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영무(왼쪽부터) 국방장관, 피우진 보훈처장, 이낙연 총리, 빈센트 브룩스(맨 오른쪽) 주한미군사령관 등이 서해수호의 날인 23일 국립대전현충원 천안함 46용사 묘역을 찾아 참배하고 있다. 대전=연합뉴스

“아빠, 북한 정말 나빠. 근데 왜 통일을 해야 돼?”

초등학교 4학년 막내 녀석이 따지듯 묻는다.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이다. 3ㆍ1절을 맞아 경기도 평택에 있는 해군 2함대사령부에 다녀왔다. 우리 가족의 안보현장 체험이었다. 총탄에 맞아 무수히 구멍이 뚫린 참수리 357호정과 처참하게 둘로 쪼개져 흉물스런 천안함 선체를 유심히 살펴보더니 제 딴에 내린 결론이란다. 요즘 뉴스를 가득 채운 남북의 훈훈한 분위기와는 많이 달랐나 보다. 뭐라고 대꾸를 하려다 딱히 떠오르는 말이 없어 서해의 칼 바람을 핑계로 등을 떠밀었다. “엄마가 춥단다. 빨리 차에나 타.”

서울로 돌아오는 길. 고속도로에 오르자 아이는 이내 쌔근쌔근 코를 곤다. 집에 가서 무슨 얘기를 해줘야 하나. 남북정상회담, 대북특사, 비핵화, 평화체제. 머릿속을 맴도는 단어들로 아이의 눈높이에 맞추려니 눈앞이 막막했다. 에라 모르겠다. “동주야 일루 와봐.” 그러자 손을 뿌리치고 내뺀다. “형이랑 컴퓨터게임 할래.” 휴우 다행이다. “으응, 이따 돈가스나 먹으러 가자.”

아이들과 2함대를 둘러보기 며칠 전, 문재인 대통령이 23일 ‘서해수호의 날’ 정부기념식에 불참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에이 설마. 천안함 피격사건과 연평도 포격도발, 제2연평해전의 호국영령을 동시에 추모하는 자리인데 그래도 통수권자가 웬만하면 가지 않을까 싶었다. 지난해 취임 후 5ㆍ18민주화운동과 6ㆍ10민주항쟁, 올해 2ㆍ28민주운동까지 민주화 관련 기념식에 빠짐없이 참석해 국민과 호흡하는 인상적인 장면을 지켜봤던 터라 이번에는 대통령이 어떤 메시지를 던질지 궁금했다.

하지만 문 대통령은 22일 베트남으로 향했다. 기념식과 불과 하루 차이다. 순방 도중 전자결재로 개헌안을 재가한 26일은 공교롭게도 천안함 피격 8주기와 겹쳤다. 정상외교의 깊은 속내를 알 길은 없지만, 그 사이 올해 서해수호의 날은 천덕꾸러기 신세로 전락했다. 국민과 정치권의 시선이 온통 릴레이 정상회담의 훈풍과 청와대 주도 개헌의 충격파에 쏠리면서 ‘안보’는 뒷전으로 밀린지 오래다.

하긴 송영무 국방장관이 군심을 잡기 위해 전군 주요지휘관회의를 소집하려 해도 여의치 않다고 한다. ‘긁어 부스럼 내지 말라’는 청와대의 타박 때문이다. 정부 관계자는 “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 군이 자칫 거추장스런 존재로 비칠지 걱정”이라고 말했다.

사실 평택에 가서야 알았다. 2002년 제2연평해전 당시 빗발치는 포화를 뚫고 전우를 구하러 배 안을 뛰어다녔던 박동혁 병장은 온몸에 100여 군데 파편상을 입고 석 달간 투병하다 숨졌다고 한다. 함께 맞서 싸운 5명의 동료들을 저 세상으로 먼저 보내고 그렇게 긴 시간을 홀로 외롭게 버틴 셈이다. 불과 16년 전의 일이다. 무르익은 대화 분위기에 모처럼 찾아온 한반도의 해빙기를 감안하더라도 통수권자가 직접 어루만지고 되새겨야 할 이름이다. 천안함 46용사도 마찬가지다. 그 중 6명은 아직도 가족의 품에 돌아오지 못했다.

수년 전 홍범도 장군의 잊혀진 삶을 접한 적이 있다. 엄혹한 일제 강점기에 민족의 기개를 떨치며 당당히 선봉에 섰지만, 말년에는 낯선 카자흐스탄으로 끌려가 조국을 그리며 쓸쓸하게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늦었지만 문 대통령이 내년을 대한민국 건국 100주년으로 선포하며 광복군의 역사를 의욕적으로 되살리고 있는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하지만 박동혁 병장의 희생이 홍범도 장군의 영웅담에 가려져서는 곤란하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거울이라면, 안보는 미래를 위한 현재의 디딤돌이다. 물론 내 아이는 연평해전을 봉오동 전투와 마찬가지로 역사책에나 나올법한 케케묵은 과거의 사건으로 기억할는지 모른다. 오히려 김정은의 웃는 모습이 더 강렬하게 뇌리에 각인될 수도 있다. 제대로 알려주는 건 어른들의 몫이다.

김광수 정치부 차장 rolling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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