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의 현란한 이미지 외교행보
비핵화 실체는 수구적 해법 머물러
북한 감싸기 아닌 이끄는 데 진력을

김정은이 달라졌다고 한다. 겉에 드러난 걸로 보면 틀린 말은 아니다. 신년사에서의 대담한 남북대화 제의를 시작으로 남북 고위급회담 개최, 평창올림픽 대규모 대표단 파견, 이어진 남북ㆍ북미 정상회담 개최 타결, 거기다 지난달 전격적인 북중 정상회담까지 불과 석 달 사이 그가 보인 파격ㆍ광폭 행보는 정신을 헷갈리게 할 정도다. 며칠 전에는 우리 예술단의 평양 공연을 관람하고 출연진과 다정하게 포즈도 취했다. “자본주의 날라리풍”이라며 남한의 대중문화를 한껏 매도했던 게 누구였나 싶다. 남북ㆍ북미 정상회담 전후로 북러ㆍ북일 정상회담 얘기까지 나오니 이 정도면 국제 정상외교의 큰손이라 해도 손색이 없을 듯하다.

하지만 냉정히 보면 그를 국제사회의 지도자 반열에 올릴 만한 근거는 아직 없다. 정상회담을 포함한 고위급 접촉 과정에서 드러난 여러 잡음은 그렇다 쳐도 북핵 문제에 대한 여전한 냉전적, 수구적 자세를 보면 갈 길이 한참 멀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김정은이 북핵과 관련해 지금까지 한 주요한 언급은 ‘비핵화 의지’와 이행 방법에서 ‘단계적, 동시적 조치’를 강조한 것뿐이다. 1993년 1차 북핵 위기 이후 25년간 북한이 반복적으로 주장한 것과 하등 다를 게 없다. 앞으로 있을 정상회담 무대에서 어떤 깜짝 결과가 나올지는 모르나 이런 계산법이라면 의미 있는 북핵 해법이 도출되기는 쉽지 않다. 김정은의 현란한 이미지 변신을 목격하면서도 실체와 의도를 의심하고 경계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북핵 중재자를 자처한 우리 정부는 김정은 홍보맨이 된 듯하다. “유리그릇 다루듯 하라”는 문재인 대통령의 말처럼 남북관계가 불면 날아갈까, 쥐면 부서질까 조심스러운 것은 맞다. 하지만 그렇다고 김정은의 일거수일투족에 일희일비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정부 입장에서는 오랜만에 펼쳐진 대화의 판이 깨지는 것을 우려할 수 있겠지만, 대화 자체가 비핵화라는 목적에 우선할 수 없음은 당연하다. 정부가 취해야 할 처신은 실체가 불분명한 김정은의 이미지 행보에 환호할 게 아니라 비핵화 열차를 탈선시킬 수 있는 잠재적 변수를 예의 주시하며 신중에 신중을 기하는 것이다. 우리 예술단과 함께 평양에 간 도종환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8월 아시안게임 단일팀 구성, 겨레말 큰 사전 공동제작, 개성 만월대 공동발굴 사업 등 설익은 남북 구상을 거침없이 쏟아 냈다. 공연장의 흥분에 취해 한 말일지 모르나 냉정해야 할 당국자의 언행은 아니다.

남북관계가 최소한 비핵화 협상을 앞서 가서는 안 된다는 한미의 기본 인식에 충실하다면, 정부의 노력은 북미의 비핵화 해법 간극을 좁히는 데 집중돼야 한다. 김정은의 언급대로 북한의 입장은 ‘단계적 비핵화’다. 과거 수십 년 보아 왔고, 실패로 점철됐던 그 방식이다. 이런 실패를 절대 반복하지 않겠다는 게 미국의 ‘선 비핵화, 후 보상’이다. 이에 대해 정부는 ‘포괄적 합의, 단계적 이행’이란 중재안을 내놓았다. 선뜻 머리에 들어오지는 않지만, 북미 정상이 비핵화와 평화협정 체결에 원칙적으로 합의하면 구체적 이행은 그 후 단계적으로 풀어간다는 뜻으로 이해된다.

이 중재안을 시비할 생각은 없다. 김정은의 단계적 비핵화를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처럼, 북한의 일방적 무장해제를 요구하는 미국의 리비아식 해법도 현실적이지는 않다. 기껏해야 16㎏ 정도의 고농축우라늄만 갖고 있던 리비아와 핵 전력 완성 단계에 이른 북한을 똑같이 비교할 수는 없다.

문제는 단계적 비핵화라도 과거와는 다른 단계적 조치여야 한다는 것, 그래서 미국이 불신을 접고, 한발 물러설 수 있는 수준의 진전된 비핵화 조치가 선행돼야 한다는 것이다. 다만 반 발짝이라도 북한이 먼저 움직여야 한다는 점에서 열쇠는 김정은이 쥐고 있다. 그래서 김정은에게 촉구한다. 우리 대북 특사단에게 언급한 대로 정상국가 지도자로 대접받고 싶다면 더 이상 꼼수 부리지 말고, 선제적으로 행동하라고 말이다. 국제사회 리더로서의 김정은의 변신은 그래야 완성된다.

황유석 논설위원 aquariu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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