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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일 칼럼] 라스푸틴과 ‘드루킹’

입력
2018.04.18 16:34
2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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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4월16일 벌어졌던 세월호 참사가 지난 월요일 4주기를 맞았다. 최초 신고가 이뤄진 오전 8시54분부터 배가 좌현으로 108도 기울어져 더는 구조가 불가능해진 오전 10시17분(골든타임)까지 박근혜 당시 대통령은 무엇을 했을까. 검찰이 3월28일 내놓은 수사결과에 따르면 박 전 대통령은 재난 대응 시간이 막 지나 더 손을 쓸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린 10시20분께야 침실에서 나와 첫 보고를 받았다. 박 전 대통령은 김장수 국가안보실장에게 “단 한 명의 인명피해도 발생하지 않도록 하라”는 전화를 하고 난 뒤 다시 침실로 들어갔다. 세월호는 5분 후 완전히 침몰했다.

대통령은 다시 침실에 틀어박혔고 이영선 전 청와대 행정관이 청와대와 압구정동을 오가는 가장 빠른 길인 남산1호 터널을 통해 최순실을 청와대로 모셔온 때가 오후 2시15분. 최순실은 미리 대기하고 있던 ‘문고리 3인방’과 대통령이 좌정한 최초의 청와대 비공식 대책회의의 중요한 발언권자이자 의사결정권자였다. 최순실은 대통령의 인척도 아니고 아무런 공직 직함이 없는데도 청와대 관저를 무시로 드나들 수 있었고 한 정권의 명운이 달려있을지도 모르는 중요한 비공식 회의의 주재자이기도 했다.

4월6일에 있은 1심에서 박 전 대통령에게 징역 24년형과 벌금 180억 원이 선고되자, 영국의 두 유력지는 박근혜와 최순실을 러시아의 마지막 황제였던 니콜라이 2세와 라스푸틴의 관계에 비유했다. “이번 스캔들이 정치 지도자와 대기업 간의 이중거래망과 함께 라스푸틴과 같은 인물이 정부 내에서 권력을 휘두른 사실을 드러냈다.”(가디언) “라스푸틴과 같은 최순실이 공식 직위나 행정 경험, 비밀정보 사용 인가 없이 정부 기밀을 전해 받았다.”(더 타임스)

박근혜 국정농단 사건이 터지면서 서서히 유명세를 얻게 되었지만 도서관이나 시중에서 구해볼 수 있는 그의 평전이라고는 작년 봄에 나온 조지프 푸어만의 ‘라스푸틴’(생각의힘,2017)이 유일하다. 이런 사정은 ‘라스푸틴 사업’이라고 불러도 될 만큼 무수한 전기ㆍ역사물을 갖고 있는 유럽과 비교된다. 라스푸틴에 대한 유럽인의 관심은 그의 삶이 워낙 극적이었던 데다가 아직까지도 해명되지 않은 수수께끼가 많기 때문이다. 거기에 영국 정보부가 독일과 러시아의 강화를 막기 위해 독일 편향을 보인 그를 암살했다는 국제 정치역학까지 더해지면서 라스푸틴은 독자를 꾀기 좋은 음모론의 온상이 되었다.

그레고리 라스푸틴(1869~1916)은 시베리아 벽촌의 농사꾼 부모 밑에서 태어났다. 그의 십대 시절은 어느 마을마다 꼭 한 명씩 있는 우범 소년, 바로 그것이었다. 십대 때 이미 악명 높은 술주정꾼에다, 좀도둑이었고, 싸움꾼이었고, 난봉꾼이었다. 열여덟 살 때 두 살 연상의 이웃 마을 여자와 결혼하여 줄줄이 아이를 낳게 되지만 총각 때 버릇만은 하나도 버리지 않았다. 스물여덟 살 때 도둑질에 연루된 그는 처벌을 피할 속셈에서 마을 사람들에게 사정하여, 고향에서 520km나 떨어져 있는 성 니콜라이 수도원까지 순례 여행을 갔다 오는 것을 허락 받는다. 수도원에 머물면서 회개를 하고 뒤늦게 글까지 배운 그는 고향으로 돌아와 성모 마리아의 계시를 받는다.

전통적으로 정교일치 제도를 유지해온 제정러시아에서는 직업 사제들이 귀족이나 관료를 제치고 황제의 측근이 될 기회가 흔했다. 라스푸틴은 황제 부부의 외아들인 알렉세이 황태자를 혈우병으로부터 지켜냄으로써 ‘기적을 일으키는 자’로 숭앙받았다. 이후 그는 황제의 의중을 마구 주무르는 비선 실세가 되어 수상의 해임과 임명을 결정할 수 있는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하지만 평생 주색에 허우적거렸던 타락한 수도승의 손에 제정러시아가 패망한 것으로 이 평전을 읽으면 안 된다. 제정러시아의 패망은 니콜라이 2세가 무능했기 때문이고 라스푸틴은 잠시 그의 어리석음에 기생했다. 한창 시끄러운 ‘드루킹’ 사건을 보면 오늘날의 라스푸틴에겐 더 이상 기적을 일으키는 능력이 필요치 않다. ‘매크로 프로그램’이 권력자를 현혹할 기적을 대신해 준다.

장정일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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