 참신한 새 피를 배치해 차세대 리더로 성장할 수 있도록 최대한 배려해야 한다. 보수정당이 살 길은 젊은 지도자를 육성하는 것이다. 또 보수의 저변을 넓히기 위해 보수 청년단체를 육성하고 진보가 장악한 대학의 다양한 보수 프로그램도 지원할 필요가 있다.”

이 즈음에서 홍 대표에 대해 한마디 해달라고 했다. 잠시 머뭇거리던 박교수는 “기개는 있으나 정당 지도자의 품격은 기대 이하”라며 “천박하다고 말하기는 그렇고…어쨌든 공부를 좀 했으면 좋겠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그는 문 대통령이 지난해 휴가 때 읽었다고 공개한 책 '명견만리'의 수준이 민망하다며 책이 하룻만에 베스트셀러가 되는 값싼 풍토도 개탄했다. 문 대통령을 포함한 진보의 리더십도 실망스럽다는 얘기로 들렸다.

-영국 보수당이 수백 년의 생명력을 이어온 요인을 연구한 결과 결속과 충성심, 유연한 변화 적응력, 유능한 국가경영능력, 애국적 국민정당 이미지, 조직과 선전 등 다섯 가지를 꼽았는데, 역사와 문화가 다른 한국의 보수정당에도 이런 기준을 적용할 수 있나. 특별히 충고할 게 있다면.

“영국의 보수당이나 미국 공화당은 세금이나 복지제도, 노사관계 등에서 뚜렷한 입장을 갖고 있다. 그것을 국민이 오해하거나 받아들이지 않으면 궁극적으로 그것이 개인을 위해서나 나라 전체를 위해서나 더 나은 길이라는 것을 꾸준히 설득한다. 이 과정에서 국민들은 그들이 집권하면 어떤 정책을 펼치고 나라를 어떻게 이끌 것인지 알게 된다. 집권하면 그대로 실천에 옮겨야 함은 물론이다. 영국 보수당은 실천에서는 유연성을 보여줬지만 원칙에서는 일관성을 보여줬다. 이른바 안정감이다. 그들은 선거에서 지는 한이 있어도 원칙을 지킬 것인가라는 질문에 그렇다고 답한다.”

이유식(왼쪽) 한국일보 고문과 박지향 서울대 교수가 한국의 보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배우한 기자

-두 전직 대통령을 감옥에 보낸 문재인 정부의 ‘적폐청산’ 드라이브에 대해 보수진영은 정치보복 프레임을 들이대고 있다. 한편으로는 보수진영이 혁신을 게을리 한 채 기득권만 즐기다가 화를 자초한 측면도 있다. 그렇다면 당장은 고통스럽고 힘들더라도 길게 보면 문 정부의 적폐청산이 보수의 새 출발을 돕는 약이 될 수도 있지 않은가.

“그런 해석도 가능할 것이다. 무너져 봐야 새로운 토대를 쌓을 수 있는 법이니. 작금의 상황이 보수에 나쁜 것만은 아니다. 솔직히 지난 1년 문재인 정부의 국정운영을 평가하면 실망스럽고 안정감이 없다. 일자리 문제 하나만 봐도 그렇다. 청년 일자리 창출은 정부가 하는 게 아니다. 정부는 여건만 마련해 주고 민간기업이 그 일을 맡아야 하는 것은 상식이다. 입증되지 않은 이론과 적대적 기업관으로 민간기업의 일자리는 무너뜨리고 공무원 일자리로 땜질하겠다는 정책은 비판을 떠나 우리나라가 향후 10년 후에 뭘 먹고 살 것인가와 연결된다. 참 심각한 문제다. 진보정권의 의욕과잉이 빚어낸 공백을 잘 파악해 타산지석으로 삼는 지혜가 필요하다.”

-홍 대표는 얼마 전까지도 유력한 보수인사를 대거 영입해 지방선거에 내보내겠다고 장담했으나 접촉한 인물들이 모두 거절해 민망하게 됐다. 그 결과 주요 광역단체장에 전략공천한 인물들은 모두 ‘올드보이’로 꾸려졌다. 보수에 대한 우리 사회의 기대가 그만큼 식었다는 것 아닌가. 민주당에서 ‘진보 20년 집권’ 얘기가 공공연히 나오는 것도 이런 상황과 자신감을 반영한 것이라고 보는데.

“동의하지 않는다. 영국의 보수당이 300년 동안 유지된 것은 익숙하고 안정된 것을 선호하는 성향 덕분이다. 그것이 보수정당을 지탱하는 가장 큰 기반이다. 우리나라 보수정당도 예외가 아니다.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위축돼 있는 것은 사실이나 진보정권에 싫증 내는 안정희구 세력이 분명히 있다. 문 대통령 지지율이 70%를 웃돌지만 그 조사에는 허점이 많다고 본다. 민주당이 20년은 걱정 없다고 말한다면 자만이다. 우리나라 유권자의 성향을 볼 때 10년 정도는 가능할지 모른다. 보수 쪽도 이 정도로 길게 보고 기본부터 다시 세워야 한다. 보수의 가치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안보라고 대답하는 수준으로는 안 된다. 문재인 정부가 ‘사람이 먼저다’라는 비전을 보여준 것처럼 보수정당의 지향점도 분명히 해야 한다.”

-보수 정당이 오래 집권해왔지만 보수의 뿌리가 취약한 것은 아이러니다. 우리 사회에서 내놓고 보수주의자를 자처하는 사람은 드물고 특히 대학생이나 젊은층에게 보수는 반동처럼 여겨진다. 사실 보수가 반공이나 수구와 동의어가 될 만큼 보수 세력이나 정당이 '노블레스 오블리주' 덕목을 소홀히 한 채 보수의 정체성을 훼손했기 때문일 것이다. 보수의 토대를 굳건히 하기 위해 어떤 작업이 필요하다고 보나.

"굴곡진 우리 역사의 산물일 것이다. 민주화 투쟁과정에서 젊은층은 당연히 진보여야 한다는 생각이 족쇄처럼 작용했다. 그러나 이제 대학 사회나 20대의 의식도 많이 바뀌고 있음을 피부로 느낀다. 우리도 미국이나 영국처럼 보수성향의 단체들이 양지로 나와 활동하며 유능한 지도자를 키워내야 한다. 보수가 진보보다 안정적으로 국정을 운영하고 국민을 결속시킨다는 사실은 역사적으로 입증됐다. 우리도 예외가 아니다. 새로 시작할 수 있는 지금이 오히려 기회일 수 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 이런 정신이 알파요 오메가다."

-보수의 회복탄성을 믿고 보수의 역할을 기대하는 학자로서 길을 잃은 보수정당에게 다시 쓴소리를 한다면.

"과거 좋았던 시절의 추억을 모두 잊고 정말 새롭게 태어나 '우리 힘으로 한번 제대로 된 정당, 나라를 구할 수 있는 정당을 만들어 보자' 는 초심을 가졌으면 좋겠다. 우리의 비전은 무엇인가, 재집권하면 나라를 어느 방향으로 이끌 것인지 그림을 그리고 그에 필요한 역량을 키운다는 각오를 다져야 한다. 어쩌면 지금이 70여 년 만에 맞는 최고의 기회일 수도 있다. 사람을 키우고 공부하라. 민심은 늘 요동친다. 조급해 하면 진다."

◆박지향 교수는

서울대 문리과대학 서양사학과에서 학사와 석사를 마치고 뉴욕주립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석ㆍ박사 논문 모두 영국사가 주제였을 만큼 자본주의와 의회 민주주의의 발원지인 영국의 역사에 관심이 컸다. 2017년 1월 발간한 '정당의 생명력-영국 보수당'은 그런 작업의 결실이다. 그는 2003년 쓴 글에서 "서양사를 공부하겠다고 마음 먹은 1970년대 독일이나 러시아 등 '예외적' 역사에 관심이 많은 우리 학계 풍토에 대한 반발이 나를 영국사로 이끌었다"고 했다. 그는 또 "나는 계급이든 민족이든 혹은 민중이든 역사의 주체를 미리 결정하고 연구에 들어서는 사람을 무척 경계한다"고 했다. "민족주의나 사회주의 사관의 경직된 인식을 벗어나야 구불구불하고 비뚤어진 역사의 길들이 눈에 들어온다"는 이유에서다. 민족주의와 제국주의를 다룬 '슬픈 아일랜드'와 '제국주의-신화와 현실' 등 다수의 저서를 냈다.

인터뷰=이유식 논설고문 jtino57@hankookilbo.com

정리 = 변한나 논설위원실 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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