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이든 화이트(1928~2018)

#”역사학 쇄신” 사실로서의 역사 부정
“史料 위에 있지만 창조된 서술”
‘진짜 역사’ 강박 덜고 상상력 확장
#역사는 퍼즐 아닌 미스터리
“그의 입장은 궤변” 비판 많지만
절대ㆍ유일 확증적 역사를 경계
헤이든 화이트는 사료(史料)란 역사가의 메타적 기획으로 선택되고 상상력으로 가공된 제한적 사실(史實)이라며 유일의 역사가 아닌 하나하나의 역사를 옹호한 사학자다. 그는 주저 '메타 역사'에서 랑케 토크빌 헤겔 마르스크 등이 쓴 19세기 대표적 역사 서술의 장르와 수사법, 이데올로기를 문학적으로 분석, 사료에 앞선 언어적 하부구조 즉 메타 역사를 부각했다. William van Saun, Wesleyan University

순도 100% 객관의 역사가 가능하다고 믿을 사학자는 없을 테지만, 태생부터 오염된 사료로나마 최대한 ‘객관’해야 하는 노고를 대놓고 조롱하는 학자도 드물 것이다. 역사학을 신화ㆍ철학으로부터 독립시킨 19세기 랑케의 오연한 선언- 사실로서의 역사-은 E.H 카 등을 거치며 반박 당했고, 인류의 시간과 사건을 전유하다시피 하며 인류의 어제와 오늘, 심지어 내일을 인과의 사슬 안에 두려던 야심도 세계대전의 충격 속에 스러졌다. 생명과 삶, 세계의 이해와 해석은 점차 과학과 예술의 몫이 됐고, 홀로 선 역사는 실증의 과학으로도 창작의 예술로도 편입되지 못한 채 떠돌아야 했다. 다양한 의미로 쓰이는 ‘역사학의 위기’란 말이 저 조류 안에서 발아했다.

1966년, 38세 역사학자 헤이든 화이트는 역사학술저널 ‘History and Theory’에 발표한 에세이 ‘역사의 부담 The Burden of History’에서, 역사(학)가 과학ㆍ예술 양편의 비판을 모면하는 ‘페이비언(Fabian) 전술’의 진지 안에서 자신의 ‘중립적’ 자리에 안주한 데서 저 위기가 시작됐다고 주장했다. 즉 (사회)과학 진영이 ‘호전적 실증주의’를 앞세워 안이한 방법론과 조악한 메타포, 애매한 추정을 비판하면 역사는 경험적 순수과학으로서의 지위를 부인하며 직관 등을 내세워 예술 진영으로 도피하고, 예술적 무능을 질타 받으면 사료의 제약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는 ‘준(semi)과학’의 방패 뒤로 숨곤 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역사야말로 과학과 예술의 조화와 종합을 이루고 과거와 현재를 중재할 수 있는 장(場)이고, 주체라고 스스로를 정당화했다.

화이트는 그 전술의 효용이 이제 다했다고 진단하며 지식 진영의 다양하고도 타당한 비판들, 예컨대 역사를 “지성이 낳은 가장 위험한 산물”이라 했던 프랑스 시인 겸 사상가 폴 발레리의 말을 상기시켰다. “역사는 뭐든 정당화할 수 있다. 그래서 실은 아무 것도 아니다. 역사는 모든 입장을 품고선 언제든 어떤 입장을 뒷받침할 만한 사례를 들이민다. 지난 전쟁(1차대전)으로 역사의 전망만큼 전파(全破)된 것은 없지만, 정말 그게 역사 지식의 부족 탓인가?”

그는 역사(학)가 스스로 쇄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복잡한 것을 단순ㆍ간명하게 정리하고 낯선 것들로부터 익숙한 것을 도출해 게으른 피난처를 제공하려는 타성적 유혹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것, 동적이고 파열적인 실제 삶의 작동을 과감히, 기꺼이 수용해야 한다는 거였다. “역사가는 과거와 현재 사이의 그럴싸한 연속성을 (인위적으로) 구축하려 해서는 안 된다. 우리에게 단절을 일깨워줄 수 있는 역사, 불연속과 분열과 혼돈을 위한 역사가 우리의 새로운 터전이어야 한다.” 그가 말한 단절은, 인과의 해석 너머에서 작동하는 시간과 사건으로서의 역사를 의미하는 거였지만, 역사학의 오랜 전통과 ‘페이비언 전술’의 양다리 걸치기로부터의 단절이기도 했다.

에세이를 내고 7년 뒤인 1973년, 그는 주저(主著)인 ‘메타역사 Metahistory: The Historical Imagination in the Neneteenth-Century Europe’(천형균 옮김, 지식을만드는지식)에서 “역사는 이야기이고, 모든 이야기는 픽션(history as narrative)”이라고 선언, ‘랑케’의 미련을 과격하게 부정하며 ‘진짜 역사’라는 역사(가)의 허구적 강박을 덜고 역사적 상상력의 지평을 확장했다. 한국의 대입 논술 단골 주제라는 역사(서술)의 주관과 객관의 문제를 가장 혁명적으로 가로지른 논쟁적 역사학자 헤이든 화이트(Hayden White)가 3월 5일 별세했다. 향년 89세.

화이트의 주저 'Metahistory'와 한국어 번역서 '메타역사' 표지.

‘메타 역사’에서 그는 역사도 언어(문장)로써 시대와 사건의 상을 전달하는 “서술적 담론 형식의 언어구조”를 띄고 있는 만큼 형식상 “본질적으로 수사적((rhetorical)이고 시적(poetic)”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역사가도, 의도와 무관하게, 역사적 사실 외에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와 이데올로기(무정부주의, 보수주의, 급진주의, 자유주의)가 있으며, 잘 짜인 서사(narrative)로 독자를 그 결론으로 이끌어간다고 했다.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한 ‘장식적 형상화(figuration)’ 즉 예시적 전략으로서의 수사(은유, 환유, 제유, 아이러니)와 배치의 플롯 및 장르(로맨스, 희극, 비극, 풍자)를 그는 역사의 심층 패러다임이자 메타적 하부구조라 보았다. 사료(史料) 위에 서긴 하지만, 역사의 내용은 발견되는 것만큼이나 창조(as much invented as found)되며, 그런 점에서 역사 서술은 경험적으로 입증된 사실이나 사건보다 더 나아간다는 거였다. 모든 사료는 역사가의 메타적 기획과 상상력으로 선택되고 가공된 사료라는 점에서 제한적 사실(史實)이다, 라는 게 그의 핵심 논지였다. 훗날 인터뷰에서 그는 “과거의 사건은 단지 ‘과거(past)’로 주어진 것이지, ‘역사적으로(historically)’ 주어진 것이 아니다”(synthesis.enl.uoa.gr)라고 말했다. 2010년 저서 ‘The Fiction of Narrative: Essays on History, Literature and Theory 1957-2007’을 편집한 로체스터대 교수 로버트 도런(Robert Doran)은 “역사적 사실은 과학적으로 입증될 수 있지만, 이야기(Stories)는 그렇지 않다, 이야기는 만들어지는 것이지 역사적 데이터에서 발견되는 게 아니다, 역사적 의미는 플롯 형식 등을 통해 역사적 사실들에 부여되며 그 선택은 불가피하게 근본적으로 윤리적이고 정치적이다, 라는 게 화이트의 생각이었다”고 풀어 설명했다.(nytimes)

화이트는 ‘메타 역사’에서, 19세기 대표적 역사가인 미슐레와 랑케, 토크빌, 부르크하르트와 역사철학자인 헤겔, 마르크스, 니체, 크로체의 저술을, 문학비평가 노스롭 프라이(N.Frye), 구조주의자 야콥슨과 레비스트로스의 비평이론을 차용해 분석했다. 예컨대 ‘프랑스 혁명사’를 쓴 미슐레는 “고발ㆍ자유 그리고 암흑의 세력권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투쟁하는 정신력 등이 낳은 구제의 드라마”로 역사를 인식, 그것의 기록자로서 역사가를 상정해 로망스 형식으로 역사를 구성하고 은유로 설명한다고 분석했다. “이런 미슐레의 특징은 그의 저서 ‘프랑스 혁명사’에도 잘 나타나 있다. 혁명 첫해에 나타난 프랑스 정신에 대한 그의 설명은, 오랫동안 프랑스 정신과 대립관계에 있던 ‘인위적인’ 세력이 타파되고, 마침내 프랑스 정신이 순수한 상징화의 표상으로 떠오른 은유적 동일화의 과정과 합치되는 것이었다.”(위 책 역자 해설)

역사는 픽션이라는 화이트의 주장은, 당연히 거세게 비판 받았다. 역사 연구와 사료의 중요성을 무시한 극단적 (언어)형식주의자의 궤변이라는 비판, 언어의 중재 없이 역사적 사실에 접근할 수 없는 만큼 서술은 과거를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인데 언어만 분석했다는 비판, 네 개의 장르와 수사법으로 역사를 분석하는 것은 지나치게 단순하고 작위적이라는 비판, 역사가는 무엇도 창조(invent)하지 않으며 이미 존재하는 것들로 납득하기 쉽게 배열하고 설득력 있게 해석함으로써 특정 시대에 생명을 불어넣는데 역사가도 인간인 이상 그 과정에 창의와 상상력이 개입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한계 아니냐는 주장 등등. 역사적 진실에 대한 연구의 가치를 부정한다는 보다 근본적인 비판, 그의 상대주의적 역사관은 ‘역겨운 수정주의’에 부역하는 것이라는 지적도 있었다.(grin.com) 역겨운 수정주의란 나치 홀로코스트의 부정을 염두에 둔 지적이었지만, 홀로코스트 부정이야말로 제한적 경험을 근거로 한 만큼, 그 비판은 진실과 객관성이라는 역사의 영원한 논점에 대해 일관되게 ‘천박한’ 경험주의를 비판한 화이트에게는 과녁을 벗어난 지적이었다.

그의 이론은 포스트모던적 해체주의의 중심에 서서 절대 사실과 신성한(sacred) 역사의 지형을 지키려던 친(親)과학적 경험주의와의 논쟁을 확장했다. 사실 화이트의 의도는, 스스로도 말한 바, 역사를 ‘강등’시키려는 게 아니라, 과학과 예술 사이의 옹색한 점이지대에서 구출하려는 거였다. 과학은 가망 없는 짝사랑의 대상이었다. 그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카의 역사규정)로 인해 훼손될지 모르는 ‘사실’에 대한 강박과 고착화한 절대역사의 사슬, 즉 66년 에세이에서 말한 역사의 부담을 덜어주고자 했다. 그가 명예교수로 재직했던 웨슬리언 대 마이클 로스 총장은 “역사가로서 그의 생애를 이끈 동력은 해방의 충동이었다”며 2014년 강의 처음에 화이트가 언급한 말을 인용했다. “그는 우리에게 진짜 과거를 발견하라고 주문하지 않았다. 거꾸로 그는 진짜 과거란 없으므로 스스로 새로운 뭔가를 생각해야 한다고, 우리가 누구이며 어디서 왔는지 말해주는 다른 누군가의 생각(기존 역사)에 사로잡히지 말라고, 역설적으로 우리는 과거의 의미를 재해석함으로써 새로운 미래를 창조할 기회를 지녔다고 말했다.” 헤이든 화이트는 “역사는 우리의 상상력을 억제(burden)할 수도 고양(resource)시킬 수도 있다”고 강조했고, “역사의 짐을 벗어 던지고 얻은 그 상상력으로 학문 세계의 규율과 문화적 전통, 정통, 정치 이데올로기를 밀쳐내고, 우리의 현재와 미래를 만들 수 있다고 가르쳤다”고 말했다.(roth.blogs.wesleyan.edu)

’역사는 픽션’이라는 화이트의 주장은 사료적 가치의 부정이 아니라 사료(물증)에 근거한 확정적 역사, 죽은 역사의 부정이었다. 사진은 2015년 10월 역사교과서 국정화 반대 시위. 그는 역사교과서 국정화에 가장 앞장서 반대했겠지만, ‘친일 교과서’는 없애야 한다는 주장에도 아마 반대했을 것이다. 자료사진

헤이든 화이트는 1928년 7월 12일 테네시 주 마틴(Martin)에서 태어났다. 자동차 직공이던 아버지를 따라 테네시와 디트로이트를 오가며 성장했고, 2차대전 해군으로 복무한 뒤 제대군인원호법(G.I. Bill)의 혜택으로 웨인(Wayne) 주립대를 졸업, 52년 미시건대에서 역사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풀브라이트 장학생으로 로마로 건너가 중세 교회개혁을 연구했고, 56년 미시건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믿음과 기적에 기반한 기관(로마 가톨릭교회)이 어떻게 천 년 넘게 군주와 정치권력 위에 군림할 수 있었는지 궁금했다. 어떻게 믿음이 가능하고, 어떻게 기적을 신뢰하는지. 경험적 이성주의자라 자부하던 나는 그 비이성이 흥미로웠다”고 아테네대 인터뷰(위 링크)에서 말했다. 메타역사에 대해서는, 로마 체류시절 영문학에 매료됐고 입센의 ‘헤다 개블러(Hedda Gabler)’ 같은 작품 안에서 조롱 당하는 사학자들의 이야기를 읽으며 역사보다 메타역사에 자연스레 관심이 끌렸다고 2009년 2월 ‘History and Theory’ 대담에서 말했다. 역사의 위기와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적 자장에도 끌렸을 것이다. 그는 문화사학자로서 자신이 본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을 설명하며, 모더니즘이 자본주의와 상품화, 소비주의, 교환가치로부터 배제된 옛 가치들을 지키며 새로운 활력을 모색했다면, 포스트모더니즘은 니체의 허무주의적 충격(배제)을 완수하려는 동력에서 비롯됐다”며 “역사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은 ‘비규범적(non-normative)’인 영역들, 퀴어히스토리나, 후기식민지, 서발턴, 환경 등의 새로운 장을 개척했다”고 말했다. 66년 에세이에서 말한 역사의 단절과 부담으로부터의 해방이 저 새로운 미시 역사의 토양이었다.

캘리포니아대 교수 시절인 1972년 화이트가 LA 경찰서장(Edward M, Davis)를 고소한 것은, 그의 방식으로 말하자면, 생애사의 단절이고 돌출적인 사건이었다. 학내 정보활동의 일환으로 경찰관이 학생으로 등록해 강의 등 수업 중 발언을 사찰하는 것이 못마땅했던 그는 경찰서장이 공공예산을 불법적으로 전용해 사찰활동을 하고 있다고 고소했다. 1심, 2심에서 패소한 그는 대법원에 항소했다. 하지만 75년 3월 캘리포니아주 대법원은 만장일치로 하급법원의 판단을 뒤집었다. 대법원은 판결문에서 “학문의 자유라는 민감한 문제를 염두에 둘 때, 경찰의 은밀한 사찰 행위는 수정헌법 1조의 권리(표현의 자유)와 주법이 보장한 사생활의 권리를 심각하게 침해한 것으로 판단된다.(…) 수업 중 논쟁 과정에서는 반박의 위험을 무릅쓰고 새로운 이론의 시험적 제안도 제기될 수 있다. 그런 잠정적인 가정을 정보원이 걸러 기록하고, 상급자에게 보고되는 과정에 왜곡되기도 할 것이다.(…) 오직 용감한 영혼만이 그런 상황에서 정통에서 벗어난 어떤 발언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대학 강의실은 자유 토론의 장이어야 한다. 대학 사찰은 바로 그 기능을 파괴하는 행위다”라고 밝혔다.

문학적으로 보자면, 저 사건은 그의 삶 전반에 대한 복선 혹은 알레고리라고도 이해할 만했다. 그는 자신의 연구에 가장 지속적으로 자극을 준 학부 시절의 은사의 가르침이 있었노라고 말년의 책 ‘The Practical Past’(2014)에 적었다. 웨인주립대 시절 스승인 윌리엄 보센브룩(William J. Bossenbrook)은 젊은 제자들에게 역사란 근본적으로 사상과 가치와 꿈이 서로 충돌하는 이야기라며, “그건 풀어야 할 퍼즐이 아니라 끊임없이 숙고해야 할 미스터리로 남아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화이트는 은사의 저 말을 12세기 유대 철학자 모세 마이모니데스(Moses Maimonides)의 성서 해석에 대한 통찰과 나란히 두고 생애의 가르침으로 여겼다. 마이모니데스는 “창조는 거대하고 복잡하며, 신의 뜻은 인간의 이해 너머에 있으므로, 성서 해석의 목표도 가능한 해석들을 최대한 늘리는 것이어야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insidehighered.com) 절대ㆍ유일의 권위적 해석이 중세의 어둠을 낳았음을 그는 경계했을 것이다.

‘역사는 픽션’이라는 화이트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 학자는 지금도 많을 테지만, 그렇다고 그가 사료 연구의 중요성을 부정했다고 여기는 학자도 없을 것이다. 그가 경계한 것은 사료(물증)에 근거한 확증적 역사, 화석화한 역사였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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