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일본 작가 가와타 후미코

양징자(일본군‘위안부’문제해결 전국행동 공동대표)

2013년 11월23일 도쿄 이타바시(板橋)구에서 송신도(가운데) 할머니의 생신 잔치를 하고 있는 가와타 후미코(왼쪽)씨와 양징자 대표의 모습.

“한국 사람들은 김학순 할머니가 일본군 ‘위안부’로서 처음 공개증언에 나선 분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아닙니다. 처음으로 자신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라고 밝힌 분은 일본 오키나와에 있었습니다. 배봉기 할머니입니다.”

올해 2월초, 서울의 주한 일본대사관 앞 평화비(소녀상)를 찾은 우리 일행에게 그 곳에서 1인 시위를 하던 평화비 지킴이 청년이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는 ‘배봉기’라는 이름이 새겨진 디딤돌도 있다면서 평화비 앞에 나란히 설치된 ‘평화 디딤돌’을 가리켰다. ‘배봉기’ 디딤돌은 지킴이들이 밤을 샌다는 비닐텐트 앞쪽에 있었다.

나는 그 청년에게 배봉기 할머니에 대해 쓰여진 책을 아냐고 물어봤다. “네, <빨간 기와집>이란 책을 일본 작가 분이 썼고 한국에서도 번역 출판됐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이 분이 바로 그 책을 쓴 가와타 후미코라고 말하자 청년은 당황하며 “죄송합니다. 젊으셨을 때 사진밖에 뵌 적이 없어서 몰라 봤습니다” 라고 여러 번 고개를 숙이곤 했다. 하긴 1987년 <빨간 기와집>을 출간했을 때 45세였던 가와타가 이젠 75세가 되었고, 4년전 암 투병으로 위를 모두 적출하고 나서 몸이 절반 정도로 줄어들었기 때문에 5년전 사진을 본 사람이라도 현재 가와타를 알아보긴 힘들 것이다.

내가 가와타를 알게 된 것도 <빨간 기와집>이었다.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가 결성된 1990년, 김학순 할머니가 증언하신 1991년보다 훨씬 전인 1987년, 아직은 일본에서도 한국에서도 일본군 ‘위안부’문제가 거론되지 않던 시기에 출판된 이 책의 서평을 나는 한 문예잡지에 썼다.

배봉기 할머니가 겪은 압도적인 고독에 먹먹해진 가슴으로 글을 쓴 기억이 난다. 내게 배 할머니의 삶을 알려 준 가와타를 처음 보게 된 것은 1990년 12월. 당시 정대협 공동대표였던 윤정옥의 강연회에서 일본 여성들이 <종군위안부 문제를 생각하는 모임>을 결성했다며 구성원들이 그 자리에 서서 인사를 하는데 그 안에 활짝 웃는 가와타 후미코가 있었다.

그 강연회를 계기로 나는 재일동포 여성들끼리 <종군위안부문제 우리여성네트워크>를 결성하게 되고 가와타가 소속한 단체와 연대하게 된다. 1992년 1월, 우리 두 단체를 포함해 4개 단체가 설치한 <위안부 110번>이란 신고전화에 송신도 할머니에 관한 소식이 전해진다.

“미야기현에도 ‘위안부’가 된 한국인 여성이 있으니 연락해 보세요.” 그러나 그 전화를 걸어온 자는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고 <위안부 110번 실행위원회>는 그 여성을 찾아가지 않기로 결정한다. 피해여성 자신이 바라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가와타가 이런 결정에 따를 수는 없는 법. 온화하고 웃음이 많고 누가 자신을 나무라기라도 한다면 바로 눈물을 글썽하며 대꾸도 못하는 가와타가 실은 열정적이고 한번 꽂히면 안 가리고 밀어붙이는 사람이란 것을 누가 모르랴. 도쿄에서 5시간 거리에 있는 그 여성, 송신도 할머니 댁을 무턱대고 찾아간 가와타는 그제서야 실행위원회에 전화를 걸었다. “미안해, 나 와버렸어.”

운동은 이런 사람의 존재 때문에 추진된다. 하지만 이런 사람만으로는 오래 계속될 수 없는 것도 운동이다. 그 후 나는 송신도 할머니의 재판을 지원하는 모임에서 가와타와 함께 10년간 싸우고, 재판 후에도 송신도 할머니의 생활과 투쟁을 뒷받침하는 운동을 함께 해왔다.

가와타는 말한다. “난 원체 운동이라는 거 해 본 적도 없고 능력 자체가 없어. 그냥 내가 한 일이라곤 배봉기 할머니를 사람들에게 알려 준 것과 송신도 할머니를 참 좋은 사람들에게 연결시켜 준 것뿐이야.”

그 송신도 할머니의 유해를 천안 망향의 동산에 모시기 위해 올해 2월 우리는 함께 한국으로 갔고 거기서 배봉기 할머니에 대해 설명하는 청년을 만난 것이다. “한국 청년들이 배봉기 할머니를 기억해 준다는 것이 너무 좋아서….” 그날을 떠올리면 가와타는 지금도 눈시울을 적신다.

가와타가 처음 한국땅을 밟은 것은 1978년. 배봉기 할머니의 고향을 찾아가 배봉기 할머니 언니를 만났고 배봉기 할머니가 어릴 때 빨래를 했다는 개울에 발을 담갔다. 그 후 송신도 할머니를 모시고 할머니의 고향을 찾아가는 길에 동행한 것 말고는 한국을 찾아간 적이 별로 없다. 펜 하나로 혼자 딸 둘을 키운 가와타에게 해외 여행은 말 그대로 사치였기 때문이다. 위암 수술을 받은 후에는 건강에 대한 염려가 있어 더더욱 그랬다.

같이 가자고 여러 번 권했지만 결코 따라 나서지 않은 가와타가 작년 11월에서 올해 2월까지 고작 넉달 사이에 3번이나 한국을 찾았다. 작년 11월, 한국에 와서 배봉기 할머니에 대해서 강연해 달라는 정대협의 요청을 이번에도 어렵겠지 하면서 전달한 나에게 가와타는 곧바로 “갈게”라고 답했다. “왜 그러셨어요?”라고 나중에 물어봤더니 대답은 “정대협이니까”.

아무튼 이 여행이 가와타에게 대단한 자신감과 새로운 글 주제를 안겨줬다. 강연장은 청소년들로 가득 찼다. 진지한 질문들에 감동한 가와타는 한국에 오래 체류해 한국 청소년들이 일본군 ‘위안부’문제를 기억하고 계승하려는 힘이 어디서 나는지에 대해 취재하고 싶다고 말했다. ‘위안부’피해자들의 증언을 직접 들은 사람으로서, 앞으로 직접 듣지는 못할 세대들에게 어떻게든 전달하는 게 자신의 책임이라는 것이다.

수술 후에도 글쓰기를 포기하지 않고 매일 꼬박꼬박 글을 쓰는 그녀의 최대 건강법은 쓰고 싶은 주제를 발견하고 그 일에 꽂혀서 나아가는 것. 한국의 청소년들이 현재 그녀의 건강을 챙겨주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사실 한국에 체류한 5일간에 몸무게가 2kg이나 늘었다고 한다. 일본에 돌아오면 제자리로 돌아가는데 갈 때마다 또 2kg씩 는다. 음식이 맛있어서다. 떡만두국에 꽂혔다. 한국에서 매일 맛있는 떡만두국을 먹으면서 청소년들을 만나 얘기를 나누는 날을 꿈꾸는 가와타의 건강 상태는 날로 좋아지고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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