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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정의 독사만필(讀史漫筆)] 한반도의 국제열차

입력
2018.04.11 08:25
2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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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이 지난 달 25∼28일 열차를 타고 중국을 방문했다. 그의 아버지 김정일도 철도로 중국을 7차례 방문했는데, 때로는 동북 3성을 우회했다. 부자의 특별열차는 ‘움직이는 완벽한 요새’일 정도로 지휘와 방호 시설이 뛰어나다. 또 선로와 경호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쌍둥이 열차를 앞세우기도 한다. 북한의 열차는 어째서 중국을 직접 왕래할 수 있을까? 일제가 패전 전 동북아시아 특히 한반도에서 운행한 국제열차에서 그 연유를 찾을 수 있다.

한국과 중국의 간선철도는 모두 표준궤(궤간 1.435m)여서, 바퀴를 갈아 끼거나 궤조(레일)를 덧대지 않아도 열차가 국경을 넘어 곧바로 달릴 수 있다. 제국주의 시대에는 철도궤간(두 레일 사이의 넓이)이 세력범위를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였다. 그래서 열강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한 한반도에서 철도궤간은 지대한 관심사였다. 일찍이 대한제국은 ‘국내철도규칙’을 반포하여 표준궤를 채택했다(1896.7.15). 이미 경인선 부설권을 손에 넣은 미국의 예를 따른 것이다. 대한제국은 러시아의 압박을 받아 시베리아철도와 같은 광궤(1.5m)로 바꿨다가, 한반도에서 러시아 세력이 후퇴하자 곧 표준궤로 돌아갔다.

일제는 한반도에서 철도부설권을 독점한 후, 비용절감 등을 이유로 본국과 같이 협궤(1.067m)로 건설하자는 관료 등의 주장을 물리치고, 표준궤를 채용했다. 한반도 철도를 아시아대륙 철도와 연결시킴으로써 러시아에 맞서 독점적 세력권을 구축하겠다는 야심이었다. 당시 영국이 건설을 주도한 중국의 경봉선(북경-봉천, 지금의 심양)도 표준궤였다.

일제는 러일전쟁(1904∼05)에서 승리한 후 실제로 안봉선(안동-봉천, 지금의 단동-심양), 연경선(대련-장춘, 나중에 만주국 수도 新京)을 표준궤로 개축하고, 압록강철교를 준공하여 경의선(서울-신의주)과 접속시켰다(1911.11.1). 경의선은 경부선(서울-부산)의 연장선이었다. 그리하여 서울과 부산에서 출발하는 급행열차는 각각 장춘과 봉천까지 직행하게 되었다. 일제의 대륙진출이 활발해지자 한반도와 만주를 왕래하는 직통열차는 더욱 확대되고, 발착 거점도 관부연락선(下關-부산)과 접속하는 부산으로 바뀌었다. 철도에 관한 한 한만국경은 이제 장애물이 아니었다.

한반도를 누비는 국제열차는 일제가 만주국을 세우자(1932.3.1) 고속 급행열차로 진화했다. 부산-봉천-신경을 달리는 히까리(光, 1933.4.1)와 노조미(望, 1934.11.1)가 속속 등장했다. 두 열차의 일부는 하얼삔까지 달렸다. 조선총독부는 이에 뒤질세라 경부선을 6시간 45분에 주파한 특별 급행열차 아까쯔끼(曉)를 운행했다(1936.12.1). 일제는 중국본토침략을 개시한(1937.7.7) 후 부산-북경에도 직통 급행열차를 투입하고(大陸, 1938.10.1), 이듬해 흥아(興亞)를 증설했다(1939.11.1). 그리하여 경부선과 경의선은 명실공히 아시아대륙의 중추 간선이 되었다.

일제는 1930년대 이후 한국과 만주의 동북지역을 직접 연결하는 철도망을 구축하고 이 지역에서도 직통 국제열차를 운행했다. ‘북선3항’(청진ㆍ나진ㆍ웅기)이 일본을 왕래하는 동해항로와 한만철도를 이어주는 주요 결절지점이었다. 일제는 두만강에 도문교(남양-도문)와 상삼봉교(상삼봉-개산둔)을 가설하고 ‘북선3항’과 신경을 왕래하는 직통 열차를 운용했다(1934.3.31). 특히 나진-신경에는 급행열차 아사히(旭)를 배치했다. 나진-가목사(佳木斯, 북만주 소만국경에 위치한 도시), 서울-목단강(牧丹江, 동만주 시베리아철도와 교차하는 도시), 평양-길림(吉林, 만주 중부의 주요 도시)에도 직통 열차를 운행했다(1940.10.1).

한반도를 왕래한 국제열차는 1943년 4월 이후 감축과 운행중단을 되풀이했다. 일제의 패망이 임박한 1944년 2월부터는 국제열차의 대부분이 폐지되든가 화물열차로 전환되었다. 그런데 일제 패망 후, 한반도를 누볐던 국제열차 이름은 일본에서 모두 화려하게 부활했다. 특히 노조미와 히까리는 신칸센(新幹線)의 간판스타로 성가를 올렸다. 일본의 무딘 역사의식을 웅변하는 징표다. 남북대화가 재개된 지금 한반도를 울렸던 국제열차가 진정 한국인의 꿈(望)과 빛(光)으로 환생하기를 절실하게 고대한다.

정재정 서울시립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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