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곡 전문 프로듀서 권석홍 RBW 제작이사

알비인제이가 공연 리허설을 하고 있다. 알비인제이는 스트링 세션과 크로스오버 음악을 전문으로 하는 연주 팀이다. 알비인제이 제공

걸그룹 여자친구의 ‘시간을 달려서’와 가수 아이유의 ‘스물셋’, 보이그룹 비스트의 ‘픽션’은 전형적인 아이돌 노래다. 경쾌한 리듬이 곡을 지배한다. 하지만 가만히 귀 기울여 들으면 가수의 청량한 목소리와 격한 드럼 비트 아래 깔린 클래식 연주 소리를 들을 수 있다. 화려한 전자음 뒤에 숨어 있는 이 클래식 악기들은 자칫 경박해질 수 있는 곡의 분위기를 조절하며 듣는 재미를 더한다.

세 곡 모두 가요기획사 RBW의 권석홍(48) 제작이사 겸 프로듀서가 현악기 연주(스트링 세션)를 위해 편곡을 한 뒤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가요계에서 컴퓨터로 만들어낸 음을 곡에 주로 사용하고, 현란한 전자음이 대세로 자리잡고 있지만 권 프로듀서는 연주자들이 직접 참여하는 스트링 세션의 가치를 여전히 믿는다.

“가요에 삽입되는 스트링 세션은 ‘천연 조미료’, ‘유기농 식재료’ 같은 존재에요. 바이올린, 첼로 같은 악기 소리가 스며들면 곡이 더 고급스러워지고 생명력이 생기거든요. 한국 사람들은 오케스트라 소리를 좋아해요. 아름다운 음이 배가 되면서 곡의 감성도 짙어지죠.” 스트링 세션 및 크로스오버 전문 연주팀 알비인제이의 박은해 단장(38)이 옆에서 듣고 있다가 거든다. “음식도 어떤 조미료가 들어가는지 모르지만, 맛이 날 때가 있잖아요. (우리도) 사람들이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에 곡을 풍성하게 만드는 역할을 하고 있어요.”

권석홍 프로듀서는 “예전엔 클래식 전공자들이 스트링 세션을 할 때 학과 교수들 몰래 하는 경우가 많았다”며 “지금은 인식이 많이 바뀌어서 스트링 세션에 관심을 보이는 전공자도 늘었다”고 말했다. 배우한 기자
“클래식 전공자들, 가요라고 쉽게 접근하면 낭패”

권 프로듀서의 이력은 화려하다. 2001년 가수 서영은의 2.5집 프로듀싱을 시작으로 에일리의 ‘첫눈처럼 너에게 가겠다’(tvN ‘도깨비’ OST), 윤미래의 ‘올웨이즈’(KBS2 ‘태양의 후예’ OST), 바이브의 ‘술이야’, 백지영의 ‘잊지말아요’, 에이핑크의 ‘노노노’, 엠씨더맥스의 ‘어디에도’, 리쌍의 ‘발레리노’ 등 유명 곡 작업에 참여했다. 권 프로듀서의 손을 거친 곡만 1,300여곡이 넘는다. 최근 2018 평창동계올림픽 시상식에서 쓰인 음악도 작업했다. 그는 알비인제이를 이끌고 있기도 하다.

클래식 악기를 다루니 우아한 작업처럼 보여도 매번 전투 치르듯 일한다. 앨범 제작할 때 후반 작업에 해당하는 스트링 편곡은 주로 작곡가가 곡을 만들고 가수의 녹음 날이 잡히면 일이 떨어진다. 녹음 일주일 전 곡을 받으면 그나마 여유가 있는 편이다. 녹음 직전 스트링 편곡을 부탁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내일 녹음이라고 해 작곡한 데이터를 넘겨달라고 했더니, 아직 작곡이 안 끝났다고 한 경우도 있었어요. 바이브의 ‘술이야’도 그런 식으로 작업했고요.” 작곡가가 주로 반주, 미디 악기, 코러스 등 작업물을 세 파트로 나눠 보내주면 그 데이터를 가지고 클래식 악기와의 조합을 연구하며 편곡한다.

14~15명의 연주자가 합을 맞춰야 하는 스트링 세션팀도 발 빠르게 움직여야 한다. 녹음 일정이 급하게 잡힐 때가 많아 개인 스케줄을 조정하는 것부터가 만만치 않은 일이다. “악보를 보자마자 바로 좋은 소리를 내야”하기 때문에 실력 있는 클래식 전공자가 필요하다. 여기에 가요 스타일에 대한 이해와 감각까지 더해져야 한다. 정통 클래식과 달리 다채로운 시도와 특이한 기법이 들어가는 경우가 많아 클래식 음악만 해 본 전공자들이 쉽게 생각하고 접근했다가는 낭패를 보기 쉽다.

편곡을 할 때는 “곡의 어떤 요소가 가장 중요한지를 알아야 한다.” 스트링 세션의 선율을 부각시키고 싶은 욕심에 화려한 기교를 썼다가는 가수의 목소리도, 클래식 연주의 매력도 살리지 못한다. “어떤 곡은 기타가, 어떤 곡은 가수의 목소리가 중심이 될 수 있어요. 어떤 요소를 중점으로 살려야 할지 알아야 조화로운 음악을 만들 수 있죠. 욕심을 덜고 절제해야 해요.”

그런 그도 내심 욕심을 낸 작품이 있다. 현란한 스트링 세션 연주가 돋보이는, 걸그룹 여자친구의 ‘시간을 달려서’는 “마음대로 만들어 보라”는 작곡가의 제안에 원 없이 풍성한 연주를 설계했다. 드라마 ‘도깨비’ OST로 쓰인 가수 에일리의 ‘첫눈처럼 너에게 가겠다’도 애착이 가는 노래다. 그는 “처음엔 평범한 발라드라 생각했는데, 스트링 세션 녹음을 하고 나니 히트할 것이란 예감이 들었다”며 “곡의 구성이 쉬워서 연주자들이 더욱 몰입해 연주했고, 감성이 더 살아난 듯하다”고 말했다.

알비인제이는 세션 연주자가 아닌 아티스트로의 성장을 지향한다. 권석홍 프로듀서는 “가요 세션 녹음만 하고 가는 건 녹음 기술자지 아티스트가 아니다”며 “개개인이 스트링 세션 외에 자신의 음악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하려 한다”고 말했다. 알비인제이 제공
편곡가로 인정 못 받아… 크로스오버 가능성에 주목

스트링 세션 편곡가들은 편곡가로도, 실연자로도 인정받지 못한다. 저작권료도 받지 못하고 정식 계약서도 없다. 심지어 가수의 앨범에 편곡자로 이름을 올리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권 프로듀서는 최근 포털 사이트에 프로필을 등록하려다 참여한 기록을 입증할 길이 없어서 대표작들을 올리지 못하기도 했다.

음악을 만드는 과정과 참여자들의 역할이 세분화됐지만, 여전히 작곡·작사·편곡 등 단순하게 나눠진 역할 분배 체제가 만들어낸 현실이다. “이제 편곡이 중요한 시대가 왔는데, 저작권료 배분은 작곡·작사·편곡이 5대5대2 수준입니다. 스트링 편곡은 실연자로도 해당이 안 되니 정책이 업계 현실을 따라가지 못해요. 그래서 스트링 편곡가들이 많이 줄었고 시장도 작아졌죠.” 고정된 사회 기준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생각에 속상한 때도 있었지만, “검색이 되지 않는다고 한 일이 가짜가 되는 건 아니다”라며 마음을 다독인다.

제작비용을 줄이기 위해 컴퓨터 등을 활용한 미디어 작업을 하는 이들이 늘면서 스트링 세션의 입지는 점점 좁아지고 있다. “실제 연주를 따라갈 순 없지만” 최근 기타, 드럼 외에 스트링 분야의 미디 악기의 수준이 높아진 것도 현실이다.

그래서 권 프로듀서는 크로스오버 음악의 가능성에 집중했다. 알비인제이를 단순한 스트링 세션이 아닌 아티스트를 키워 해외 시장으로 진출시키는 발판으로 삼을 계획이다. 알비인제이는 지난해 5월부터 ‘뮤직갤러리’라는 정기 프로젝트를 통해 17개의 싱글앨범을 발매했다. 대체로 연주곡이지만, 가사가 들어간 결과물도 3곡 정도 된다.

“스트링 연주는 들었을 때 감성이 직관적으로 전달돼 언어의 장벽이 없죠.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비주류 음악으로 여겨지지만, 해외는 어느 정도 시장이 형성돼 있어요. 정통 크로스오버 음악뿐 아니라 대중이 클래식을 가깝게 느낄 수 있게 다양한 시도를 할 예정이에요. 그동안 K팝 음악을 연주하며 쌓은 대중적 감각을 활용하면서 우리만의 색깔을 만들려고 해요.”

이소라 기자 wtnsora21@hankookii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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