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구나! 생생과학] 일상 속에 녹아 있는 히트펌프 원리

히트펌프 두 개를 적용해 성능과 효율을 향상시킨 듀얼 인버터 히트펌프 건조기. LG전자 제공

대한민국에 빨래 건조기 열풍이 불고 있다. 2016년까지 1년에 10만대 남짓 팔렸던 건조기는 올해는 100만대를 가뿐히 넘어서는 폭발적인 성장이 예상된다. 어린 자녀를 키우는 가정에서 앞다퉈 장만하고 신혼부부의 필수 혼수로도 자리 잡았다.

건조기 중에서도 대세는 배관공사가 필요한 가스식이 아니라 설치와 사용이 간편한 전기식이다. 이 같은 전기식 건조기 광고를 보면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용어가 있다. ‘히트펌프(Heat-Pump)’다. 의미는 영어 단어 그대로다. 펌프로 물을 퍼 올리듯 인위적으로 열을 이동시키는 게 히트펌프다.

건조기 인기와 함께 요즘 히트펌프가 사람들 입에 친숙하게 오르내리지만, 사실 히트펌프는 새로 튀어나온 기술이 아니다. 개념의 시작은 19세기 초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프랑스 물리학자 사디 카르노(1796~1832)가 1824년 발표한 ‘카르노 순환(사이클)’은 고온에서 저온으로 흐르는 열의 이상적인 순환을 의미한다. 유체가 등온팽창-단열팽창-등온압축-단열압축의 4단계를 순환하며 열을 일로 변환할 때 가장 높은 열효율을 내고, 일의 양을 결정하는 것은 뜨거울 때와 차가울 때의 온도 차라는 이론이다.

히트펌프의 원리는 자연 상태에서는 저온에서 고온으로 이동하지 않는 열을 인위적으로 옮기는 역(逆) 카르노 사이클을 바탕으로 한다. 에너지(전기)와 콤프레서(압축기), 콘덴서(응축기) 등 외부의 개입이 이런 사이클을 가능하게 만든다.

절대온도(켈빈온도)로 잘 알려진 영국 물리학자 캘빈이 1854년 히트펌프 기술을 제안했고, R-12라는 최초의 프레온계 냉매가 탄생한 1930년을 기점으로 대량 생산 및 상용화가 이뤄졌다. 당시 경제공황을 맞은 미국 산업계는 에너지 사용을 줄이기 위해 히트펌프 방식을 다양한 분야에 적용했다.

전기식 건조기에 탑재되는 인버터 히트펌프 구조. LG전자 제공

현재 시중에 나온 히트펌프 방식 전기 건조기들도 냉매의 상태를 변화시키고 이런 과정에서 나오는 열로 공기를 섭씨 50~60도로 데워 빨래를 말린다.

전기에너지를 열로 바꾸는 압축기는 저압 기체 상태인 냉매를 고압 기체로 만들어 열을 발생시키고, 응축기는 고압 기체 냉매를 액체로 변환시키는 역할을 한다. 이때 냉매가 발산한 열을 받아 온도가 올라간 공기가 건조기의 드럼 안으로 들어가 의류의 수분을 날린다. 액체 냉매는 증발기를 거치며 저압 기체로 바뀌고 다시 압축기로 돌아가 압축되는 과정이 반복된다.

과거 주류였던 히터식 건조기가 헤어드라이어처럼 전기로 직접 열을 만들어 세탁물을 말리는 것에 비해 히트펌프는 냉매의 형태를 변화시키는 데 전기를 사용하는 게 결정적인 차이다. 고온 열풍을 세탁물에 바로 보내는 게 아니라 습기를 제거하는 방식이라 히트펌프 건조기를 돌리면 옷감의 손상을 최소화할 수 있다.

냉매의 순환을 통해 열을 이동시키는 것은 에어컨도 마찬가지지만 건조기와는 작동 방법이 정반대다. 건조기는 따뜻한 공기를 드럼 안에 집어넣는데, 에어컨은 따뜻한 공기는 실외기를 이용해 외부로 빼내고 실내에는 차가운 공기를 공급한다.

2015년 국내에 전기식 히트펌프 건조기를 처음 선보인 LG전자도 개발의 시작은 ‘에어컨 뒤집기’였다. 출시 1년여 전부터 에어컨 작동방식을 역으로 설계하는 연구에 투입된 개발자들은 “어려워서 안 될 것 같고 에어컨처럼 전기료도 비쌀 것”이라 우려했다. 없어서 못 파는 현재의 건조기 인기를 생각하면 기우였다.

히트펌프 건조기 개발 초기 전기료 걱정을 날려버린 묘수는 LG전자가 축적한 세계 최고 ‘인버터(Inverter) 모터’ 기술이다. 전원 주파수를 바꿔 회전수를 정밀하게 조정할 수 있는 인버터 모터가 압축기에 결합하며 불필요한 전기료 낭비 없이 최적 가동이 가능해졌다.

LG전자는 지난해 12월 인버터 모터 두 개로 냉매 압축기 두 개를 동시에 돌리는 ‘듀얼 인버터 히트펌프’ 건조기도 선보였다. 히트펌프 1개에 비해 운전 효율과 건조 성능이 약 15% 향상됐다. 세탁물 5㎏을 표준코스로 1회 건조하는 최소 전기료는 117원에 불과하다.

삼성전자가 하이브리드 히트펌프를 적용해 올해 초 출시한 국내 최대 용량 건조기. 삼성전자 제공

삼성전자는 올해 초 출시한 국내 최대 용량(14㎏) 건조기에 ‘하이브리드 히트펌프’를 적용했다. 건조 초반에는 히터를 가동해 최적 온도에 빠르게 도달하고 이후에는 히트펌프로 건조하는 방식이다. 건조시간을 단축했고 겨울철 외부의 낮은 온도가 건조시간을 늘어지게 할 우려를 없앤 게 특징이다. 하이브리드 히트펌프는 스피드 모드 기준 1회 건조에 59분이 걸린다.

냉장고와 건조기에 사용되는 냉매가 확실히 구분되는 것은 아니고 제품에 가장 적합한 냉매를 선택해 사용한다. 건조기에 들어가는 냉매(R134a)가 일부 냉장고에 쓰이기도 한다. 다만 실외기에 응축기가 있는 에어컨에는 다른 냉매가 들어간다.

히트펌프는 가전제품뿐 아니라 다양한 곳에 녹아들어 있다. 수열이나 지열을 이용한 냉난방기, 비닐하우스 난방, 폐열회수 등에도 활용된다. 2014년 KT는 서울 목동 등의 인터넷데이터센터(IDC)에 공기 속에 숨은 열(잠열)을 끌어와 냉난방을 하는 시스템을 도입했는데, 이것 역시 히트펌프다. 현재 상용화된 히트펌프는 70도 이상으로 온도를 높이기 어렵지만, 일본에서는 이산화탄소를 냉매로 사용해 100도까지 열을 끌어올리는 히트펌프 기술도 개발됐다.

히트펌프는 연료를 태우는 연소를 동반하지 않아 이산화탄소 배출이 없다. 이런 친환경성에 산업계가 주목하고 있어 사용범위는 더욱 확장될 전망이다. 히트펌프를 적용한 난방 장비는 전기 히터나 보일러처럼 높은 온도를 얻을 수는 없어도, 잠열을 잘 활용하면 최대 3배나 높은 에너지효율을 뽑아낼 수 있다.

김창훈 기자 cnki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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