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 그날 밤에 논현동 근처에서 술자리가 있었다. 한참 술잔을 기울이고 있는 동안 거기서 멀지 않은 이명박(MB) 전 대통령의 자택에서 구속영장이 집행되었다. 원래 이날 예정된 구속영장 실질심사가 일단 취소됐다는 보도가 있어서 영장 실질심사가 언제 재개될 것인지, 과연 구속영장이 발부될 것인지로 술자리에서 티격태격하고 있을 무렵 MB는 이미 동부구치소로 떠나고 있었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타고 전해진 MB 구속 소식을 듣고서 나는 꼭 10년 전 눈발이 흩날리던 2월 MB가 대한민국 대통령으로 취임하던 날이 떠올랐다. 그 며칠 전에 불탄 숭례문도 아른거렸다. ‘다이내믹 코리아’의 지난 10년을 별 사연 없이 살아 온 한국인은 많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정권에 비판적인 사람을 뽑을 수 없다는 이유로 교수 임용에서 떨어졌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나는 대통령이 누구냐에 따라 나 같은 필부의 인생도 극적으로 바뀔 수 있구나 하고 절감했다. 나보다 훨씬 더 중요한 위치에 있던 분들에게는 삶의 변화가 더 극적이었을 게다. 단순한 정권교체가 아니라 세력교체, 세대교체가 더 필요하다고 여겼던 사람들은 김대중ㆍ노무현으로 대변되는 이른바 비주류 집권 10년이 5년만 더 지속되었어도 세상이 크게 달라졌을 거라고 아쉬워 한다. 그분들에게 MB 당선은 재앙이었다.

물론 MB의 당선으로 삶이 더 좋아진 사람도 있었다. 과학계에서도 MB에 기대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그의 대선공약이었던 과학 비즈니스 벨트 사업은 그 자체로 상당히 매력적인 면이 있었다. 과학 공약만 보고 투표를 했다면 아마 나도 MB에게 표를 줬을 것이다. 학계의 이익과 자신의 정치성향이 충돌할 때 어떤 기준을 따를 것인가는 흥미로운 주제이다. “설마 MB가 나라를 말아먹기야 하겠어?”라는 생각이 강해지면 선택은 더욱 어려워진다. 나는 정치성향을 좇아 투표했지만, 설마 MB가 나라를 이렇게까지 말아먹으리라곤 상상하지 못했다. 이번에 검찰이 제시한 MB의 혐의만 12개 안팎이고 수사기록은 무려 8만 쪽에 이른다고 한다. 보통 사람의 상상력을 초월하는 수준이다. 2007년 대선 당시에는 MB를 지지하든 반대하든 “설마 MB가...”하는 암묵적으로 합의된 믿음이 있었다.

뿐더러 설령 누군가가 그렇게 나라를 말아먹으려 한다 하더라도 지금까지 우리가 구축해 온 시스템이 그런 범죄를 용납하지 않으리라고 믿었다. 김대중ㆍ노무현 10년을 거치며 한국 사회가 한층 성숙했기 때문에 보수 정권이 다시 들어서더라도 역사의 바퀴를 뒤로 돌리지는 못할 거라는 믿음, 아니 자신감이 있었다. 결과를 놓고 보자면 우리의 그런 믿음과 자신감에는 허점이 많았다.

산업화와 민주화를 거치며 여기까지 오는 동안 다들 힘들게 살아왔으니, 이제 좀 누리고 살자는 욕망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정당한 욕망이 탐욕의 수렁으로 빠지지 않게 하는 것이 지도자의 책무이다. 불행히도 MB는 탐욕의 화신이었던 것 같다. 게다가 우리 사회가 역사의 역방향으로 밀리지 않도록 괴어 놓았던 버팀목이 아직 튼튼하지는 않았다. 검찰이, 특검이, 언론이 굄목의 역할을 똑바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역사의 경사면을 타고 뒤로 굴러가기 시작했다. MB가 구속되자 여기저기서 어쨌든 전직 대통령이 구속되는 사태는 대한민국 헌정사의 불행이라고들 말한다. 그러나 정확히 말하자면 MB는 당선 자체가 우리 헌정사의 불행이었다. MB가 유력정당의 대선후보가 되고 결국 대통령에 당선되기까지 단 한 번도 검증 기제가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희대의 사기꾼은 어느 시대에나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그런 인물이 국가의 최고지도자가 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다.

2007년 대선 당시 BBK 주가조작 논란이 한창일 때 MB는 자신의 명함이나 동영상 증거조차도 인정하지 않았다. 권력기관과 언론은 MB의 부인을 사실상 추인했다. 나는 그때 우리가 여태 쌓아 올린 문명의 한 귀퉁이가 무너지는 느낌을 받았다. 기록은 문명의 출발이고 확립된 사실은 다음 단계를 위한 디딤돌이다. 탐욕의 카르텔은 너무나 쉽게 공모해서 그 출발점과 디딤돌을 지워버렸다. 그 위에 세워진 흉물은 하나같이 문명 파괴의 기념비였다. 눈에 보이는 4대강 수중보나 국가안보와 맞바꾼 초고층 건물도 그렇지만, 정보기관과 군대까지 동원해 여론을 조작한 행위는 문명파괴자로서의 MB 정권의 면모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따라서 MB 구속은 비리혐의가 많은 전직 대통령 한 명을 처벌하는 것에 그쳐서는 안 된다. 오랜 세월 우리를 짓눌렀던 탐욕의 카르텔을 해체하고 대한민국의 새로운 문명사적 전통을 세우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전직 대통령이 넷씩이나 구속된 역사가 그리 아름다울 리는 없다. 그러나 너무 불행하다고 자책할 이유도 없다. 전두환ㆍ노태우를 구속시켜 성공한 쿠데타를 처벌했고 오로지 촛불만으로 박근혜를 파면시킨 우리들이다. 자칫 불행해질 수도 있는 현실을 아름다운 새 역사로 바꿀 저력이 있다.

이종필 건국대 상허교양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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