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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드뉴스] 민주주의 투쟁사의 서막 ‘마산 의거’의 주역들

입력
2018.03.23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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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국민들이 4ㆍ19혁명을 현대 민주주의 투쟁사의 시작점으로 알고들 계신데요, 사실 이승만 독재정권에 대항한 혁명의 전조는 그로부터 한달 전 ‘마산’에서 시작됐다고 합니다. 9명 청춘의 목숨을 앗아간 58년 전 그 해 잔인했던 마산의 봄, 그 ‘수 만개의 돌덩이’가 남긴 흔적을 따라가 봅시다.

기획ㆍ제작: 박지윤 기자 luce_jyun@hankookilbo.com

그 해 봄, 무뎌진 바람 끝엔 진득한 피 냄새가 섞여 있었다. "이노무 새끼들이 사람을 죽였다!'  1960년 3월 15일 경상남도 마산,  시민들은 빼앗긴 투표용지 대신 돌멩이를 손에 쥐었다.

철길의 자갈까지 그러모았다. 있는 힘껏 던지고 나면 다시 맨손, 진압대를 등지고 허리를 굽혀 돌을 줍던 그들에게 총탄이 날아들었다. 

얼굴 한가운데 최루탄이 박힌 채 4월의 바다 위로 떠올랐던 열여섯의 소년 김주열은 바로 이 날의 아비규환 속에서 외롭게 죽어갔다. 하지만 ‘김주열’ 이름 석자로 각인된 그 날의 거리엔, 사실 그처럼 돌을 들고 나섰던 만 명의 ‘김주열들’이 있었다.

서슬 퍼런 독재정권의 부정선거에 정면으로 맞섰던 민주당원들, 스스럼없이 대의에 몸을 맡긴 교복 바람의 학생들이 바로 그들이다. 

3월 15일 새벽, 마산시 장군동 투표소 앞은 한쪽 어깨에 자유당 완장을 두른 채 순번을 기다리는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3명 혹은 5명이 한 조를 이룬 완장 부대는 사방이 뻥 뚫린 투표소 안을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민주당 경남도의원 정남규가 투표소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경찰에 잡혀가는 사이 몰래 숨어든  부인 안맹선이 목격한 광경은 가관이었다.“아직 투표도 안 한 투표함 하나를 자빠뜨렸는데, 시상에 거 안에서 표가 억수로 쏟아졌다 안 캅니까."

“협잡 선거 물리치고 공명선거 다시 하자!” 투표소에 입장하지 못한 민주당원과 참관인들이 선거무효를 외치며 거리로 나섰다. 그러자 투표번호표를 받지 못한 유권자들도 합세했다. 열댓 명은 순식간에 수백 명이 됐다. 

앞장서 걷던 정남규, 정경도, 정진철 등 5명의 민주당 간부가 경찰의 총부리에 맞아 개처럼 끌려갔다. "개표가 열리는 마산시청 앞에서 해가 지면 다시 만나자." 시민들은 다짐했다. 

“며칠 밤낮을 취조실에 쳐 박아 두고 복날에 개 잡듯이 때렸어요. 빨갱이라고 자백하라면서 입에 자갈을 물리고..." "하루는 내가 정신을 잃자 죽은 줄 알았나 봐. 저들끼리 그러더라고요. “어디에 갖다 버리면 좋겠노?”라고.” (정경도 민주당원 증언)

두들겨 맞은 전신이 풍선처럼 부어올라 피범벅이 된 내복을 제 힘으로 벗어낼 수 없었다. 3월 15일에 시작된 감옥에서의 ‘생지옥’은 4월 26일 이승만이 하야 성명을 발표하면서 비로소 끝이 났다. 

옥살이는 50일 남짓이었지만, 고문의 상처는 평생을 갔다. "아버지는 1977년 예순의 나이로 돌아가시기 전까지 이십 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고문 후유증에 시달리셨어요. 끝내 그로 인해 돌아가셨습니다.”(정진철 장남 용수씨 증언) 

당시 시위를 주도했던 정남규 도의원은 박정희 정권에게 보복을 당하기도 한다.“박정희 정권 사람이 찾아와 아버지에게 5ㆍ16을 찬양하는 성명서를 발표해 달라고 했어요. 들어주지 않자 다음 해 선거를 앞두고 말도 안 되는 죄목을 씌워 연행해 갔죠.”(정남규 장남 현팔씨 증언) 

마산의거의 또 다른 주역은 김주열의 이름에 가려진 8명의 소년들. “아들놈이 흥분할 때만 해도 크게 개의치 않았어요. 데모는 하지 않겠노라고 선생님과 약속을 했었다니까. ‘잠시 구경만 하고 올낍니더’ 하고 나선 아들이 10시가 돼도 들어오지 않자, 그제야 육감이 이상했습니다.” (희생자 김용실의 어머니 이명선 여사 증언)

마산고 1학년이었던 그는 해거름을 등지고 현관문을 나섰고 다시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야구를 좋아했던 소년은 그 날 시위대의 맨 앞에서 야구공 대신 돌멩이를 들었다. 

“용실이 아래 남동생도 시위에 나갔다가 형을 만났대요. “형님 언제 나왔노?” 하니까 “지금 사담할 시간 없다”며 앞으로 달려 나가 더래요." (김용실의 누나 김옥주씨 증언) 또래에 비해 키가 훌쩍 컸던 용실의 뒤통수가 인파 속에서 빼꼼히 솟아 서서히 멀어졌다. 그 모습이 가족의 마지막 기억이 됐다.

아들은 머리 한가운데 총탄이 박힌 채 발견됐지만, 시신조차 돌려받을 수 없었다. “장례를 지내면 용실이 친구들이 따라 나와 데모를 할까 봐 그랬다는 거예요.” 경찰들은 그의 주머니에 몰래 불온 삐라를 넣어 ‘빨갱이’로 조작을 시도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한 밤 중에 몰래 시체를 인도받아 허둥지둥 화장을 했다. 그렇게 소년이 살다 간 흔적은 봉분도 비석도 없이 가묘로만 남았다. 

같은 날 함께 세상을 등진 또 다른 소년에겐 제 시신을 고이 수습해 줄 가족마저 없었다. 경찰이 쏜 총탄에 가슴을 맞고 그 자리에서 숨진 오성원의 나이는 열아홉. 생전 그는 시내의 다방을 전전하며 구두를 닦았다

함께 마산 거리 곳곳을 누빈 동료 구두닦이 두 명이 울면서 시신을 거뒀다. ‘길 가는 나그네여. 여기 민주주의를 찾으려다 3월 15일 밤, 무참히도 떨어진 21년의 꽃봉오리가 누워 있음을 전해다오.’ -오성원의 묘비석-

김주열(당시 16세), 김용실(17세), 오성원(19세)을 포함한 9명의 희생자들은 모두 까까머리의 10대 소년들이었다. 마산의 잔인한 봄엔 꽃이 피기도 전에 그렇게 청춘이 지고 있었다. 

3월 15일 밤 홀연히 사라졌던 김주열의 시신은 처참한 모습으로 마산 앞바다에 떠올랐고, 꺾였던 투쟁을 다시 일으켰다. 전국의 시민들이 궐기했고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아 이승만의 독재정권은 무너졌다.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역사의 그날, 4ㆍ19 혁명이다. 

많은 이들이 1960년 4월 19일을 현대 민주주의 투쟁사의 시작점으로 알고 있는 것은 아마도 그 희생의 크기 차이 때문일지 모르겠다. 하지만 모든 파괴는 균열에서 시작된다. 

제1공화국의 장벽에 처음으로 균열을 냈던 것은 다름 아닌 ‘3월의 마산’이었다. 주권자를 기만한 부정선거를 향해 던진 ‘그 수 만개의 돌덩이’가 없었다면 이 땅의 민주주의는 더딘 걸음을 하지 않았을까.

기획, 제작 :박지윤 기자 luce_jyun@hankookilbo.com

사진출처 : 3ㆍ15의거 기념사업회 제공, 나무위키, 국립 4ㆍ19 민주묘지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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