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스마 자한기르(1952~2018)

# 파키스탄 열악한 인권
종교법원서 율법따라 재판하고
여성의 증언 능력은 무시돼
시민사회 미성숙 탓 저항 미미
# 인권변호사가 되다
군부와 대립한 부친 영향 받아
법학 공부 후 첫 여성 로펌 열어
군부독재와 외로운 싸움을 시작
# 저항의 주춧돌을 놓다
명예살인 위기 여성 돕고
신성모독 이교도 소년 변호 등
살해 협박 속 법 개정 이끌어
아스마 자한기르는 파키스탄 변호사 인권운동가로 70년대 이래 이슬람 원리주의적 정치 종교권력과 불의의 법에 맞서 여성과 소수자 인권을 옹호했고, 국제사회에 현실을 고발했다. 그는 인권 불모의 터전에 저항의 주춧돌을 놓고 그 위에 오늘 파키스탄 시민사회의 기둥을 세웠다. 말랄라 유사프자이는 "파키스탄 민주주의와 인권의 구원자"라며 그를 애도했다. AP 자료사진

세계경제포럼(WEF)의 ‘2017 글로벌젠더격차보고서(GGGR)’에 따르면 2016년 파키스탄 의성 평등지수는 세계 144개국 중 143위다. WEF는 국가별 경제(취업률, 임금격차) 보건(출생성비, 기대수명) 교육(취학ㆍ진학율) 정치(의회ㆍ각료 성비)의 성 격차를 지수화해 매년 보고서를 낸다. 2006년 첫 해 112위였던 파키스탄은 2013년 135위, 2014년 141위였고, 이후 내도록 아랍 최빈국 예멘, 내전의 시리아 등과 함께 140위권을 맴돌고 있다. 성폭력과 명예살인 같은 젠더 범죄를 감안하지 않고도 그렇다. 1986년 설립된 파키스탄 민주주의ㆍ인권 NGO ‘AURAT 재단’의 2016년 보고서에 따르면 공식 집계된 여성 대상 폭력사건만 7,852건이었고, 파키스탄인권위원회(HRCP) 보고서는 2016년 명예살인 희생자만 668명(여성 512명)이라 밝혔다.

파키스탄 인권 현황을 보여주는, 유엔기구와 국제인권단체 통계들은 사실 너무 많아 일일이 인용하기도 힘들다. 숫자들이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고 있는지도 의문스럽다. 여성뿐 아니라 아동과 노동, 2억 명 전체 인구의 약 2~3%인 힌두교ㆍ기독교 소수 종교인들이 겪는 차별과 폭력도 심각하다. 신성모독법(Blasphemy Law)과 이슬람 종교법원인 ‘연방 샤리아 법원(Federal Shariat Court)이 세속 형법과 형사법원 위에 있고, 무법의 심판자인 원리주의 무장테러조직 파키스탄 탈레반(Tehreek Taliban Pakistan)이 있다. 테러에도 살아 남아 2015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교육 인권운동가 말랄라 유사프자이(1997~)와 달리, HRCP에 따르면 2016년에만 3명의 인권 활동가가 피살 당했다.

1960~70년대 냉전기 파키스탄이 남아시아 경제성장의 모델 국가로 주목 받았고 전(前) 수도 카라치(Karachi)가 아시아의 뉴욕으로 불렸다는 건, 다소 과장되긴 했지만 터무니 없지는 않다. 근 100년 영국 식민지배를 거쳐 47년 독립한 파키스탄은 인도와의 전쟁과 동파키스탄(방글라데시) 내전과 독립, 잇따른 군정 독재 등 정정 불안에도 적어도 세속화의 길을 벗어나지는 않았다. 77년 군인 정치인 지아 울 하크(Zia ul Haq)의 집권이 변곡점이었다.

주요 산업 국유화와 토지개혁 등 사회주의적 개혁 노선을 추구하던 알리 부토 민간 정부(1971~77)는 무능하고 부패했다. 그 정권을 쿠데타로 몰아내고 집권한 지아 울 하크는 취약한 정통성과 정치기반을 국가의 이슬람화로 돌파하고자 했다. 그는 78년 대통령 취임 직후 계엄령을 선포해 약 10년간 정당정치 활동을 금지했고, 이듬해 저 악명 높은 ‘후두드(Hudood) 법’을 제정했다. 형법상의 강간 간통 음주 절도 등 범죄를 민간 법원이 아닌 샤리아 법원에서 율법에 따라 재판하고, 처벌도 태형(채찍질)부터 사형까지 가능하도록 했다. 여성이 강간당한 사실을 인정받으려면 전과 없는 무슬림 남성 4명의 증언자를 확보해야 하고, 그러지 못하면 오히려 간통죄로 처벌 받아야 했다. 83년에는 ‘증거법 Law of Evidence’을 제정, 여성의 법적 증언 능력을 남성의 절반으로 규정했다. 신성모독법을 제정한 건 3년 뒤인 86년이었다. 그 법은 반정부ㆍ인권운동 탄압과 소수종교 억압, 다시 말해 지아 울 하크 이슬람체제 수호의 강력한 무기가 됐다. 79년 이웃 아프가니스탄을 소련이 침공, 미국-소련의 대리전이라 해야 할 아프간 전쟁이 시작되면서 파키스탄을 대소련 지하드 보급기지로 활용했던 미국은 그 정권에 막대한 자금을 퍼부었다.

아스마 자한기르(Asma Jahangir)가 변호사가 된 게 ‘후두드 법’이 제정된 1978년이었다. 법과 관습에 따라 여성은 아버지-남편의 사실상 소유물이어서 결혼-이혼의 자유에도 목숨을 걸어야 하는 그 억압 속에서, 그는 1980년 여동생(Hina Jilani)과 함께 파키스탄 최초 여성 전문 로펌(AGHS Legal Aid Cell)과 여성행동포럼(WAF)을 열어 활동했다. 87년에는 소수종교인과 아동, 노동권으로 인권운동의 저변을 확대한 시민단체 파키스탄 인권위원회(HRCP)를 설립, 인권실태 연례보고서 등을 통해 파키스탄 현실을 국제 사회에 알렸다. 구속과 가택연금, 상시적인 살해 위협 속에 근 40년 인권운동에 헌신한 자한기르가 2월 11일 별세했다. 향년 66세.

그는 펀잡(Punjab)주 라호르에서 1952년 1월 27일 태어났다. 초대 독립정부 고위 공무원이던 아버지(Malik Ghulam Jilani)는 아유브 칸(1958~69 집권) 군부 집권에 반발해 정치에 투신하면서 투옥과 가택연금을 반복적으로 당해야 했다. 무슬림 여성으로선 드물게 남녀공학 대학을 나온 어머니(Sahiha Jilani) 역시 정치ㆍ문화적으로 진보적이고 세속적이었다고 한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정치활동 여파로 67년 재산(토지)을 몰수당한 뒤 의류사업을 시작, 가족을 부양하며 두 딸을 법률가로 키웠다.

다시 환기하자면, 지아 정권 이전의 파키스탄은 달랐다. 1969년 펀잡 주지사 관저까지 여성인권 행진에 가담한 게 13세 자한기르의 첫 인권운동이었다고 한다. 그는 19세이던 71년 아버지가 두 번째 군부인 아히야 칸(1969~71년 집권) 정부의 벵골인(동파키스탄) 학살에 항의하다 투옥되자 펀잡 주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 고등법원에서 패소한 뒤 72년 대법원에서 승소했다. 그의 승리는 한 해 전 총선으로 알리 부토의 파키스탄인민당이 승리하면서 정권이 교체된 덕이었을 것이다. 훗날 아스마는 “내게 법원은 친숙한 곳이었다. (6살 이후) 아버지는 툭하면 투옥됐고 감옥 면회조차 불가능했다. 법원은 좋은 옷 입고 아버지 만나러 가는 곳이었다”고 말했다.(가디언, 2018.2.12)

물론 소송을 준비하고 진행하며 법에도 익숙해졌을 것이다. 그는 라호르 키네어(Kinnaird) 칼리지를 거쳐 펀잡대에서 법학을 전공했다. 78년부터 2년간 라호르 고등법원 연수를 받은 뒤 동생과 다른 두 명의 여성 변호사와 함께 여성전문 로펌을 개소, 후두드법과의 힘겨운 전쟁을 시작했고, 83년 2월 ‘증거법’ 제정 움직임에 맞서 펀잡여성변호사협회 회원들을 이끌고 라호르 고등법원까지 행진을 벌이기도 했다. 그 행진은 증거법의 위헌(헌법상의 평등조항) 청원서를 법원에 전달한다는 명분이었지만 사실상 계엄령 하의 첫 대중 시위였다. 참가자들은 무차별 구타와 함께 전원 연행 당했다.

83년 그 해, 20세 여성 노동자 사피아 비비(Safia Bibi)가 지주 부자에게 잇달아 강간 당한 뒤 임신까지 하면서 비비의 아버지가 강간 혐의로 부자를 고소한 사건이 있었다. 미혼 임신이어서 강간 사실을 인정받지 못하면 간음 혐의로 후두드 법의 처벌을 받게 될 처지였다. 비비는 시각장애인이었고, 법원에서 피해자 증언조차 인정받지 못했다. 그는 간음 혐의로 3년형과 15대 공개 채찍형 및 100루피의 벌금형을 선고 받았다. 그 사건에서 자한기르는 패했지만, 여성행동포럼 회원들과 함께 법 개정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untyinghardknots.com)

가정 폭력에 시달리던 두 아이의 어머니 사미아 사르와르(Samia Sarwar, 1970~1999)는 한 군인 남성을 만나 사랑에 빠진 뒤 이혼 소송을 도와달라며 자한기르의 로펌에 도움을 청했다. 딸의 외도와 이혼에 격분한 아버지와 친척들은 사르와르의 명예살인을 시도했고, 어머니도 거기 동조했다. 사르와르는 변호사 사무실에서 어머니의 운전기사를 가장한 남성의 총격에 살해 당했다. 파키스탄 형법에는 살인 등 범죄 피해자의 가장 가까운 친척이 범인을 용서하거나 보상금을 받고 합의하면 처벌을 면해주는 사면 법률(Qisas Diyat Law, 90년 시행)도 있다. 사르와르 경우처럼, 명예살인의 경우 대부분 주범이 가장 가까운 혈족이다. 자한기르 역시 살해 협박에 시달렸고, 다행히 집을 비워 화를 면했지만 실제로 괴한들이 집에 들이닥치기도 했다. 조사결과 군부 일파의 소행으로 밝혀졌으나 자한기르는 정부와 보안경찰이 사주한 일이라고 주장했다. 그가 두 딸을 영국으로 유학 보낸 것은 그 직후였다.(commondreams.org) 그는 사르와르를 지켜주지 못했지만 활동가들과 더불어 명예살인과 후두드 법 등 이슬람 율법에 의해 훼손된 파키스탄 법치의 문제점을 국제사회에 알렸고, 역부족이긴 했지만 일부 상원의원들의 법 개정 움직임을 이끌어냈다.

95년 모스크 담장에 낙서를 했다가 신성모독 혐의로 사형 선고를 받은 10대 기독교 소년에 대한 변호는 드물게 그가 이긴 사건이었다. 소년의 혐의는, 혐의를 공개하는 것 자체가 신성모독이라 파키스탄 언론에 명시적으로 보도된 바 없지만, 예언자의 스펠링을 틀리게 썼다는 설이 있다. 이교도 10대 소년의 실수라며 이례적으로 무죄 판결을 내린 판사는 2년 뒤 피살 당했고, 폭도들은 자한기르를 찾아 남동생 집에 들이닥치기도 했다고 한다.(amnesty.org)

파키스탄 일간지 ‘Dawn’의 편집인 아바스 나시르(Abbas Nasir)는 “파키스탄에서 가장 배짱 좋은 사람이 아마 아스마일 것”이라고, “그는 뭐든 자신이 옳다고 믿으면 무지와 불관용의 대중 앞에서도 늘 겁 없이 발언하곤 했다. 파키스탄 같은 나라에서는 그 자체로 환상적인 일이었다”고 말했다. 노예노동으로 착취당하던 벽돌공들의 권리를 변호한 적도 있었다. 판사가 “이런 악취 나는 사람들을 법정까지 데리고 왔느냐”고 꾸짖듯 말하자 자한기르는 “바로 그런 이들을 위해 당신이 거기 있는 것”이라고 쏘아붙이기도 했다.(nyt, 2018.2.11)

자한기르는 활동가와 언론인 납치ㆍ고문을 일삼던 정보경찰(ISI)에도 주눅들기는커녕 TV 생방송에 출연해 “그 얼간이들(duffers), 얼간이 같은 장군들은 병영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한 적도 있었다. 그는 민간정부가 아무리 부패하고 무능해도 군부정권보다 낫고, 민주주의가 아무리 형편없어도 그것만이 유일한 해답이라고 ‘뉴요커’ 인터뷰에서 말했다.

국제 사회의 압박에 불구하고 파키스탄의 변화가 더딘 것은 시민사회가 미성숙한 탓이 크다. 희망을 찾지 못해 교육 받은 이들도 대개는 외국으로 ‘탈출’한다. 자한기르는 2012년 6월 ISI가 자신을 살해하려는 계획을 추진 중이라며 기자회견을 열고, “(늘 있어온) 단순한 협박이 아니라 구체적인 계획이 있다는 경고를 받았다”고 폭로했다. 왜 외국으로 피신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그는 “나는 떠나지 않는다. 내 조상이 여기 묻혀 있고, 내 삶이 여기 있다”고 말했다.

2018년 3월 8일 여성의 날 집회에 모인 파키스탄 카라치의 여성들. 저렇게 모여 "Stop Killing Women" 이라는 피켓을 들게 된 것도 최근 몇 년 사이의 변화다. AP 자료사진

자한기르는 ‘신성의 형벌? 후두드법’(1990), ‘신의 가호를 받지 못하는 아이들: 파키스탄의 아동 죄수들’(1993) 등의 책을 썼고, 유엔의 이란ㆍ인도 인권 특별조사위원 등을 역임했다. 그는 반 이슬람분자, 서방과 인도의 첩자라는 비난과 의심을 받았고, 자유주의 시민운동 진영 안에서도 군부와만 싸우고 민간정부의 부패나 반인권, 인도ㆍ미얀마 소수종교인들의 인권은 등한시한다고 비판 받았다. 그는 “물론 인도 카슈미르나 버마 무슬림 로힝야, 오리사의 기독교인들이 겪는 인권 현실은 무척 슬프고 고통스럽다. 하지만 나는 내 나라에서 내가 더불어 살아가는 이들이 겪는 일이 훨씬 고통스럽다”고 말했다.

그는 수많은 국제 인권상을 수상했다. 대안노벨상이라 불리는 스웨덴의 ‘바른 삶 상 Right Livelihood Awards 2014’ 수상연설에서 그는 파키스탄의 ‘희박한 정의’를 언급한 뒤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때로는 정의를 외치는 것 자체가 만족감을 주기도 한다. 외치고, 외치고, 외치고, 또 외치고, 외쳐야 한다. 그러면 언젠가는 듣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2006년 페르베즈 무샤라프 정권은 후두드법을 개정, 강간의 경우 증언 외에 법의학 증거도 인정하고 샤리아 법정이 아닌 민간 법정에서 재판 받을 수 있게 했고, 태형 등 종교적 처벌 규정도 없앴다. 하지만 펀잡 주 정부가 강간 재판에서 DNA 증거를 판결에 반영하도록 ‘증거법’ 개정안을 마련한 것은 불과 한 달 전인 올해 2월이었고, 그나마도 “DNA 분석 결과는 한낱 전문가의 의견일 뿐”이라는 이슬람 정당ㆍ단체의 저항을 받고 있다.(dawn.com) 성인 이슬람 여성이 부모 등 보호자의 의사와 상관없이 배우자를 선택해 결혼할 수 있다는 대법원 판결이 나온 것은 2003년이지만, 명예살인과 범인 사면조항 실정을 고발한 샤민 오바이드 치노이(Sharmeen Obaid-Chinoy)의 다큐멘터리 ‘강가의 소녀; 용서의 대가 A Girl in the River: The Price of Forgiveness’(2016 오스카 단편다큐상 수상)가 발표된 것은 2015년이었다. 희망조차 품기 무거워 보였던 파키스탄도 그렇게 더디게나마 변화하기 시작했다. 지난해에는 힌두교도의 혼인을 법적으로 인정했다.

명예살인의 진실을 다룬 단편 다큐멘터리 '강가의 소녀'. 2016년 오스카 단편다큐멘터리 상을 수상한 저 작품은 유튜브에 공개돼 있다.

2012년 미국 샌디에이고대 강연에서 자한기르는 80년대 첫 옥살이를 하고 나온 자신에게 어린 딸이 ‘왜 툭하면 경찰서에 끌려가고 감옥까지 가면서 이 일을 계속하냐’고, ‘여성 인권이야 엄마가 아니어도 언젠가는 회복되지 않겠냐고, 그거 조금 앞당기자고 우리를 내팽개쳐 두는 거냐고’ 불평한 일을 소개하며 “그 한 시간을 앞당기기 위해 지금 우리가 싸워야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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