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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 세상보기] 글쓰기와 도라에몽의 팝콘 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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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 세상보기] 글쓰기와 도라에몽의 팝콘 모자

입력
2018.04.13 16:39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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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느 글쓰기 가이드를 보더라도 꾸준히 매일 쓰라는 가르침이 없는 경우는 드물다. 규칙적으로 생활하며 정해진 시간에 글을 썼다는 위대한 작가들의 예를 보노라면, 나도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5분 정도는 바람에 스치운다. 그렇지만 좋은 글을 쓰기 위해서는 꼭 규칙적으로 써야만 하는 것일까?

지구 위엔 사람이 많고 글쓰기 가이드 책에 나오지 않는 불성실한 작가도 많다. 예를 들면 ‘종교적 경험의 다양성’을 쓴 윌리엄 제임스는 자고 일어나는 시간조차 일정하지 않아서 가끔씩 밤낮이 바뀌곤 했으며 글을 쓸 때는 집안의 가구를 옮기거나 장작을 쪼개면서 최대한 일을 뒤로 미루곤 했다. 미루기로 치면 ‘지하생활자의 수기’를 쓴 도스토예프스키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도박으로 재산을 탕진하여 생활이 불가능한 지경이 되어야 펜대를 잡곤 했다.

글을 매일 쓰더라도 성실파 타입은 아니었으며 오히려 몸을 혹사시켰던 사람은 더욱 많다. ‘태양은 가득히’의 원작인 리플리 시리즈를 쓴 하이스미스 여사는 대낮부터 술을 부었고 대개는 맨정신이 아닌 상태로 작업했다. 또 이것은 주워들은 이야기지만 T.S 앨리엇은 몸이 아플 때 시를 쓰는 것을 좋아해서 늘 잔병을 달고 살았다고 한다. 둘 다 식사를 자주 걸렀고 자주 씻지도 않았으니 규칙적으로 생활했다고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규칙적인 글쓰기가 유리한 방법임은 의심할 바 없으나, 생활이 정돈되지 않아도 좋은 글을 쓰는 사람은 얼마든지 있다. 따라서 내 생각에 규칙성이란 여러 글쓰기 습관 가운데 하나이며, 규칙적으로 쓰는 사람은 운이 좋게도 더 나은 습관에 당첨된 것이다. 노력을 통해 좋은 습관을 만들 수도 있지만 쉽지 않다. 얼마나 어렵냐면, 매일 글을 쓰기 위해 이외수는 직접 만든 감옥에 들어가야 했다. 몇 권의 베스트셀러를 낸 어느 수필가는 매일 메모하는 좋은 습관을 가지고 있었지만 큰 일을 보는 습관이 시원치 않아 전용변기를 가지고 다녔다. 그 수필가는 대통령을 지낸 후 진짜 감옥에 들어갔다.

작가들의 글쓰기 습관은 특정한 옷차림으로 작업하거나 특정 펜만 사용하는 등 다양하다. 투수마다 고유의 투구 폼이 있으며 고치기 힘든 것처럼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빅토르 위고는 주로 알몸으로 글을 썼다. 랩퍼 출신 번역가인 UMC/UW는 특정 키보드를 사용한다. 만화가이자 칼럼니스트인 권용득은 글을 쓰기 전에 초등학생 아이와 선문답을 주고 받는 모양인데, 일하면서 육아를 동시에 할 수 있으니 좋은 습관이다. 한편으로는 마감에 쫓겨야만 글을 쓰는 사람도 있다. 작가 본인도 고생이고 편집자까지 고생시키는 습관이다.

나도 좋지 않은 글쓰기 습관이 있었다. 글을 쓰기 전에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문장을, 띄어쓰기나 쉼표 하나까지 모두 생각한 후 한번에 쓰곤 했다. 원고 분량 맞추기가 어려운 탓에 그 습관을 고치려고 무진 애를 썼다. 그리하여 매일 책상 앞에 앉게 되었지만, 머릿속에 아무 생각이 없기 때문에 글 쓰기 전에 단순한 게임을 계속하는 다른 습관이 붙어버렸다. ‘지저스팡’이라는 것인데 1시간쯤 반복하면 글이 써지니 필요한 사람은 시도해보라. 예수님의 제자들을 신나게 터트리는 게임이다. 덤으로 성경 퀴즈도 할 수 있다.

그런데 요즘에는 화가 날 때 글을 쓰는 사람이 많아진 것 같다. 토지공개념 때문인지 차별금지법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화날 때 글을 쓰다가 습관이 되면 이 또한 고치기가 어려울 것이다. TV판 신(新) 도라에몽 645화를 보면 팝콘 모자가 나온다. 화난 사람이 머리 위에 쓰면 분노에 의해 팝콘이 터지는 신기한 도구다. 그런데 팝콘을 먹으려고 억지로 화를 내는 지경에 이르자 동네 할아버지의 미움을 사고 말았다. 마찬가지로, 글을 쓰기 위해 화를 내야만 하는 지경이 된다면 작가와 독자 모두에게 불행한 일일 것이다.

손이상 문화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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