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투 운동이 사회 각계로 퍼져나가고 있다. 서지현 검사의 폭로로 촉발돼 법조계와 문화계, 정치권 그리고 종교계로까지 확산되고 있다. 거기에는 자신이 신뢰했던 이들을 대상으로 하여 터져 나온 폭로가 주는 충격과 당혹감, 그리고 배신감과 분노가 뒤섞여 있다. 또 그간 사회적 위계 속에서 침묵하며 고통을 감수해왔던 분들이 보여주는 ‘용기 있는 폭로’에 대한 지지도 이어진다.

그러나 성추행과 성폭행 등 누구나 분명하게 알 수 있는 성폭력 문제에 있어서는 단호하게 그것이 범죄임을 말하는 이들조차, 성희롱 같은 문제에 들어가면 애매한 입장을 드러내는 경우가 종종 있다. 왜 그럴까. 그것은 성희롱 같은 ‘언어폭력’ 이나 과거의 일상화되고 관행화된 그런 행태들이 본래는 폭력이었다는 걸 잘 인지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기서 발생하는 ‘인지부조화’는 심지어 ‘펜스룰’ 같은 방어적인 성차별 문화를 발생시키기도 한다. 마이크 펜스 미국 부통령이 말했듯, “아내 외엔 밥도 먹지 않는” 방어적 선택을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미투 운동이 그 기저에 깔린 성차별과 성별 위계 같은 적폐 권력의 문제를 바꾸기 위한 것이고, 근본적으로는 정치적 민주화, 경제적 민주화에 이어 성 평등 민주화를 추구하고 있다는 걸 생각해보면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은 ’배제‘의 의미를 갖는 또 다른 성차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미투 운동을 남녀의 대결적인 관점으로 보면 오히려 그 본질이 흐려지게 된다.

지금껏 성폭력을 당한 피해자들이 침묵하며 고통의 세월을 살아오는 동안 어째서 가해자들은 버젓이 승승장구하는 삶을 살아왔는가를 생각해보면 미투 운동이 진정으로 건드리고 있는 것이 성차별과 성별 위계 같은 적폐 권력의 문제라는 걸 우리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만일 이러한 성범죄에 대해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사회 분위기였다면 이런 폭력들이 이처럼 만연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제는 침묵하지 않고 말할 수 있는 분위기를 이 미투 운동이 만들어내고 있다는 건 그 자체로도 고무적인 일이다.

미투 운동이 근본적인 문제들을 해결해내는 방향으로 흘러가기 위해서는 분노의 감정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 연일 보도되는 기사에 분노하면서도, 동시에 그간 일상화되고 관행화되었던 성 차별적 문화들을 다시금 돌아보고 그것이 상대방에게 어떤 감정을 갖게 했는가에 대한 ‘감수성’을 깨워내야 한다.

혹자들은 미투 운동 이후 남성과 여성이 어떻게 만남을 가질 수 있는가를 묻는다. 하지만 이건 아무런 변화나 노력을 시도하지 않은 채 단지 문제의 소지에서 벗어나겠다는 퇴행적인 생각이다. 미투 운동을 창시한 타라나 버크는 이런 문제들로부터 자유롭기 위해서 여성들로부터 멀어지는 것이 유일한 해결책이라는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창피한 일’이라고 말한 바 있다. 즉 그러한 사고와 행동은 스스로를 자제력이 없고 신뢰할 수 없다는 말이나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미투 운동은 성차별과 성별 위계 같은 적폐 권력의 구조들을 해체시키는 사회적 접근과 동시에 우리네 일상 속으로 들어와 있는 잘못된 성 차별적 인식에 대한 감수성을 높이는 문화적 접근이 병행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응당 처벌되어야 하는 범죄적 차원의 문제들이 일부 해결된다고 해도 또 다른 일상에서의 폭력이 아무런 감수성 없이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남녀는 분명 다른 존재이고, 그렇기 때문에 남다른 감수성 없이는 진정한 이해에 도달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감수성이 부재한 대결적 관점은 미투 운동에 또 다른 적폐가 될 수밖에 없다. 남녀이기 때문에 다르지만, 동시에 같은 사람으로서 공감하고 그것을 자신에게도 반추하는 일. 그것이 미투 운동이 지향해 나가야할 지점이다. 미투 옆에 ‘위드 유’가 있듯, 이건 저들이 아닌 우리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정덕현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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